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덕전등록

선전해설(禪典解說)

2007-08-04     관리자

  신선풍(新禪風)의 싹틈

  이 문답은 「전등록」과 「조당집」과는 약간 다르다. 즉 「전등록」에는 조사가 말하기를, 「그대는 심히 무생(無生)의 뜻(意)을 얻었다. 분별도 또한 뜻이 아니다」라는 부분이 「조당집」에는 전반(前半)의 문답에서 「朝曰 如是如是」의 앞에 들어가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는 어느 편이건 별로 문제는 없다.

  현각이 처음 6조를 뵈었을 때, 이름도 대지 않고 어디서 왔는가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고 더구나 가르침을 청하는 태도가 없었다는 등 상식적으로는 의문될 여지가 있다. 그런데 후세의 선종에서 일반화되고 있는 이러한 몰상식한, 사람의 의표(意表)를 붙인 언동은 6조의 제자들 시대에는 이미 있었다고 봐도 좋다. 우두(牛頭)계의 선객에는 특히 그렇게 말한 태도가 많았고, 마조가 남악의 내방(來訪)에 일고(一顧)도 하지 않았다는 태도나 남악의 마전(磨전)도 그러하다.

  현각과 6조의 초대면은, 현각이 31세 때였다. 어려서 불문에 들어가 천태학을 연구하여 지관(止觀)에 마음을 경주하고, 선에 대해서는 북종 신수에게서 배우고 동양(東陽)과 교우한 현각으로서는 31세 때이며 선(禪)에 조예가 깊었을 것이다.

  송나라 혜홍각범(慧洪覺範, 1071~1128)이 쓴 「임간록(林間錄)」에 6조를 처음 보기 이전에 이미 현각은 「유마경」에 의하여 불심종(佛心宗, 선종)의 뜻을 자득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31세라는 객기(客氣) 왕성한 현각으로서 감히 6조의 역량을 시험해 봤으리라고 짐작이 충분히 간다.

  선승들이 석장을 휘두르며 조실 스님이 앉은 주위를 3잡(三잡, 세 번 도는 것)하고 탁연히 그 앞에 서서 상견하는 풍습은, 마조하의 마곡보철(麻谷寶徹)이 같은 마조하의 장경회운(章敬懷운, 756~815)에 상견하여 위의 행작(行作)을 했고, 또 마조하인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에 알현했을 때도 위의 행작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어쨌든 이러한 비상식이라고 할 즉물적(卽物的)이고 초논리적(超論理的)인 언동은 이 때로부터 점차 많아졌고, 급기야는 그것이 중국 선종의 종풍을 형성하는 중대한 요소가 되었다.

  북종(北宗)의 배격

  서경(西京, 장안) 하택사(荷澤寺)의 신회선사는 양양(호북성 양양현) 태생이다. 속성은 고(高)씨로, 14세 때 출가하여 사미가 되었다. 그때의 수업사(受業師)를 「송고승전(宋高僧傳)」에 국창사의 현원법사(顯元法師)로 전하고 있으나 상세한 것은 잘 모른다. 또 출가한 후 얼마 안 되어 6조의 문을 두드렸다는 인상을 받으나 실제는 34세 때로 보고 있다. 출가하여 6조 문하에 들어가기 까지 20년간의 수행에 대해서도 신수(神秀)에 입참(入參)한 3년을 제하고는 그 다음 일은 전혀 모른다. 신회가 신수 문하에 있던 시기는 698~701년의 3년간이고 701년(大足元年) 후는 6조 문하에 있었으리라고 본다.

  초대면 때, 6조가 일문을 던졌다. 『선지식이여, 멀리서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겠군. 그런데 불법의 근본의를 회득(會得)하고 왔는가. 만약 회득하고 있다면 당연히 자기 심성은 철견하고 있을 테지. 그것을 말해 보라. 내가 점검하리라.』

  『무아(無我) 인연소생의 제법에는 조금이라도 편견 망집을 품지 않은 무주(無住)라는 것이 근본의와 심득(心得)입니다. 따라서 자기 심성도 철견하고 있습니다.』

  신회가 이렇게 대답하자 6조는 갑자기 큰 소리내며, 「이 쥐새끼 같은 놈,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그렇게 잘 지껄이느냐」라고 일갈(一喝)하고 죽장으로 신회를 몹시 쳤다. 신회는 아픔을 참고 생각했다.

  6조는 신회를 처음에 대선지식이라고 부르며, 대선지식은 경솔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는 6조가 신회를 존경하여 한 말이었는데, 신회는 자신이 선지식인 척 하고 혀를 놀린 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닫고 「모처럼 6조를 만나게 되었으니 필사적으로 수행하겠다. 무엇때문에 신명(身命)을 아낄 것인가, 천재일우(千載一遇)인데...」하고 생각했다.

