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의 현장] 경남 김해군 무척산 백운암

곳곳에 불심이 숨쉬는 가양의 땅, 백운암 그 불사 원만하리라

2007-08-03     권현주

남녘 사람의 훈훈한 인심(人心)은 불심(佛心)이런가. 노란 봄기운은 더욱 빛을 발하고 도처에 고도(古都)의 체취는 가득하니 가히 김해(金海)는 우리와 함께하는 따사로운 마음의 고향이라.

중심으로 부족국가가 발달하여 여섯 가야(伽倻)를 형성하였고 금관가야(金官伽倻)는 주체 세력이 되어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았다. 김해는 가락국의 왕도였으며 가야인의 호흡이 살아 숨쉬었던 곳이다. 확트인 남쪽 푸른 바다는 일찍이 문호가 되었고 더욱 가야인들의 문화의 꽃을 피우게 하였다. 불사의 현장은 그곳에 있었다.
가락불교를 크게 일으킨 장유화상(長遊和尙)이 창건하여 불법을 펼쳤던 백운암(白雲庵)은 세월을 안고, 불은(佛恩)을 안고 2,000여년을 나무와 바람을 벗하며 있었다.

백운암을 찾아가는 길은 그리 쉽지마는 않았다. 마을에서부터 몇해전 불사를 해놓은 도로를 따라 얼마간 올라가면 그 다음부터는 도보로 산자락을 올라타야 한다. 저 높이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가람. 그곳에서도 불사가 한창이라니 일견 놀라움과 감탄이 먼저 앞선다. 무척산 칠백여 미터 산등성이. 낙동강 줄기가 바로 훤히 눈앞에 있고 그 산세가 수승하니 과연 기도도량으로 이름이 있는 그 이유를 알것만 같다.

‘이곳 도량은 가락불교를 크게 일으킨 장유화상이 산자수명한 이곳에 백운암을 창건하고 수로왕을 도와 국사로서 정사를 돌보며 불교 홍포에 적극 힘썼던 것이니 이것이 가락불교의 중흥이 있게 된 것입니다. ․․․‘라고 씌여진 안내판을 뒤로 하고 경내에 이르니 저녁공양 준비로 불을 지피는 나무내음이 더욱 고찰의 향취를 짙게 하였다.
전기시설도 없는 깊은 두메 산골짜기 암자. 며칠후 다가올 부처님오신 날을 기하여 전기불사를 이뤄 부처님 전을 환히 밝혀 그 빛 더욱 빛나게 하리라는 소박한 원을 주지 지문(至門)스님은 갖고 계시다.

아직까지 전기시설이 닿지 아니한 곳도 있었구나하는 놀라움은 잠시, 오후 해가 지고 아쉬운 대로 3~4시간은 원동기로 부처님 전에 불을 밝히고 있으나 원동기는 휘발유를 사용하는 위험스러움이 있고, 비용도 적잖아서 전기 불사를 서둘러야 한다고 하시는 스님 말씀에 더욱 가슴 한켠이 뭉클하였다. 극락전, 산신각, 요사채 몇 채로 이루어진 가람. “전기, 전화불사는 한전에 서류 절차를 끝내 놓은 상태라 초파일 전에 무리없이 마무리 지을 수 있습니다. 단청불사도 하고, 힘 닿는대로 연차적으로 도로를 확장하고 산턱 아래 부분에 주차장을 만들어 놓으려 합니다. 또한 불사를 하려면 이곳은 높은 지대라 자재운송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자재운송을 전용으로 하는 케이블카를 놓았으면 합니다.“

스님의 불사는 소박하시다. 웅장하고, 거대한 큰 규모의 불사는 아니지만 작은 불사 하나하나에도 큰 불사 못지 아니한 세밀한 계획과 커다란 정성이 깃들어 있었으니 그것은 가야의 후손으로서, 지극한 불심이 아니었는지. 장유화상이 100일 기도후에 이루어진 불법도량 백운암이 지금의 모습을 지니게 된 것도 불과 30여년전의 일이었다 한다. 극락전이 있고, 법당 위에 산신각이 있었던 것이 화재로 인하여 산신각이 아래로 옮겨져 극락전과 나란히 하게 되었고 요사채가 스님 정진터로 몇 채 지어졌던 것이다. 그 때 불사 역시 산중이라 헬기로 자재를 운송하여 가람을 장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극락전 양옆을 사무실과 방사로 쓰고 있는 실정이고 단청도 되어 있지 아니한 상태에서, 좁은 가람터이지만 법당을 더욱 넓혀 많은 수의신도들이 정진할 수 있는 공간을, 수천년의 가람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단청불사를 이루는 것도 꼭 해놓으실 불사라 덧붙여 주지 스님은 말씀하신다. 경내 왼편에는 자연 동굴이 있었다. 백운암 도량이 좋다는 장유화상의 이야기를 듣고 이곳에서 100일기도를 한 김수로왕이 신선과 함께 바둑을 두었던 장소라 한다. 장유화상과 김수로왕의 수행정진하는 불심의 한마음은 만대만대 부처님의 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염원이었을 것이다.

직접 인도불교가 전래된 가야땅.
한국최초 불교도래지로 역사적, 문화적 재평가가 되어야 한다는 가야불교, 김해땅. 쇠잔해져 가는 역사를 안고 있었던 가야 후손들은 불법의 가르침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곳곳에 가람이 있고, 처처에 불법에 대한 깊은 믿음이 오늘날까지 함께하고 있으니 말이다. 힘겹게 산자락을 올라야 하는 백운암 길목의 이름없는 풀잎 하나, 나뒹구는 돌멩이 하나에도 불심이 있었다. 시골 아낙네의 꾸밈없는 소박함으로 한아름 성글성글한 불심의 눈빛이 도량 가득하니 자애로운 부처님 품속 그대로였다. 백운암은 깊은 산속 놓여야 할 곳 바로 그곳에 자리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부처님 전을 훤히 밝히는 전기불사, 하루 생활권으로 참배할 수 있는 도량으로 하겠다는 길불사의 작은 염원은 더욱 값진 불사의 염원이 아니겠는가.

계신 곳 가야땅 이 두메산골 작은 암자에도 한결같은 불심이 있었고, 부처님이 계셨다. 부처님이 계신 곳이기에 불사가 이루어지고, 부처님이 계신 곳이기에 기쁨이 있었다. 분명 따사로웠던 남녘의 봄바람만큼이나 부처님의 자비하신 손길이 닿지 아니한 곳 없기에 일념된 불사 원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