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신디 이야기

2007-07-25     관리자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어디서 부터 써야 할지 막막함과 신디에 대한 그리움이 마음 한구석에서 일어난다.

 신디가 세상을 떠난 지 반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 와서 이 글을 쓰게 된것은 그동안 많은 생각과 적잖은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글을 씀으로 해서 잠잠해지려는 마음에 다시금 일어나는 신디의 생각이 고통스러웠고 신디의 이야기를 한낱 이야깃거리로만 여길지도 모르고, 또한 동물에 대한 지나친 애착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로 치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싫어서였다.

 타종교인이나 무종교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불자라는 사람들조차 그렇게 생각할 때는 정말 맥이 빠지고 신디에게 오히려 미안한 생각이 들어 망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동물에 대한 그릇된 편견과 사고를 가진 사람들을 볼 때마다 너무나도 무지함에 안타깝고 속상하여 우리 신디 이야기를 글로 써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부처님이 우리의 마음을 헤아려 주셨던지 우연한 기회에 송암 스님께서 신디 이야기를 들으시고, 글로 써보라고 하시기에 비록 글솜씨는 없지만 용기를 내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다 갈 때는 남은 사람들에게 크든 작든 자국을 남기게 된다. 신디도 우리 식구들에게는 어떤 사람들이 남기고 간 자국보다 더욱 크게 우리들 가슴에 남아 있어서 눈을 감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신디와 우리의 인연은 예정된 만남이었다. 16년전 12월 24일에 한 달 된 마르티스 강아지를 선물로 받았다. 원래 동물이라면 유난히도 좋아하던 우리 형제들은 그날부터 온갖 정성을 다하여 애정을 쏟았다.

 신디는 식구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무럭무럭 잘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간질 발작을 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처음 당하는 일이라 신디가 발작을 할 때마다 너무나도 불쌍하고 가여웠지만 어떻게 도와줄 수가 없어 안타깝기만 하였다.

 그 후로 우리들은 더욱 더 신디를 위해주고 사랑으로 보살펴주었다. 부모님은 지방에 계시고 우리 형제들만 있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 부모님이 올라 오셨다.

 부모님께서는 신디가 간질병이 있는 것을 아시고는 비오는 어느 날 퇴계로에 갖다 파셨다. 우리는 부모님이 가신 다음날 퇴계로를 헤매고 신디를 찾아 다녔다. 신디가 발작하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미칠 것만 같았다.

 우리들이 신디를 찾았을 때는 이미 딴 사람이 산 후였고 잠시 그 가게에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대로 가게 주인에게 이야기를 하고 새 주인이 될 사람에게도 전화로 양해를 구하여 다시금 데려올 수가 있었다.

 그때부터 우리들은 신디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헤어지지 않기로 다짐하였다. 다음 주에 올라 오신 부모님께서는 깜짝 놀라셨지만 우리들의 고집에 더이상 말씀을 안하셨다.

 그러나 한 생명을 키운다는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세월이 갈수록 새삼 느낄수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유아비누롤 목욕을 시키고(샴푸는 몸에 좋지 않으므로) 털이 잘 마르도록 드라이로 말리면서 빗질을 잘 해주어야 털이 엉키지 않으므로 항상 빗질을 해 주었다. 또한 산책시키기, 발톱깍기, 귀소독하고 약넣기(귀병이 있었음) 등등 많은 시간을 신디에게 할애해야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식성이 까다로워서 항상 신디 반찬에 신경을 써야 했다. 우리들은 귀찮으면 간단히 먹을 수 있어도 신디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어리광을 부리느라고 혼자서 밥을 먹는 것보다 우리들이 떠먹여주는 것을 좋아하여 먹여줄 때까지 기다리기 일쑤였다.

 식성도 담백한 것을 좋아하여 수제비, 국수장국(멸치국물)을 특히 좋아하였다.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우리 외할머니께서 수제비와 국수장국을 좋아하셨단다. 또 겁이 어찌나 많은지 비가오거나 번개가 치면 정신없이 우왕좌왕하며 방문을 발톱으로 시끄럽게 긁는 바람에 우리들은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다.

 그래도 조금도 귀찮다거나 밉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또 아이들을 싫어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여 다른 사람이 놀러와서 만지기라도 하면 하품을 하면서 싫어하여 손님에게 미안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꿈을 꾸셨는데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 신디를 어머니에게 주시는 꿈을 꾸셨다고 하시면서 너희들 말대로 신디가 외할머니인지도 모르겠다고 하셨다. 꿈을 꾸고 나신 후로는 어머니께서도 신디를 전보다 더욱 귀여워해주셨다.

 여기서 외할머니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외할머니는 딸만 셋을 두셨는데 큰이모님께서 이종오빠를 낳으시고 늑막염에 걸리시자 사람들이 강아지가 좋다고 하여 어머님 기억으로 가마솥이 반질거리도록 강아지를 고아서 큰이모님에게 먹이셨단다.

 그 덕분인지 큰이모님은 병이 나으셨지만 외할머님께서는 엄청난 살생업을 지으셨던 것이었다. 외할머니께서는 아드님이 없으셔서 막내딸인 어머니하고 사셨는데, 어릴적 기억으로도 지나칠 정도로 깔끔하시고 우리들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셨다.

 사람을 살펴보시는 기준도 우리들에게 얼마나 잘하는가로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하실 정도였다. 어릴적에는 몰랐지만 점점 커가면서 외할머니의 우리들에 대한 사람이 얼마나 지극하셨던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신디가 12살 되던 해인 1987년 12월 서울대 수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 방광 결석 수술을 하였다. 얼마 전부터 소변을 자주 보고 피가 섞여 나오길래 엑스레이를 찍어 보니 방광에 결석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신디는 나이가 너무 많아 전신 마취를 하고 나서 깨어나지 못하는 수도 있다고 하시면서 수술시 위험 부담이 따른다고 하셨다. 집에 돌아와 가족 회의를 한 결과 모든 것은 부처님께 맡기고 수술을 하기로 하였다. 간기능 검사와 여러 가지 검사를 하였는데 다행히도 결과가 좋아서 선생님들도 놀라셨다.

 처음에는 교수님이 수술을 해주시기로 되어 있었는데 우리의 정성에 감동을 받으셔서 원장님께서 직접 수술을 집도해 주셨다. 우리는 수술을 하는 동안 염주를 굴리며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수술이 끝난 후 결석을 보여주시는데 조약돌만 하였다. 그런것이 뱃속에 들어있어도 말도 못하고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하니 진작 알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신디는 그후 계속 통원치료를 받고 우리의 정성어린 간호 덕분에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사실 신디는 너무 뚱뚱해서 수술이 끝난 후 원장님께서는 식이요법을 시켜야 오래 살 수 있다고 신신당부하셨다.

 그동안 우리들은 간질병은 잘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어머님가 우리들 먹으라고 지어다 주신 보약을 먹이고, 체하거나 번개가 쳐서 놀았을 때에는 우황청심환을 먹였다.

 먹을 것이 있을 때에도 항상 먼저 신디를 먹이고 나서 우리들이 먹었다. 그래서 산책을 데리고 나가면 사람들은 모두 새끼를 가진 줄로 착각을 했다. 밖에는 나가고 싶어하고 걷지는 않으려고 해서 업어주거나 유모차를 태워 주었다.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우리는 그런것에 개의하지 않았다.

- 계속 -                             오정연 : 경기도 성남시 신흥동 주공 A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