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족을 찾아서

부처님오신날 특집/카투만두 기행

2007-08-03     관리자

“나마스테” 
네팔왕국의 수도 카투만두 외곽에 자리한 트리뷰반 국제공항에 도착하면서부터 헤아릴 수 없이 듣게 되는 간단한 인사말이다. 아침에 사람을 만나면서부터 저녁 잠자리에 들때까지 두루 쓰이는 이 인사말은 또한 그 모습도 우리의 합장과 별 차이가 없다. 두 손을 편 채 가슴에 모으고 약간 윗몸을 수그리며 ‘나마스테’라고 말하기만 하면 상대방이 힌두교도이든 불교도이든 누구나 또한 ‘나마스테’라고 말하며 응대를 하여준다. 처음에 이 인사말만을 자주 듣게 되는 외국인들은 ‘이 나라는 이렇게도 언어의 어휘력이부족한가‘하고 느끼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이 ‘나마스테’라는 말의 속뜻을 알게 되면 그러한 느낌은 사라지게 된다.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히말라야 산 속에 웅크린 채 현대문명의 혜택도 누리지 못하고 있는 네팔이라는 나라를 정신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사랑하게도 된다.

“당신 속에 깃들어 있는 신성(神性)이 꽃피기를 기원합니다.“
이것이 ‘나마스테’라는 간단한 인사말 속에 스며 있는 속깊은 의미이다. 이 인사말은 굿모닝, 굿애프터눈, 굳 나잇 같은 영어권 국가의 인사말보다는 훨씬 차원이 높은 말이며 우리 불교도들끼리 주고 받는 성불하십시오’라는 인사말과 같은 의미로 파악될 수 있다. 그렇다. 네팔은 역시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나실 만한 거룩한 땅이다. 

네팔은 설산(설산)의 왕국이다.  북쪽으로는 세계의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를 주봉으로 마나슬루,안나푸르나, 로체, 초유, 눕체등의 설봉들이 중국과의 국경선을 이루며 하늘이 낮은 듯 구름을 뚫고 내어 달렸고 그 히말라야 산맥이 남쪽을 향하여 가쁜 숨을 쉬어 가듯 빚어 놓은 것이 중앙지역의 분지이다. 이 분지가 인도와의 국경쪽으로 다시 한번 안간힘 쓰며 솟아 올랐기 때문인가, 네팔은 첩첩산중에 둘러싸인 채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왕국으로 버텨오고 있다.

그러나 이 중앙지역의 분지라는 곳도 흰 눈만 없을 뿐 산이 험하고 거칠기는 마찬가지이며 그 분지 중에도 그래도 가장 평탄하고 살 만한 지역이 현재 네팔의 수도인 카투만두가 자리잡고 있는 카투만두 밸리이다. 카투만두 시는 해발 1300m의 고지대에 위치하였는데 그 역사를 추정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된 도시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 동산의 유적이 2500년 동안 남아 있듯이 카투만두 시도 그만한 역사를 간직해 오고 있다. 어느 골목길에 들어가도 우리는 아득한 세월을 그 자리에 선 채 사람들의 예배와 공양을 받아온 무수한 부처님들과 힌두의 신들과 여러 신전들에 맞부딪치게 된다. 따로 관광지가 필요치 않을 만큼 세월의 이기가 깊숙이 배인 유물들이 큰 길 옆에도 서 있고 작은 골목 안쪽에도 널려 있다.