  이로부터 신회는 6조에 시종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6조가 일산(一山)의 수행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에게 영묘(靈妙)한 일물이 있다. 형(形)도 없으려니와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대들은 철견하고 있는가?』

  그때 신회가 나와서 대답했다.

  『그것은 제불의 본성이고 신회의 불성입니다.』

  『잘 말했다. 나는 그대에게 이렇게 말하리라. 원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대의 본원(本源) 불성이라고...』

  신회는 예배하고 물러갔다.

  신회가 6조에게 시종하고 있던 기간은 약 3년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장안(長安) 4년(704) 경에 북유(北遊, 북종 신수를 찾음) 길에 올라 서경에서 수구하고, 경용 3년(709) 경에 다시 조계에 돌아왔다. 신회가 6조의 밀전(密傳)을 받은 것은 6조의 입적(713) 때이다.

  6조가 입적한 후 신회의 소식이 불명했다. 남양의 용흥사(龍興寺)에 칙주(勅住, 왕의 명으로 머뭄)한 것은 개원 8년(720), 다음 하택사에 갔는데 이 연차(年次)도 모른다. 신회가 활대(滑台)의 대운사에서 북종의 배격을 행한 것은 개원 22년(734, 호適은 개원20년설을 주장하고 있다) 낙양에 들어가 다시 남북 양종을 논하고, 북종의 배격을 재판한 것이 천보 4년(745)이다.

  신회가 북종을 배격한 까닭은, 6조 혜능이 정통임에도 불구하고 신수가 6조이니 그의 제자가 7조이니 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웠고 신수는 견성도 못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격의 표면적 이유

  신회의 북종 논란과 배격은 신수와 그 일문(一門)의 선이 사승시방(師承是傍)이고 법문시점(法門是漸)인 점이 중심되고 있다.

  「사승시방」이란 5조 홍인의 소위 동산(東山) 법문의 정통을 이은 제6조는 혜능이고 신수는 어디까지나 방류(傍流, 정통이 아닌 방출)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음의 「법문시점」이란, 신수와 그 일파의 점수점오(漸修漸悟)의 선이 돈오(頓悟)를 종지로 하는 달마정전인 선의 정맥으로서는 절대로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회의 이 주장은 무리가 있다.

  가령 법문시점(法門是漸)이라는 논란은 전면적으로 무리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달마선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함생(含生, 중생)의 진성(眞性, 本具佛性)을 믿고 곧 벽관(璧觀)에 응주(凝住)함으로써 그 진성과 명합(冥合)하고 계당하려는 돈오선인데, 4조 도신(道信)에 이르러 돈오를 제일의로 하면서도 일면에는 둔근열기(鈍根劣機, 무능력자)에의 방편으로써 점오(漸悟)에 큰 비중이 놓여지게 되어왔다. 그래서 이러한 경향은 5조 홍인에게도 계승되었다.

  따라서 신수의 점오선에 이어지는데, 순수한 돈오견성을 주장한 6조의 선은 말하자면 4조 이래의 「돈(頓) · 점(漸)」 양면을 합친 선에의 비판이고 돈오여래야말로 달마선 본래의 종지라고 하는 종풍 회복의 활동이기도 했다. 신회는 이 입장을 신봉하고 계승했던 것이다. 따라서 신회의 「법문시점」이라는 북종에 대한 논란은, 달마선을 본래의 여래선에 돌리려는 애종(愛宗)이라 할까, 일종의 호법의 일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이고 일면적인 해석이다. 신수는 확실히 「불진간정(拂塵看淨)」이라는 점수점오(漸修漸悟)의 입장을 표방하고는 있으나, 그는 사상 및 종지로서의 돈오를 버렸다는 것은 아니고, 「동산(東山)의 법문이 모두 수(秀)에 있다」고까지 칭찬받던 신수다. 5조가 견지(堅持)하고 있던 돈오의 입장은 신수에도 엄연히 상속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신수가 점수점오의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이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4조 도신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법의 비요(秘要)는 그 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못한다. 이 법을 아껴서 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단 전인(前人, 先人)을 믿지 않고 그 방법(謗法, 불법을 비방하는 것)의 죄에 떨어질 두려움이 있을 뿐, 반드시 사람을 택하라. 문득 홀연히 설하지 말고, 신중히 신중히....』

