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하는 마음

*에세이· 동불서불 (東佛西佛)

2007-07-24     관리자

  따사로운 마음
  
 풍요(豊饒) 속의 빈곤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얻는 것이 많은 대신에 잃는 것도 적지 않다는 뜻일게다. 어렸을 때 지나온 생각을 해볼 때 지금은 참 엄청나게 잘 사는구나하고 괜시리 미안한 생각이 들때가 있다. 학교에도 채 들어가기 이전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호롱불을 닦는 것이었다. 전기불이 있을 리 없었고 방마다 시꺼멓게 그을린 등잔을 닦다가 깨뜨리기라도 할량이면 그날 저녁은 굶어야 했다. 안스러워 하는 어머니 치마폭에서 식구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어야 했던 참담한 기억이 새롭다. 학교에 들어가면서 가난하다는 것이 얼마나 일반화되었는지를 실감하였다  6.25 통이니까 그랬겠지만 변변히 도시락을 싸오는 아이들이 없었다.

 지금 나는 우리집 아이들한테 가난하다는 개념을 설명하는데 곤혹을 치른다. 더운 물이 콸콸 쏟나지고 말만 하면 필요한 것은 다 가져다 주는 생활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인가를 설명하지만, 여전히 설득력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전화도 떼고, 냉장고도 없애버리고 전기밥솥도 깨뜨려 버릴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내 설교는 언제나 허공을 맴돌게 된다. 마치 내가 대동아전쟁때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아이들은 나의 감회어린 술회를 건성으로 들어 넘기는 것이다.

 그때에 비하면 나는 지금 너무도 많은 것을 갖고 있다. 그러나 가진 것이 많은 대신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 모른다. 가족끼리의 대화는 테레비가 뺏어갔고, 가슴 설레이는 기다림의 인고(忍苦) 는 따르릉 하는 전화가 뺏어갔다. 우리가 잃은 것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바로 「따뜻한 마음」인 것이다. 따뜻한 마음은 회색빛 콩크리트 속에서 싹트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고마워 하는 마음씨, 불쌍히 여기는 마음씨 대신에 뻔뻔하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이 시대를 암울하게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일이다.

 사실 인간의 따사로운 마음이란 본래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는 이유는 철학의 빈곤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철학하면 아직도 기괴한 행동이나 언사를 연상하는 듯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다소 데카당(decadent)한 분위기가 철학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온통 괴상한 짓거리만을 일삼는 것은 결코 철학의 영역일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은 회의(懷疑)의 정신을 모체로 한다. 우리가 여태까지 당연하게 생각해 오던 것에 관해 진지하게 의심해 보는 자세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근본은 무엇일까 저 밑없는 깊이를 가진 물은 어떻게 존재할수 있을까? 과연 세계는 그 자체로서 무한할까? 이러한 끊임없는 질문을 이성적으로 고뇌해 보고 논리적으로 풀어보려는 인간의 원초적 심리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인간은 누구나 철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쁜 일상의 번잡 속에서, 혹은 시정의 소란 속에서 우리는 누구나 할것없이 자신의 삶을 반조(反照)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기 보다는 배부른 돼지가 되고 싶어 하는 듯 하다. 오직 이윤만을 추구하는 댜수적인 인간상이 양산(糧産)되고 있는 것이다.

