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마치 흘러가는 물과 같이 살아 흐르는 것입니다

다시 뵙고 싶은 큰스님/서암(西庵) 스님

2007-01-23     관리자


사진 윤명숙
서암 스님은 1917년 경북 풍기에서 출생, 1928년 예천 서악사에서 출가하였다. 1936년 김용사에서 화산 스님을 은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였으며 김용사 강원 사교과를 수료하고, 일본대학 종교학과에 다니다 폐병으로 시한부선고를 받고, 3학년을 중퇴하였다. 당시 출가한 지 6년 된 승려로서 용맹정진해서 생사를 뛰어넘어야겠다는 각오로 정진, 득력하였다. 철원 심원사에서 강사를 역임하였고, 대승사에서 청안 스님, 청담 스님, 포산 스님, 우봉 스님, 성철 스님과 함께 정진하였다. 광복 후엔 금오 스님을 모시고 지리산 칠불암에서 정진, 마지막까지 남은 세 분 중 한 분이다. 해인사, 망월사, 청화산 원적사 등에서 정진하였으며, 예천에 포교당을 설립하기도 했다. 갑사의 토굴에서 단식 수행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 40안거를 성만하였으며, 문경 봉암사 조실로서 선풍을 진작시켜 봉암사가 구산선문으로서의 옛 가풍을 회복했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로회의 의장, 종정을 역임하였다. 말년에 대구 팔공사 제2 석굴암에 시봉을 두지 않고 머무르면서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고 대중포교운동을 열어가다가 2003년 3월 29일 문경 봉암사에서 세수 85세, 법랍 68세의 일기로 입적하셨다.

* 『위대한 자기의 발견(정토출판)』과 『소리 없는 소리(서암 스님 시자 엮음, 시월 펴냄)』에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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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 높은 큰스님들은 물 같고 바람 같다. 권위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 배려심도 깊다. 모두를 크게 아껴주신다. 바깥 환경에 전혀 구애받지 않으신다. 보통사람 같으면 안달복달할 상황인데도 평상심을 유지한다. 스님은 당시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힘든 상황(종정의 지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사퇴하시고 탈종, 토굴에서 홀로 정진하실 때였다.)이셨는데도 너무나도 평온하셨다. 수행의 힘이 그런 것인가 싶었다.
10여 년 전 삼각산에서 뵈었을 때, 팔순이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산길을 걸어가시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톤으로 물 흐르듯 거침없이 말씀하시는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 뵈었음에 그토록 감동했는데, 스님을 모시고 수행한 스님네들은 얼마나 큰 복일까 싶었다. 역시나 스님의 법어집을 엮은 시자스님은 “멀리서 스님의 재채기 소리만 들어도 정신이 번쩍 들 만큼, 한번 찾아뵙고서 다른 곳에 공부하러 가면 한철 내내 그 여운으로 나태해지지 않을 만큼, 그렇게 모든 것을 의지할 수 있는 큰 산이셨습니다.”라고 회고한다.
큰 산에서 수많은 도인이 배출되듯 스님 문하에서 심안(心眼)을 연 이들이 많았다. 제자들이 시봉을 들겠다고 찾아오면 “공부하려고 중 되었지, 남의 종노릇 하려고 중 되었냐?”고 야단을 쳐서 돌려보내셨다던 스님은 “ 울어도 내가 울고, 지옥을 가도 내가 가고, 천당을 가도 내 발로 가야 해탈이다. 천당을 가더라도 만약 누군가에게 끌려간 것이라면, 그것은 해탈이 아니다. 마음이 마치 갈대가 흔들리듯 흔들리지 않고, 초지일관 똑바로 자기 부처 찾아 사는 게 수행생활이다.”라고 강조하셨다.
스님은 참 나를 깨달은 부처였다.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꼿꼿하게 사시면서 각자(覺者)의 길을 보여주셨다. 대중교화에도 열성적이시어 모두가 부처 되는 길을 인연 따라 일깨워주셨다. “불법을 실천하며 살 때 자기가 행복하고, 그 행복한 마음을 가족과 이웃과 사회와 나누어 가질 때 인류평화에 기여하게 되는 것입니다.”라는 스님이 그립다. 알면서도 실천을 게을리 하기에 더욱 사무치게 그리운 것이다.

