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輪廻)와 마음

초대설법|아짠 마하 부와의 수행법문-여섯 번째 법회(2)

2007-01-23     관리자

이 글은 태국을 대표하는 위빠사나 대선사, 아짠 마하 부와가 영국을 초청방문하여(1974년 6월) 설한 법문과 질의 응답들을 수록한 수행법문집, 『The Dhamma Teaching of Acariya Maha Boowa in London』 중, 여섯 번째 법회의 질의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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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윤회(輪廻, samsara)는 앎(knowing)이라고 이해했는데, 맞는지요?
답: 수행자들 세계에서는 윤회가 앎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미혹되지 않은 마음이란 끊임이 없는 앎입니다. 그러나 지혜를 활용해 관찰하는 법을 제대로 터득하기 전까지는 각별히 유의해야 하며, 너무 쉽사리 만족해서도 안 됩니다. 훗날, 길을 잘못 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칼을 다루듯 지혜를 활용하십시오-지혜의 모든 측면들을 골고루 사용할 수 있도록. 예리한 칼날 부분은 (잘라내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에게 사용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칼등 부분을 쓰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정작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에게는 칼날을, 자신에게는 칼자루나 칼등을 사용합니다.
마음이 윤회의 주체임을 간파하기에 앞서, 지혜는 외적 현상들을 명확히 알아차려 놓아버리게 될 때까지 관찰을 지속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윤회의 주체가 마음임을 간파하게 되고, 마음에 내재된 위험성 또한 알아차리게 됩니다.

▲ 사진 자인운
마음이 윤회임을 알게 됨을 ‘역관연기(逆觀緣起, patiloma: 연기에 대한 역관)’라 이릅니다. 즉, 자신을 제대로 알기 위해 내면(內面)으로 되돌아가 관찰함으로써 모든 의혹들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외부와 내부, 양쪽 모두를 철저히 관찰해 나가야 합니다. 외적 관찰대상은 사대(四大: 물질을 구성하는 4가지 원소), 즉 지(地)·수(水)·화(火)·풍(風)으로 구성된 주변의 사물들이며, 내적 관찰대상은 자신의 마음입니다. 마음을 관찰할 때는 정작 무엇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례로, 유리잔이 떨어져 깨져버렸다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유리잔이 떨어져 깨진 것이 누군가의 과실이라고 생각한다면 분란이 일고 곤혹스러워질 것입니다. 반면, 떨어지면 깨지게 마련인 것이 유리잔 본연의 속성임을 알아차린다면 깨진 유리잔으로 인한 분란으로부터 깨끗이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을 탈바꿈하여 대상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통찰하는 것이야말로 수행의 근간임을 유념하십시오.
그리하면 마침내 상(想)을 일으켜(行, sankhara) 망상들을 엮어나가는 주체가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게 되며, 그와 동시에 마구 뻗어나가던 망상들은 즉각 소멸됩니다.

있는 그대로 보기
오늘 법문의 요지는 묻고 답하고 듣는 이들 모두에게 흥미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수행에 관한 언급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수행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수행은 올바로 보고, 완벽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성과를 안겨줍니다. 그러므로 만일 수행자들이 스승에게 보고하는 각자의 수행성과들을 서로 주고받는다면, 자신의 결점들을 보완하거나 수행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수행자들은 저마다 다른 마음과 법의 본성에 의거한 성과들을 얻게 마련이므로, 그 수행성과 또한 다양한 속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스승 또한 제자의 수행결의를 북돋우기 위해 늘 격려의 법문을 전합니다. 스승은 자신이 이미 성취한 수행성과들에 관해 훤히 알고 있으므로, 제자 또한 스승의 방식대로 꾸준히 정진한다면 동등한 성과를 획득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불교는 결코 ‘무능한 왕국’이 아니며, 청정하고 참된, 전능(全能)한 법(法)으로 모든 고(苦)에서 완전히 벗어나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붓다께서는 해탈(解脫)에 관해 완벽하게 규명하셨습니다. 열반(涅槃)은 궁극적 행복입니다. 범인(凡人)들은 열반은 공(空)이며, 공은 모든 것이 소멸된 상태라고 이해합니다. 여기 놓인 유리잔을 예로 들어 봅시다. 우리는 누군가 이 유리잔을 치워버리거나 떨어져 부서져버리면 (즉, 유리잔의 형체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유리잔이 ‘없어진’ 것으로 받아들입니다-이것이 유리잔〔現象〕에 대한 범인들의 통상적 이해방식입니다.
그러나 붓다에 의해 밝혀진 해탈의 의미로서의 ‘공(空)’은 전자(前者)와는 다른 속성의 것입니다. 후자(後者)의 공에서 기인하는 행복을 범인들은 결코 알지 못합니다. 때문에 그들은 붓다께서 항시 설하신 법〔眞理〕들이 실제로 구현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불법(佛法)을 의심하고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은 아직 청정하지 못하므로 마음의 지주가 되어주는 불법을 받아들여 이해할 수 없습니다-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최상의 먹거리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외면해버리듯.
그러나 마음과 법이 모두 청정해지면 양자는 서로 잘 어우러질 수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해탈에 관해 끊임없이 가르치셨습니다. 해탈이 실제로 구현될 수 있음을 명백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붓다와 붓다의 길을 그대로 따라 해탈에 도달한 아라한(arahant, 覺者)들이 그것을 입증합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범부(凡夫)들은 그 모든 것을 그저 의심하고 외면할 따름입니다.
열반이 최상의 궁극적 행복임을 의심했던 아라한은 일찍이 단 한 분도 없었음을 명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