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야식(阿賴耶識)

심층교학해설`유식학과 인간성(17)

2007-08-09     관리자
 

     선각자들이 깨달은 아라야식

  위(전호)에서 안식(眼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등 칠식을 살펴 왔다. 이 일곱 가지 식(識)은 우리 인간의 정신활동에 온갖 심부름을 다하는 심식이다. 눈으로 색깔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촉감을 느끼는 등 전오식(前五識)을 오근(五根)을 통하여 객관계를 부지런히 출입하면서 접촉하고 또 선(善)과 악(惡)을 대하며, 고(苦)와 낙(樂)을 맛보며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전오식만으로는 결정적인 판단과 분별력이 부족하므로 여기에는 반드시 의식(意識)이 가담하여 선악과 고락을 구별해 준다. 그리고 내면세계의 과거·현재·미래사를 생각하고 추리하며 예측하고 판단하며 온갖 인간의 행동을 주관하는 것이 의식이다. 이와 같은 의식이 사물의 가치를 판단하고 선악의 행동을 하고자 결정을 내릴 때 우리 인간의 움직임은 시작되고 또 결말을 짓게 된다. 그러므로 의식의 정화는 매우 필수적인 것이다.

  다음 말나식(末那識)은 본래 인간이 천부적으로 보존하고 있는 불성(佛性)과 진여성(眞如性)인 본성에 대한 착각을 야기하여 무지의 근본이 되는 무명을 형성하는 최초의 정신이다. 이로 말미암아 여타의 심식도 온갖 번뇌를 야기하게 되며 우리 인간의 마음은 선성과 악성으로 갈라지는 분별의식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마음을 유루심(有漏心)이라 하며 유루심이 잠재하고 있는 한 선업과 악업을 조성하면서 살게 된다. 그러므로 여러 심식에는 작용에 해당하는 심소(心所)가 있으며 심소는 51종(五十一心所)이나 있어 인간정신의 활동은 다 여기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이상과 같이 다양한 성질을 가진 칠전식(七轉識)과 식에서 발생되는 심소의 활동은 모두 업력이 되는 것인데, 그 업력은 과연 어디에 보존되어야만 하는가. 그리고 우리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무엇에 의하여 유지되며 수명도 무엇에 의하여 좌우되는가에 대한 유식학자들의 추적에 의하여 비로소 아라야식(alaya-vijnana)이라는 정신체가 발견되었다. 다시 말하면 이 아라야식이 앞에서 말한 정신(七識)과 육체(五根)를 유지시켜 주고 또 이들 정신과 육체의 황동에 의하여 조성되는 업력도 보존하여 다음의 결과를 받도록 해주는 주체가 곧 아뢰야식임을 인도의 무착보살(無着菩薩, AD.4세기경)을 비롯한 선각자들은 깨달은 것이다.

  이제 무착보살을 비롯한 여타의 선각자들이 저술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섭대승론(攝大乘論),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성유식론(成唯識論), 성유식논술기(成唯識論述記)등 여러 유식학 계통의 논서 들에 의하여 아라야식의 내용을 하나하나 해설하기로 한다.

  아라야식(阿賴耶識)은 여러 번역자에 따라 아리야(阿梨耶, 阿(?)耶), 아라야(阿羅耶) 등으로 표현된 것이 많다.

  그 뜻은 번역자들에 의하여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같다고 볼 수 있다. 한 말로 말해서 아라야식(阿賴耶識)은 중국의 현장법사(玄奘法師, 600~664)가 번역한 것으로 이른바 신역(新譯)이다.

  그러나 그 밖의 칭명은 대부분 현장법사 이전에 번역된 구역(舊譯)에 속한다. 그 뜻은 종파(宗派)에 따라 많이 다를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지론종(地論宗) 계통에서는 아뢰야식을 청정식(淸淨識)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법상종(法相宗)과 섭론종(攝論宗) 계통에서는 망식(妄識0으로 보았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있는데 대체로 법상종의 의견에 따라 설명해 온 것이 지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어느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아라야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유식학 이해에 도움이 되고 또 우리의 현실에 알맞은 이론이라면 모두 소개하고자 한다.


     아라야식의 삼상(三相)

  아라야식을 설명하고자 할 때 먼저 그 내용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첫째는 자상(自相), 둘째는 과상(果相), 셋째는 인상(因相)이다. 이들을 합쳐 아뢰야식의 삼상(三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의 세 가지 모습이라는 말로서 이들 삼대 모습(三大相)을 잘 이해하면 아라야식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다. 그 삼상의 내용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자상(自相)은 아라야식의 자성(自性)을 말하며 다른 말로는 아라야식의 성능(性能)을 뜻한다. 이 자상은 여타의 과상(果相)과 인상(因相)을 제외하고 따로 내용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삼상(三相)의 뜻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상은 아라야식의 자성(自性)과 성능(性能)을 말하며, 과상은 제팔아라식의 과보를 받는 결과를 뜻한다. 그리고 인상은 아라야식이 모든 업력을 보존하고 있는 내용을 말한다. 이제 이들 삼상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ꊱ 아라야식의 자상(自相) : 아뢰야식의 자상은 이 식의 총체(總體)를 의미한다. 유식론(唯識論)에 의하면 자상(自相)은 총체이고 과상(果相)과 인상(因相)은 별체(別體)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자상은 중생들이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에 의하여 과보를 받는 과상의 뜻도 가지고 있고, 떠 중생들이 지은 선업과 악업의 업인(業因)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의 뜻도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아라야식의 자상은 과상과 인상의 내용을 가지고 자체(自體)를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과상과 인상을 떠나서 따로 자상을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제 아라야식의 자상에 대해서 살펴보면, 아라야(alaya)는 본래 인도 말인 범어(梵語)로서 장(藏)이라고 한역(漢譯)하였다. 장(藏)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업력들을 감싼다는 뜻에서 포장(包藏)이라는 뜻도 있고, 또 업력들을 포함시키거나 보존한다는 뜻에서 함장(含藏)이라는 뜻도 있으며, 그리고 정신과 육체 등 모든 것을 포섭하여 유지시켜준다는 뜻에서 섭지(攝持)라 하며 동시에 무엇이나 잘 포섭한다는 뜻에서 포섭(包攝)이라는 뜻도 있다.