만물의 이치가 훤히 밝아지는 대자유, 대광명의 세계
참선수행에 들어가면 시간과 공간을 모두 잊어버리고 화두를 붙잡고 참구하며 삼매에 빠지게 된다. 일체 망념을 버리고 삼매에 빠지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열매를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좀더 나아가면 만물의 이치가 훤히 밝아지는 대자유, 대광명의 세계가 열린다. 그 다음에는 누구에게도,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진리의 세계가 구축되는데 이것이 안심입명의 경지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보든지 미혹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니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은 물론 오히려 무엇인가 깨침을 주게 되는 것이다. 중생을 돕고 구하는 일은 의도적이기보다 저절로 이루어져야 한다.

탐심을 바로 세우면 부처요, 탐심에 끌려가면 중생
불교는 아주 쉬운 것입니다. 무슨 재료를 갖고 하는 것도 아니고 빛도 냄새도 형태도 없는 이 마음을 어느 방향으로 기울이느냐 하는 데서 우리 인생이 180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무슨 밑천이 드는 것도 아니고 기교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한생각 돌이키면 됩니다. 쉽게 생각하면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을 몸으로 옮기자면 다 옮길 수 있을 것도 같지요? 그런데 그 생각이 일어나는 근거가 있습니까? 뿌리가 없지요. (중략) 진정한 우리 마음의 근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진심에 매달리고 탐심에 매달려 그 껍데기 마음만 보고 변함없는 부처 자리는 못 보고 있지요. 그러나 진실로 탐심 떼어놓고 진심 떼어놓고 치심 떼어놓고 부처 되는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탐심을 바로 세우면 부처요, 탐심에 끌려가면 중생입니다.

한생각에 집중하면 된다
요새 서양사람들은 참선을 할 때, 도를 얻기 위한 것보다는 복잡한 머리에 일어나는 불을 끄기 위해서 합니다. 마치 청량음료 마시면 갈증이 식듯이, 참선을 하니까, 앉은 자리에서 그만 모든 상념의 불꽃이 가라앉아버리지요. 모든 생각이 쉬어가고 하나에 집중하니까 생각이 정돈되고, 또 망상이나 노이로제, 신경쇠약 등의 현상들이 삽시간에 없어져 버립니다. 이렇듯 우리가 화두만 딱 잡고 앉으면 모든 생각이 정돈되고 번뇌, 망상, 탐진치 삼독에 찌든 업력의 구름이 흩어지니 본래 갖추고 있던 마음의 빛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참선의 요점이지요. 목탁을 치며 기도를 해도 삼매에 들어갑니다. 화경으로 초점만 맞추면 불이 일어나듯, 한생각에 집중하여 기도하면 됩니다.

천하가 스스로 평탄해지는 법
지금은 비록 인간일지라도 짐승과 같은 업을 지어놓으면 짐승이 되고, 선업을 지으면 천당에 가고, 악업을 지으면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스님이 천당과 지옥으로 밀어넣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가장 쉬운 진리를 전부 외면하고 살기 때문에 세계가 이렇게 혼탁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불교가 유통된다면 천하는 스스로 평탄해지지요. 대자대비는 절대 진리로서 절대 적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
불교는 석가모니께서 부처를 만들어내고 부처님 법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다만 석가모니께서 이 세상의 반듯한 이치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은 늘 자기를 잊어버리고 바깥으로 헤매는 중생을 일깨우는 가르침이지요. 이것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서양의 종교는 조물주가 있어 인간 이상의 신을 말하지만 불교는 스스로 주인된 자리를 찾아 성불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인생의 보배요, 최종 목적
선(禪)을 함으로 해서 본래 불생불멸하는 우리의 근본 마음의 고향 자리를 만나게 됩니다. 마음의 고향 자리라는 것이 본시 자유입니다. 아무 구속이 없지요. 이것을 불교에서는 해탈이라 합니다. 우리 불교뿐 아니라 모든 인류가 사실 다 자유를 갈구하고 자유를 찾습니다. 그리고 불교의 온갖 수행법이란 모두 이 자유를 얻는 방법입니다. 이로써 얻어진 자유야말로 인생을 행복되게 살아가는 보배이지요. 본래 마음자리의 자유를 되찾는 것이 우리 인생의 최종목적입니다.

불교는 마치 흘러가는 물과 같이 살아 흐르는 것
이 세상 모든 법을 규정지으면 다 안 맞는 것입니다. ‘무유정법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라, 일정한 법을 못 박아 놓으면 벌써 어긋나 버립니다. 정함 없는 법이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입니다. 무상정등정각이라 번역하기도 하지만 또 바른 길이라는 의미도 있어, 바른 이치나 진리에 들어가는 길이거든요. 불교는 마치 흘러가는 물과 같이 살아 흐르는 것이지, 이렇다 저렇다고 딱 고정시켜 놓으면 벌써 불법에서 어긋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