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륙에서 장백산까지

중국불교 성지순례

2007-07-24     관리자
우리는 예정대로 8월 1일 중국대륙에서 백두산까지 중국불교협회를 방문하였다. 북경대학과 북경불교학원도 방문할 계획이었으나 그 쪽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 계획이 모두 취소되고 말았다.
 
1953년에 설립된 중국불교협회는 그 본부를 북경시내 광제사(廣濟寺)에 두고 있다. 광제사는 금(金)때 창건된 유명한 고찰 중의 하나로서 중국의 모든 절들이 그렇듯이 오래전부터 전란의 병화(兵火)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燒失)되고 복구되었다.
 
1935년에 더 큰 규모로 중창되고, 1952년 신중국(新中國)이 수립된 후에 인민정부의 배려로 수리 단장되어 오늘의 모습을 간직하게 되었다.
 
중국의 고찰들은 이와 같이 전란에 시달렸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소위 문화혁명의 바람을 타서 파괴되는 운명도 면치 못했다. 요행히 그 화를 모면한 사찰들만이 그후 개발정책에 따라 그 면모를 새로이 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중국 불교협회 임원들과 자리를 같이하여 일문일답을 주고받는 동안에 중국불교의 현황을 그 일면이나마 엿볼 수가 있었다. 불교신도 수가 다른 종교들에 비하여 제일 많고, 그 다음이 기독교 도교 이슬람교 순이라고 하였다.
 
스님 수도 복건성 한곳에만 만 명에 달한다니까 전국적인 규모를 헤아려 짐작할 수가 있었다. 통계적인 숫자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찰 유지경영에 있어서도 큰 절은 신도수가 몇 만 명씩 되어서 자체유지가 가능하고, 그렇지 못한 군소 사찰들은 정부의 보조로 유지 되어간다고 했다. 수행(修行)에 있어서 절의 일과가 한국의 그것과 별차이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전통불교를 계승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돌아본 북경의 광제사나, 서안(西安)의 흥교사(興敎寺)나 장춘의 반야사 같은 절이 작은 절이 아님에도 스님들 수가 적고, 또 수행하는 모습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불교협회 관계자들의 말을 통해 미루어 짐작컨대 고승대덕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개가 도시사찰에 있기보다 지방 산중사찰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북경에 있는 사해산경공원(四海山景公園)에 갔다. 서태후(西太后)가 파놓은 인공호(人工湖)는 아주 장관이었다. 하도 넓어서 이름 그대로 사면이 바다 같은 착각을 했다. 중앙에 다리가 놓이고 한쪽에서는 젊은이들이 선유를 즐기고, 다른 쪽에는 연(蓮)의 바다이다.
 
이 연바다 한 가운데 거대한 관세음보살 입상이 우뚝 서서 짙은 미소를 짓고 있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이를 보는 누구도 관음보살의 자비를 아니 느낄 수 없으리라. 이 공원에도 고찰은 있었다. 영안사(永安寺)가 그것이다. 이 연지(蓮池)를 조감하도록 언덕위에 세워졌다. 아마 태후(太后)의 원찰인지도 모른다.
 
호수가 하도 아름다워 시조 한 수를 지어 보았다.
 
관음이 미소짓고 연꽃이 물에 피니
장엄한 호수위에 태후가 다시 사네
찾아든 길손인들 離俗回心 없으랴
 
우리 일행은 세계적 불교 유적지 돈황(敦煌)으로 가기에 앞서 난주(蘭州)에 들러 오천산공원(五泉山公園)을 구경했다. 준원사(濬源寺)라는 고찰이 퇴락되어 그곳을 공원으로 만들었다. 공원이 되기에 충분히 넓다.
 
절벽같은 계단식 언덕 위에 수많은 절 집들이 층층이 늘어서 그 잔해만 앙상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버팀대를 지팡이 삼아 건축양식도 특이하거니와 그 용마루 꼴은 더욱 절묘하다. 이 고찰은 왕년의 풍모를 아직도 과시하려 하건만 무심한 길손들은 시선조차 안 보낸다.
 
濬源寺 그 터전에 五泉山公園이라
잔해만 남아있어 往年을 말하는가
옛 榮華 推想하니 눈시울이 뜨겁다.
 
수많은 고찰들은 이와 같이 세월을 못이겨서 하염없이 퇴락되어 가건만 시절 인연이 멀었는지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다. 도리어 공원으로 전락하니 뭇사람의 발길에 채어 그 수명을 더욱 단축할 뿐이다.
 