  신회문하의 5세인 종밀(宗密)도 돈점은 법에 없고 기(機, 학인)에 있다고 했다. 즉 돈오의 본증묘수(本證妙修)가 종지의 극요(極要)라 해도 수도(修道)의 현실 문제에 있어서는 속세적 점수점오를 무시할 뿐인가, 둔근열기에 대하여서는 돈오선이야말로 도리어 도(道)를 그르칠 위험이 많다고 하여 신수가 점오에 치우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4도로부터 신수에 이은 점오 중시의 경향에는 노장(老莊)사상을 체질적으로 가진 중국인 일반에 친근하기 쉬웠다는 사정도 그 배경의 하나일지 모른다. 어쨌든 신수의 점오선은 4조, 5조에도 내포되었던 것이고, 여래선이라고 하는 달마선 본래의 입장을 비판할 여지가 없다 해도 신회와 같이 보리(菩提)를 방해하는 비법문(非法門)이라는 논란(전면적 부정)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더우기 신회는 잠시나마 신수문하에서 지도받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논란을 퍼부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배격의 진인(眞因)

  북종의 사승(師承)을 곁(傍, 정통이 아닌)이라고 한 논란은, 신수와 그 일문이 5조하의 정통을 자칭한 때 비로소 타당성을 가진다. 그런데 신수와 그 일분에는 그러한 사실이 없다.

  신수에 6조를 자칭하고 혜능을 경시한 행적은 전혀 없다. 도리어 신수는 「불법은 소주(韶州, 혜능)에 있다」고 혜능을 추존하고 있다. 또 신수의 제자 보적이 7조를 자칭한 것도 신회는 이 점을 가장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달마로부터 바른 상승의 과정을 거친 제 7엽(葉), 7대(代)라는 뜻으로서 자파(自派)만을 존귀한 정통 7조라는 뜻은 아니다. 당시 양경을 중심으로 한 화북 일원에 있어서 신수 · 보적 · 의복 등의 명성은 대단한 것이었으므로 보적 등의 따르는 일부나 일반 간에 신수로 하여금 5조의 정통으로 보는 풍조가 있었으리라는 것은 용이하게 상상된다.

  그러나 신수 · 보적 등에 정통을 과시한 사실은 없고, 다만 적적(的的) 상승의 법손임을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실은 보적은 적적상승의 7대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 이러한 예가 없는 것도 아니다.

  가령 6조의 제자 정침(淨침, 675~746, 전등록에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의 신탑명(身塔銘)에 이 사람을 7조라고 써 있다. 정통7조의 뜻이 아님은 물론이다. 요는 보적의 7조, 그리고 신수일문의 사승(師承)문제는 신회가 특히 논란하지 않으면 안 될 성질의 것도 아니다. 법문시점(法門是漸)의 문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더우기 신회는 만사의 초탈을 지(旨)로 하는 선객이고 신수에 입찰도 했고 보적 등과는 동문이었던 사람이다. 따라서 신수와 그 일문을 논란하고 배격하지 않으면 안 될 필연성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선에 있어서는 사정(私情)을 두지 않는 특성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요는 신회가 위와 같은 입장을 취한 동기(원인)는 불법상 문제가 아니고 왕실의 귀숭(歸崇)을 받아, 화북에서 융성한 교세를 가진 신수의 일문에 질투심을 품고 선사 혜능을 정통 6조로서 권위를 가지게 함으로써 신회 자신도 권위있는 정통 7조가 되게 하려는 야심이 아닌가 생각도 있다.

  신회는 혜능의 입적 후, 710년대에 북방에 활동의 본거를 두고 중앙의 신흥관료군(新興官僚群)과의 접촉을 활발히 하고 있었다. 720년 (개원 8년) 남양 용흥사에 칙주(勅住)한 것이 그 하나라 할 것이다. 신회는 혜능 일문의 유연(有緣)의 지인 남방보다 정치 문화의 중심인 북방에서 정치 권력과 결탁하여, 신수의 일문 배격과 자기의 야심을 수행하려고 했던 것이다. 신회는 천보 12년(753) 어사(御史, 백관의 죄를 다스리는 관리) 노혁(盧혁)의 무주(誣奏)로 죄를 입었다. 종밀(宗密)은 이를 북종의 술책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신회의 강력한 북종 배척의 공작이 도리어 보적 등의 신도인 관료들을 도발(桃發)한 것이 아닐까 한다.

  결국 신회의 공작은 공을 주(奏)하여 그의 입적 후 35년 만인 정원 12년(796)  덕종 때에, 선종에서는 남종이 정통이고 북종이 방류(傍流)로 신회가 정통 제 7조임이 공인되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이런 데서 나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