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시대 부처님

부처님 그늘에 살며 생각하며/ 불모(佛母) 청원스님

2007-07-31     관리자
 

“스님. 정말 장관입니다. 구한 손 한번 만져봅시다.

 공평아트홀 1층 전시장(10월 1일 ~ 10월 7일)을 돌아보던 한 노보살님은 갑자기 스님의 손을 덥썩 잡고는 눈물까지 글썽거린다. 노보살님의 표현을 빌지 않더라도 청원(靑苑 43세) 스님이 이번 첫 개인전은 그 규모면에서도 입이 떡 벌어지게 한다. 우선 작품의 크기에 놀라고(좌불상의 경우도 대개 보통 사람 키의 두배 가량됨), 또 그 섬세함과 화려함과 실감나는 표현에 감탄하게 된다. 기존의 여느 사찰이나 전시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불보살님들의 모습들이다. 그런가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형상화한 현대적인 작품들도 있다.

 청원 스님은 우리 시대에 흔치 않는 불모(佛母-부처님의 상을 조성하는 스님들을 부르는 말)다. 탱화를 그리는 스님들은 몇 분계시지만 조각으로 불보살상을 조성하시는 분은 유일하다시피 한 것이다. 삼국시대와 신라, 고려까지만 하더라도 불상조성은 주로 스님들이 해오던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 때인가부터 이 일은 세인들의 손에 넘겨졌다.

 그리고 그 동안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답습 정도가 아닌가 하는 데 많은 사람은 동감을 표한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을 제대로 지켜오는 것도 아니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세상과 유리되어 대중화되지 못한 느낌이며 구태를 벗지 못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변하고 있는데 유독 불교문화만 정체되어 있습니다. 불상을 조성하는 데 있어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과 변화시킬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32상 80종호를 근간으로 하는 부처님의 모습은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서 부처님이 입고 계신 가사는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지요. 최소한 불보살님을 조성하는 사람은 불교를 제대로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 부처님에 대한 믿음, 신앙이 바탕되어야 합니다. 외형만 다듬다 보면 작품에 느낌이 없고 힘을 느낄 수가 없어요.”

 스님은 그 동안은 밋밋하게 처리되어 왔던 부처님의 가사를 실감나게 처리하고 있다. 부처님이 정말 가사를 입고 계신 것처럼 한 올 한 올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그 위에 섬세하게 문양도 그려 넣었다. 조성된 부처님께 실지로 옷감을 염색해 입히고 그 위에 옻칠을 하고 개금과 어울리는 화려한 문양을 섬세하게 그려넣은 것이다.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로 그 질감이 감각적이며, 입체적이다. 개금만 한 부천님에 비한다면 훨씬 장엄스러워 보일 뿐만 아니라 금색과 법당의 단청과도 잘 어울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환희심을 더해주고 있다.

 ‘지금 이 시대 부처님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가.’

 스님이 이상적인 모텔로 삼는 부처님은 경주의 석굴암 부처님니다. 그래서인지 스님이 조성한 부처님 상은 그 모습이 훤칠하면서도 당당하다.

 그리고 ‘심오한 불교사장적인 것들을 조형물로 조성해내는 일들이 가능한 것인가. 탑이니 부도인 석등, 불상 등 기능을 위주로 한 불교조형물뿐만 아니라 이러한 기능을 뺀 감상물로서 편안하게 바라보면서도 불교를 느낄 수 있는 매개체는 어떻게 조형되어야 하는가.’

 이번 작품전시회는 바로 이러한 스님의 뜻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달마가 전한 뜻은’ ‘만다라’ ‘바루’ ‘업경대’ 는 기능적인 불교조각품이 아니라는 감상물로서 불교사상을 전하기 위해 조형물로 만들어 본 것이다.

 달마가 전한 뜻은 5년간 스님의 화두가 되였고, 거울을 도입, 기하학적인 배치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만든 업경대 앞에 서면 자신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일 뿐만 아니라 중중무진의 세계가 그 안에 펼쳐지는 듯한 착각도 일게 하는 파격적인 작품이다.

 “달마가 왔다간 흔적이라도 표현해보려고 했습니다만 쉽지 않았습니다. 불교조각은 조형미를 통해 불교사상과 경전의 내용을 시각적으로 보다 쉽게 이해하고 이를 통해 법열의 환희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날처럼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세상이 되고 있는 세태 속에서는 불교조각의 강렬한 상징성과 조형미를 불교사상의 응축된 표현으로 표출해낸다는 것은 일반대중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불교의 현대화 ․ 대중화를 위해서도 도상의 재해석과 더불어 이에 대한 대중적인 공감대를 획득해야 하는 것이지요.”