  이와 같이 아라야에는 다양한 뜻이 있으며 이러한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하는 정신의 체성이라는 뜻을 부가하여 아라야식(alaya-vijnana)이라고 명명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기능과 역할을 하는 아라야식의 자체를 능장(能藏), 소장(所藏), 집장(執藏) 등 삼장(三藏)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렇게 분류한 것은 앞에서 설명해 온 칠식(七識)의 행동에 의하여 조성된 업력과의 관계를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데서 비롯된다. 이들 삼장의 뜻은 다음과 같다.

  ㉮ 능장(能藏) : 능장이라 함은 아라야식이 모든 업력을 능히 포섭하여 보존한다는 뜻이다. 업력이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등 칠식이 선행과 악행 그리고 선행도 아니고 악행도 아닌 중간의 무기행(無記行)등 온갖 행동을 곧 업(業)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업에는 반드시 다음에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세력과 힘이 있다는 뜻에서 힘력(力)자를 부가하여 업력(業力)이라 이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업력은 또 종자(種子)라고 하는데 그것은 마치 어떤 종자<씨앗>가 반드시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는 뜻을 따서 호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업력을 종자라고 별명을 붙여 부를 때가 많은데 특히 아라야식과 관계되는 업력들을 종자라고 보통 부른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전칠식(前七識)이 행동하여 조성한 업력, 즉 종자를 능히 포장하여 보존한다는 뜻에서 능장(能藏)이라 한다.

  이러한 능장의 뜻은 중생들이 행동하여 조성하는 모든 업력을 하나도 밖으로 유실하지 않고 보존하다는 뜻이다. 이는 자업자득의 법칙에 의하여 자기가 지은 업력에 대하여 자신이 받도록 해주는 정신적인 주체가 곧 아라야식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과 전칠식이 조성한 종자와의 관계에서 능장이라고 하는데 이 때의 모든 종자는 소장(所藏)의 입장이 된다. 아시 말하면 아라야식은 능동적으로 종자를 포섭하여 유지시키는 입장이 되고 또 이 때의 종자는 수동적인 입장으로 아라야식에 의하여 포섭되어지는 입장이 되므로 소장(所藏)이라 한다. 여기에 능장과 소장의 상대적인 뜻이 있다.

   ㉯ 소장(所藏) : 소장은 위에서 말한 능장과는 달리 아라야식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종자를 포섭함을 뜻한다. 그리고 반대로 전칠식(前七識)이 조성한 선악업(善惡業)의 종자는 오히려 능동적인 입장에서 아라야식에 보존되고자 해서 포섭되므로 이들 종자를 능장(能藏)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칠식 등 모든 정신과 육체에 의하면 조성되는 업력이 자발적이고도 능동적으로 아라야식에 들어가서 스스로 보존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아라야식은 큰 창고가 화물이 들어와 쌓여도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듯이 종자를 맞이하므로 이 때의 아라야식을 소장(所藏)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능장과 소장은 서로 불가 분리한 이치에 의하여 이름한 것이다.

   ㉰ 집장(執藏) : 집장의 뜻은 아라야식이 제칠말나식(第七末那識)에 의하여 집착되어진 것에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위(전호)에서 말나식을 설명할 때, 말나식은 아라야식의 견분(見分) 등 아라야식을 집착하는 번뇌를 항상 야기한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한 뜻에서 아라야식은 항상 수동적으로 집착되어지며, 또 집착을 당하는 입장의 뜻을 집장(執藏)이라 명칭을 붙였다. 그런데 집장은 그 행위에 입각해서 능집(能執) 또는 소집(所執)이라고도 하는데 능집은 말나식이 능히 아라야식을 집착함을 말하고 소집은 반대로 아라야식이 수동적으로 집착되어지는 뜻을 따서 말한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은 수동적으로 소집의 입장에 있는 집장(執藏)의 뜻이 있다. 이 집장의 뜻은 위에서 말한 능장과 소장의 뜻도 중요하지만 아라야식이 윤회의 주체로서 범부심(凡夫心)이라는 대명사를 붙이게 하는데 결정적인 뜻을 부여하고 있다. 특히 집장의 뜻이 아라야식에 있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과상(果相)과 인상(因相)의 뜻도 범부적인 내용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집장의 뜻을 제거하는데 많은 수행과 정진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