그리고 그 유물들이 지나간 역사의 유물로서 그 자리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네팔 사람들의 삶 한복판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박물관이 필요없는 도시, 그곳이 바로 카투만두이다.  이처럼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나신 나라의 서울이며 뿌리깊은 이 도시에 불교유산이 없을 수 없다.
석가모니라는 의미를 찾아보면 석가모니 석가(SHAKYA)족에서 나왔고 모니(Muni)는 성인이라는 뜻이다. 곧 석가족의 큰 성인이란 뜻의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셨을 때에 석가족은 카필라라는 조그만 왕국을 세우고 있었다. 카필라 성의 유적은 현재 네팔 영토의 동쪽, 인도와의 국경지대인 간바리아에 남아 있으며 룸비니 동산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이 카필라 왕국은 석가모니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전에 코살라라는 강대국에 의하여 철저하게 멸망당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이 정복전쟁을 막지 못하였으며 그의 모국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을 몸소 겪으셨다.  그럼 그 전쟁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석가족은 하나도 없었을까?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하여 출가수행하고 있던 석가족 출신의 비구, 비구니를 제외하곤 카필라 왕국에서 다른 곳으로 피신한 석가족의 후예는 없었을까 ?

카투만두 시내의 한국인 집에서 우연히 만만 혜종 스님에게서 파탄지역에 석가족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반가운 마음에 무작정 석가족을 찾아 나섰다. 파탄왕궁의 광장 근처에서 만난 두 꼬마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찾아간 곳은 불상을 제작하는 공방이었다. 여기에서 그 공방의 주인인 챠크라 샤카(CHAKRA․R․SHAKYA)씨와 그와 같은 종족의 친구들을 만났다. 석가족은 카투만두의 파탄지역에 집중적으로 모여 살고 있는데 그 숫자는 10만 명쯤 된다. 네팔의 총 인구가 1800만 명이므로 극히 적은 종족이지만 모두가 불교신자이며 전통적인 직업은 불상제작이다. 챠크라씨도 공방을 운영하며 3명의 기술자를 두고 있는데 그들도 또한 모두가 석가족이다.

그들의 전설에 의하면 카필라왕국이 강대국인 코살라에 의하여 정복당하자 살아남은 석가족들은 히말라야 산 속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히말라야의 높은 뫼뿌리는 그들에게 편안한 피신처를 제공해 주지 못하였다. 전에 살던 카필라 왕국에 비하여 너무나 거칠고 억센 풍토는 고향을 잃은 석가족들에게 끊임없는 이동을 요구하였고 그들도 좀 더 나은 지역을 찾아 히말라야의 심장부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 당시 이 카투만두밸리에는 파탄지역이 가장 번성한 지역이었으므로 그들도 이곳에 정착하여 대대로 그 종족을 유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설은 역사적 사실로 증명되지는 못하였고 이에 관한 관계문헌도 찾기가 힘들다. 다만 이들이 모두 불교신자이며 지금도 불상제작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석가족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인정 될 뿐이다.  석가족의 전통적 가옥구조는 너무나 종교적이다. 아니 종교적이라는 말 보다는 일상생활 자체가 수행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문설주위에 불상들이 그려진 쪽문을 통하여 네모진 조그만 마당에 들어 서면 그 가운데에 부처님을 모신 돌탑이 세워져 있고 석가족 각 가정의 문들이 마당을 향하여 나있음을 보게 된다. 각 가정의 대문 문틀 위쪽과 양쪽 옆에도 부처님과 또는 불교와 연관된 그림들을 그려 놓아서 누가 보아도 그 집이 불교신자의 집임을 알게 하여 준다. 이러한 전통은 특히 석가족에게 있어서 지금도 매우 중요시되며 새로이 짓는 집에도 어김없이 이 전통을 적용하고 있다. 곧 이들은 집안에서 나오거나 들어갈때 마당에 세워진 불탑이나 문설주 위의 부처님을 경배하게 되어 있어 그들의 합장이 한번쯤은 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게 되는 것이다.

네팔은 공식적으로는  힌두국가이지만 불교의 영향이 모든 문화에 스며 있는 나라이다. 석가모니부처님보다 200년 후에 태어나 전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 대왕의 불탑이 석가족이 사는 파탄지역에 네 개나 고스란히 남아 있고 그 불탑들이 지금도 불교도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가꿔지고 참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만 보아도 그렇다. 역사와 문화를 잃지 않고 꾸준히 지켜가며 일상생활을 수행처럼 살아가는 나라, 그곳 바로 석가족이 살아가는 네팔이라는 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