 1600년 이상 이미 정형화되다시피한 불상의 모습을 어떠한 모습으로 변형시킬 것인가. 전통 불교미술을 현대미술과 접목, 융화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스님은 매일매일 좌절하면서도 결정코 풀어나가야 할 당신의 화두로 이 과제들을 침구해가고 있는 것이다.

 스님이 출가를 결심하게 된 것도 어찌보면 불교조각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였다. 열세 살 나이에 당시 국가정책으로 마련된 면단위의 가내공업센터에서 목공예를 시작한 스님은 올해로 30년째 불교조각을 해왔다. 깊은 인연이랄까. 한번은 지리산 칠불사의 법당불사 제의가 들어왔다. 그것이 약혼하기 하루 전날이었다. 스님은 그 일이 하고 싶어 결혼을 5년 후로 미루고 친구와 칠불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칠불사에서 불사를 하면서 출가를 해야겠다는 발심을 했다.

 ‘불교조각은 불교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이일은 그저 대강 겉껍데기만을 해서 되는 일은 아니리라.’

 그래서 스님은 칠불사 통광 스님께 이러한 뜻을 내보이며 출가하길 원했다. 그러나 스님은 선뜻 제자로 받아들여주시지 않으셨다. 스님의 제자가 되는 데 3년이 거렸다. 그것이 1981년이었다. 그리고 스님은 그 후 대입 검정고시로 동국대학교 미술과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하고 지난 92년에 졸업, 현재는 동 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결혼을 하지 않고 출가를 한 것은 참으로 잘한 결정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결혼하기로 했던 사람에게는 두고두고 미안한 일이 되었지만 만약 결혼을 하고 생활에 묶였으면 아마 이 일은 어려웠을 것이다.

 ‘왜 신라시대만한 불교예술품들이 나오지 않는가. 그만한 작품이 나오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신문화 또한 그만큼 대중화되어 있어야 하고, 성장해 있어야 한다.’

 청원 스님의 앞으로의 꿈은 전문성을 가진 불교미술대학을 설립, 불교문화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불교미술을 전문적으로 하는 젊은이가 맣지 않고, 또 이 일은 젊었을 때부터 습득해 꾸준히 해나가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법인체를 구성해서 불교미술문화인들을 양성해가는 것도 또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현재 부산과 인접한 김해비행장과 파출소 앞에 천막이나 500평 구모의 작업장(금강불교조각연구소,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2동 1858번지, 전화051-972-3912)이 있고, 함께 작업을 하는 사람들도 8개 부서에 40여 명에 이른다. 앞으로는 100평 규모의 상설전시장도 갖출 계획이다. 그 곳에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이 시대 정서에 맞는 불교문화를 꽃피워 갈 것이다.

 신라시대 불교문화를 능가하는 문화창출을 꿈꾸며 50세까지는 앞만 보고 묵묵히 나아가리라. 그리고 그 이후로는 이를 전수하고 교육하는 일에 한생을 바치리라 발원하고 또 발원하는 우리 시대 흔치 않는 불모(佛母). 청원스님!

 불교미술이 침체와 답습의 늪에서 해어나와 새로운 향기를 내뿜으며 꽃피우기 위해서는 스님 한사람의 힘만으로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스님의 힘차고 크나큰 원력은 분명 이 시대 불교미술을 꽃피우는 커다란 물줄기가 되리라 그렇게 믿는다.


 청원(靑苑)스님)43세. 지정문화재 조각기는 제713호) 올해 30년째 조각을 해온 스님은 1981년 지리산 칠불사 통광 스님을 은사로 득도, 불교공부와 더불어 불교미수의 활성화와 현대화를 위해 정진 중이며, 스님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불교조각을 전문적으로 하고 계시다. 1985년 부산에 ‘금강불교조각연구소’를 설립, 제주도 약천사, 문경 봉암사와 안동 용수사, 서울 능인선원의 법당장엄 등 전국의 200여 군데 크고 작은사암의 불사를 수행했으며, 만학으로 동국대학교 예술대학 불교미술학과를 졸업, 현재 동 대학원에서 재학 중이며, 불교미술대학건립의 꿈을 가지고 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