무슨 공원하면 대개는 허물어져가는 명승고찰의 터전이다. 장엄했던 옛 절이 그 이름조차 잊을 만큼 폐허가 되어간다. 앞에서 본 영안사나 준원사도 그렇지만 다음에 들린 난주의 백탑사(白塔寺)공원도 그 한 예일 것이다. 뜻있는 이에게는 퍽이나 안타까운 일이다.
 
8월 4일 아침 돈황 막고굴(莫高窟) 가는 길에, 뽕도 따고 임도 본다나. 사막 한가운데서 일행이 모두 함께 낙타를 시승(試乘)했다. 오늘 내가 낙타등에 앉아서, 옛 대상(隊商)들이 생사를 걸고 실크로오드를 왕래하던 그 길을 간다고 생각하니 아무래도 꿈만 같았다.
 
사막엔 모래더미 연산(連山)이 즐비하다. 바람이 불면 모래산이 운다. 그래서 명사산(鳴沙山)이다. 모래산이라지만 손가락으로 찔러보니 돌같이 굳다. 막고굴, 그 굴이 1000개나 된다.
 
불상이나 벽화가 있는 굴만도 469곳. 특히 아미타불이나 미륵불이 장관이다.
몇 층을 올라가야 그 상호를 마주 대한다. 밑에서는 그 키가 까맣게 쳐다보인다. 불상이고 벽화고 그 채색이 찬란하다.
 
그렇긴 하지만 한국 석굴암의 그 정교함은 이 막고굴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막고굴은 1000년이란 장구한 세월 속에 이루어진 신앙과 공덕의 결정(結晶)이다.
 
4세기 중엽부터 13세기 까지. 그 당시 중국 불교 문화를 역설해준다. 그 뒤에 숨었다고 어찌 그 장인(匠人)들의 신심을 잊을 수가 있으랴.
 
천개의 막고굴을 천년에 만든 장인
공덕도 크거니와 원력도 장하구나
석굴이야 무너진들 신심이야 가시랴
 
석굴을 돌아보는 그 동안에도 바람은 모래를 휘몰아와서 어느새 모래가 베란다를 덮어 버린다. 그래서 비를 든 저 사람은 노상 서있다. 비를 든 저 사람도 시절 인연이 다하면 가버릴 것이다.
 
전에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모래가 쌓이고 쌓여 산을 이루면 여느 모래산과 다름이 없다. 세월은 바뀌고 사람은 망각에 잠긴다. 망각속에 잠자던 이 유적을 발굴한 이가 청조(淸朝)말의 영국인 스타인이라고 하던가.
 
그 중 한 굴속에서 만권의 고문서를 발견하여 그 일부를 1907년엔 대영박물관으로, 1908년엔 프랑스인 페리오가 또 그 일부를 파리 국립도서관으로 반출해갔다지. 혜초 스님의『왕오천축국전』의 두루마리 필사본도 이래서 파리에 가서 안치된 것이다.
 
장백산(중국어 명칭) 천지로 향한 것은 8월 9일 아침, 중강에서 버스를 내려 정상으로 걸었다. 그 길이가 6km라고 하던가. 일행은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씩 정상에 올랐다. 그 순간 감회도 크고 감개도 무량하련만 숨이 찬 탓인지 그저 조용하게 분화구에 담긴 녹수(綠水)와 병풍같이 세워진 산 봉우리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정상에서 천지를 향하여 예정대로 ‘평화통일 기원법회’를 가졌다. 운제스님의 삼귀의 선창으로 진행되어 반야심경 독송, 그리고 고준환 회장이 기원문을 정중하게 낭독하였다.
 
아울러 이남덕 교수가 정성을 다하여 한라산에서 가져온 고귀한 흙 한줌을 정기어린 백두산 흙과 조합(調合)하여 의미있는 합토식(合土式)을 가졌다. 그 순간 일행은 다함께 마음 깊이 조국의 평화통일을 간절히 염원했을 것이다.
 
백두 한라 두 정기 천지에 화합하고
부처님의 가피가 여기에 조화되니
육천만의 통일염원 머지않아 꽃피리
 
백두산의 하산길은 우리 여행의 하산길이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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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식/문학박사. 1921년 경기도 광주 출생. 성균관대에서 불문학을 전공하였으며, 성균관대 불문과 교수를 거쳐 현 명예교수로 있다. 서울 佛日會長, 佛日會報 편집위원으로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