   눈물겨운 신행의 발자취

 부처님은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죽음」의 문제에 그 회의의 화살을 꽂는다. 그 고뇌의 깉은 그림자는 오히려 그 분에게 있어서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게 했던 것이다. 이와같은 집념의 삶을 우리 나라의 원효같은 분은 「궁구조명 (窮究照明)」이라고 표현한다. 인과(因果)의 멍에를 끝까지 파헤치고 성인의 경지를 궁극적으로 밝혀 내여 삼라만상의 본질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루하루를 그렇게 지워나가기에는 너무도 절실한 그무엇이 우리들의 삶 위에 놓여 있다. 죽음이라는 절박한 종착역을 향해 가는 우리의 삶에 윤기를 주는 일은 결코 세속적인 욕망의 추구는 아니다. 그래서 인간은 철학자가 되기는 어렵지만 철학적 인간이 되기는 용이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철학에도 한계는 있다. 왜냐하면 지성과 인격은 반드시 정비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 철학자였지만 보기 드문 대식가이기도 하였다. 염세에는 어울리지 않는 식욕을 친구들이 놀린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세 사람 몫을 하기 때문에 많이 먹는다고 재치를 부렸지만 허전한 느낌이 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실한 의미에서 고대 철학을 완성시킨 인물이지만 스승인 플라톤에 비해 볼 때  인격은 그만큼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다. 니체는 근친상간에 의한 매독성 뇌막염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병을 얻고 세상을 떠났다.

 이들 위대한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그 지성의 향기는 돋보이지만, 인격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여기에 종교가 가진 발언권이 있다. 비록 지적(知的)으로 완숙한 경지를 보이지는 못하지만 그 눈물겨운 신행의 발자취는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이차돈이 순교에 임해서 남겼다는 말, 「나의 죽는 날은 곧 사는 날이 되리라.」는 외침은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경구이다.

 그는 불법(佛法)의 홍포를 위해 꽃다운 젊음의 피를 대지에 뿌린다. 그 믿음의 힘이 바로 종교에 귀의하게 되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따라서 바람직한 삶이란  철학하는 마음과, 반석같은 신념이 똑맞아 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믿음이란 올바른 마음씨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믿음은 다만 맹신(盲信)이오, 광신일 따름이다.

   일회적 삶에서 진실을…

 내가 느끼기에로는 철학하는 마음도 굳건한 믿음도 점차 왜소화해 가는 것은 아닌가 싶어진다. 생활 수준의 향상에 발맞추어 용모도 세련되고, 의식 수준도 높아졌으나 어쩐지 도심(道心)은 자꾸 없어져 가는 것이다. 그러나 구도의 열정은 결코 교과서에만 나오는 형해화(形骸化)된 관념은 아니라고 믿는다. 긴 밤을 울어 새울 수 있는 간곡함이 있어야 하고, 뼈를 깎는 고뇌를 감수할 수 있는 인내가 있어야 한다. 그 첫걸음은 바로 일회적(一回的)으로 수행되는 삶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일이다. 

 젊음이란 다소간 서툴고, 무책임하게 마련이지만, 인생을 경솔하게만 살아가는 것은 무척 불행한 일이다. 일순의 잘못된 생각으로 목숨을 끊는다던지 자포자기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 없다. 좀더 깊은 안목을 갖고 스스로를 관조하는 여유가 아쉽다.

 불교에서는 이와같은 깊은 경지를 가리켜 신통(神通)이라고 한다. 신통의 능력이란 얼핏 생각해 보면 구름을 타고 날아다니고 불노(不老)의 경지를 얻는 것같이 보이지만, 그것은 다만 상징일 따름이다. 천안통(天眼通)은 바로 우리의 안목이 달라진다는 표현일 수 있다. 여태까지 애증(愛憎)의 대상으로 보이던 것이 덤덤하게 보이는 새로운 안목을 얻었다는 의미이다. 천이통(天耳通)은 마찬가지로 우리의 귀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비방과 칭찬 사이에 동요됨이 없이 담담하게 자신의 소신을 지켜나갈 수 있는 귀를 가진게 되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신통을 얻음은 결국 우리의 육근(六根)이 삼독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화엄경」에서도 세상의 갖가지 환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바로 마음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온통 하느님 없으면 금메달을 못딸듯이 떠들어 대는 한국 선수들의 치기(稚氣)를 들으면서 더 이상 역겨워지지 않는 천이통(天耳通)의 귀를 갖고 싶어진다. (동국대 문과대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