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에서 맑음의 혁명이 일어날 때

선가귀감 강설 19

2007-07-29     관리자


지난 호에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읽었으니, 신비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도량을 깨끗이 하고 부처님과 호법신들을 청하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사방찬(四方讚 : 사방을 찬탄하는 노래)
일쇄동방결도량(一灑東方潔道場) 첫 번째 물을 뿌려 동쪽도량을 청결하게 합니다.
이쇄남방득청량(二灑南方得淸凉) 두 번째 물을 뿌려 남쪽을 청량하게 합니다.
삼쇄서방구정토(三灑西方俱淨土) 세 번째 물을 뿌려 서쪽을 정토가 되게 합니다.
사쇄북방영안강(四灑北方永安康) 네 번째 물을 뿌려 북쪽을 영원히 평안하게 합니다.  

여기서는 동서남북 사방에 물을 뿌리며 청결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내용으로 보아 원래는 물을 뿌리며 이 구절을 외웠던 것 같습니다. 마음으로 도량을 청결하게 씻는다는 생각을 내고, 마음의 조그마한 티끌이라도 씻어버리고 탐진치 3독과 분별망상을 버리면 곧 도량이 깨끗해집니다.
원각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마음이 청정한 고로 국토가 청정하고 국토가 청정한 고로 세계가 청정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맑게 정화하면 도량은 저절로 청정하게 됩니다. 외형적인 도량은 깨끗하나 마음이 더러우면 불보살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인간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을 맑히는 일입니다. 내면에서 맑기 위한 혁명이 일어날 때 모든 것이 맑아지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그러한 청정국토에 임하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도량찬(道場讚 : 도량을 찬탄하는 노래)
도량청정무하예(道場淸淨無瑕穢) 도량이 청정하여 티끌은 하나도 없사오니
삼보천룡강차지(三寶天龍降此地) 삼보와 천룡은 이 땅에 내려오소서.
아금지송묘진언(我今持誦妙眞言) 제가 이제 묘진언을 가지고 외우겠사오니
원사자비밀가호(願賜慈悲密加護) 원컨대 자비로서 비밀가호를 주소서.

유마경에, “마음이 곧 도량이다.” 하였습니다. “진리는 적멸(고요)한 모습이요, 모양이 없고 정한 바가 없다. 진리는 말이 없다.”라고도 하였습니다. 진실은 일체의 관념을 떠난 것입니다. 진실은 허공과 같이 비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을 찾는 사람이 진실한 어떤 것을 찾거나 기타 어떤 식으로든 진실 그 자체의 모양을 구하는 것이 있으면 진리와는 더욱 멀어질 뿐입니다.
일체의 관념이나 갖가지 모양을 떠난 것, 허공과 같이 비어있는 것, 그것을 청정이라고 합니다. 허공에 아무 것도 세울 수 없는 것처럼 진리 그 자체는 아무런 표현으로도 설명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진실을 찾는 사람은 오히려 모든 생각을 정지하고 구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자연처럼 물처럼 무심으로 흘러갈 때 대우주의 진실을 체득하게 됩니다.
자연처럼 물처럼 무심으로 흘러가라는 것은 세상을 망상과 분별이 없는 마음으로 흘러가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옳다고 하고 무엇을 그르다고 하겠습니까. 진리에는 본래 옳고 그르고, 길고 짧고, 넓고 좁고, 높고 낮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다 마음의 헤아림이요, 스스로 아는 지식을 의존해 이런 저런 분별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분명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분명한 어떤 것이 마음에 남아있으면 있을수록 진리와는 등져있는 것입니다.

비어있어야 아름다운 삶이 창조된다
어떤 사람이 오랜 시간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많은 공부를 했기 때문에 남보다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옆의 사람이 말하길 “당신은 많은 수련을 해왔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라고 단 한마디로 인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수행자는 얼굴을 붉히며 말하길 “수행을 해 보지도 않은 그대가 나를 평가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대가 수행자의 세계에 대하여 무엇을 안다고 그런 평가를 하느냐?” 하며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었습니다.
수행자의 길은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이고 진리와 같이 자신이 무아임을 체득해 나가는 것인데, 작은 말 한 마디에 아상(我相)을 내세워 화를 내고 마음에 파장을 일으킨 것입니다.
사람이 많이 안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의 소견에 자신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옳고 그른지보다는 그 일에 종사해 왔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권위를 내세우려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집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괴로움과 불화의 씨앗은 커지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음의 환영(幻影)입니다. 오랫동안 길들여오고 교육되고 알아오던 관습입니다. 그것은 나만의 세계에 깊이 빠져 있는 것이며 진리와는 멀어진 것입니다.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자기가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지, 결코 진리는 아닙니다. 진리는 가만히 있습니다. 모든 평가와 헤아림을 정지할 때 거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을 찾기 위하여 앞으로 아무리 나아간들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합니다. 다만 마음의 갈등을 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바깥으로 끝없이 추구하던 온갖 행복과 아름다움과 진리의 방황에서 돌아와 텅빈 내 뜰에 서있을 때, 그때에 틀림없이 진리의 정점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진리는 고요하나 고정되어 정지된 것은 아닙니다. 비어있으면서 모든 창조의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삼라만상은 비어있는 곳에서 창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비어있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빈 곳이 있어야 집을 짓듯이 우주도 비어있는 곳에서 시작하였습니다. 대자연도 비어있는 곳에서 갖가지 모양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마음도 비어있어야 자유의지대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어떤 이론이나 사상에도 걸리지 않은 채 자유롭게 아름다운 삶을 창조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진리의 본 바탕에 들어가 아무런 분별이나 망상이 일어나지 않고 온갖 차별과 헤아림이 끊어졌을 때, 그때를 청정이라고 하고 청정한 곳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청정해 졌을 때 사방이 청정해지고 청정한 그곳에 삼보와 호법신은 나타납니다. 온갖 복된 일을 일으키려고 내려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