독서삼매로 여름나기

지혜의 향기/더위 사냥

2007-01-23     관리자


오온(五蘊)이 성한 사람은 여름을 견디기 힘들 것이다. 쇠한 것도 장애지만 성한 것도 장애다. 오온이 성한 사람을 다혈질의 사람이라고 칭해보자. 다혈질의 사람은 성한 기운을 고루 분산시키는 ‘기분(氣分)’의 원리를 모른다. 몸 곳곳으로 기를 분산시켰을 때 평온해지고 쾌적해진다. ‘기분(氣分)이 좋다’라는 말은 그런 이유에서 나온 말일 게다.

기운을 분산시킬 줄 모르는 다혈질의 사람에게 여름나기는 혹독한 시련 그 자체일 것이다.
더위를 이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더위를 하심으로 끌어안으면 된다. ‘여름이니 더운 건 당연해, 찜질방에서 찜질한다고 생각하고 땀 좀 흘리는 거지.’ 이런 식으로 말이다.
승복을 입고, 그 위에 가사장삼까지 걸치고 한여름 법당에 앉아 독경삼매에 든 스님의 이마에 땀방울 하나 맺히지 않은 것을 본 적이 있다. 스님은 어린아이 달래듯 더위를 달래는 법을 아는 것이다. 마음의 습기를 제거하는 법을 아는 것이다.
50도가 넘는 불가마 속에 들어가 앉았어도 덥기보다 오히려 시원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 않는가? 맞서면 맞설수록, 대들면 대들수록 화가 치밀어 더 더운 것이다.
끌어안으면 뜨거운 불도 약이 된다. 뱀도 밟지 않으면 나를 피해 돌아가고, 입 벌린 호랑이도 내가 놀라지 않으면 돌부처인 줄 알고 덮치지 않는 법이다. 그렇듯 ‘더위야! 네가 아무리 더워봐라 내가 에어컨 사나 생맥주 사먹지’ 이런 식으로 배짱을 튕기면 이미 더위는 천리 밖으로 줄행랑을 치고 곁에 없는 것이다.
난 여름에 독서를 즐긴다. 특히 몇 십 년 만에 찾아 온 살인적 더위라고 겁을 줄 때 더욱 독서를 한다. 미처 다 읽지 못하고 덮어둔 책을 꺼내 소나무 숲으로 간다. 숲을 뒤지다 보면 숲골이 발견되고, 숲골에는 영락없이 작은 물줄기가 휘돌아나가기 마련이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목침삼아 베고, 소나무 그늘을 돗자리 삼아 눕는다.
배경음악으로 매미 울음소리가 깔리고, 특별 서비스로 제공되는 한 줄기 바람은 방금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향기롭다. 그런 고요와 평안의 복판에서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긴다.
무명에 가려 눈이 멀고, 귀도 막힌 죽은 영혼에 지혜의 말씀이 닿는 순간, 방안에 불이 켜지듯 오감이 열리는 짜릿함을 느낀다. 내가 나를 넘어서는 순간에는 더위와 추위 따위는 있어도 없다. 이 지상에 만물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기온의 변화는 어떤 인연법의 결과인지. 『칸트와 불교』를 읽다보면, 『노장사상』을 읽다 보면 내 오랜 무지에 입이 딱 벌어져 이마에 땀이 흘러도 닦을 생각을 못한다.
에어컨이나 얼음보다도 확실하게 더위를 쫓을 수 있는 것이 독서삼매다. 삼매는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게 하는 최상의 극복 수단이다. 찜통 속같이 무더운 여름 밤 잠을 이룰 수가 없는 서울 사람들이 한강변으로 나와 좀비처럼 돌아다닐 때, 나는 20권짜리 무협지를 빌려 밤새 ‘더위’의 ‘더’ 자도 모르고 골방에서 쾌적하게 보냈던 젊은 날이 기억난다.
올해는 25권짜리 『고승열전』을 읽으며 더위를 망각할 작정에 있다. 여름날의 독서삼매는 불쾌지수가 아닌 행복지수를 높여 줄 것이다. 마음의 습기를 제거하고, 지혜도 넓히고, 성한 기운을 기분(氣分) 좋게 만들고…. 돈 들이고 멀리 떠나는 바캉스나, 비싼 보양음식이나, 에어컨의 구입보다도 실속 있고 경제적인 더위 퇴치법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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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와|한양여대 문예창작학과와 중앙대 예술대학원을 졸업했으며, 199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 ‘지하역’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저서로는 시집 『바람난 세상과의 블루스』, 여행산문집 『시가 있는 풍경』, 기행집 『비구니 산사 가는 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