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가람 터를 찾아 3 - 백제 멸망을 예견한 오합사 그리고 성주사
불교문화산책 93
2007-01-23 관리자
두 나라에 걸친 인연, 오합사(烏合寺)와 성주사(聖住寺)의 내력
서해안에 위치한 성주사는“수나라 양제 대업(大業)12년 백제국 법왕(法王)이 오합사를 건립”했던 유서 깊은 곳으로 『숭암산성주사사적』에 창건기록이 전하고 있다. 오합사는 사서에 따라 오함사·오회사 등으로 불리었는데 동일한 사찰로 이해되고 있다.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따라 성왕 16년(538) 사비에 도읍을 정한 백제는 수도를 지키기 위한 3산과 국토방위를 위해 5악(岳)을 설치하였으며, 이 곳에 호국사찰을 설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관산성 전투로 성왕이 전사하자 잠시 주춤하게 되었고, 법왕대에 들어와서야 국가사업으로서의 대규모 사찰 건설이 추진되었다. 법왕은 전쟁 기간 사망한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5악의 하나였던 북악에 호국사찰로서 오합사를 창건하였다. 『삼국사기』 의자왕 15년조“적색마가 북악의 오합사에 들어와 울면서 불사를 수일간 돌다 죽었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백제 멸망을 예견하는 기사가 빈번한데, 오합사가 호국사찰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후 오합사는 신라하대 9산선문 중의 하나인 성주산문을 개창한 낭혜무염이 크게 중창하였으며, 문성왕이 성주선원이라고 사액하였다. 무염은 13세(812)에 출가하여 822년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으며, 845년 폐불정책으로 귀국하게 된다. 유학 전 이미 북종선과 화엄 양자를 공부한 무염은, 마조선 계통의 남종선을 수용하게 되었고 귀국 후 성주사에 주석하며“선법을 바르게 전하는 사람은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무설토(無舌吐)를 주창하였다.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백월보광’이라 하였다.
『숭암산성주사사적』에 따르면, 성주사의 규모는 1,000여 칸에 이르는 대찰이었다고 한다. 수차의 발굴 결과와 『성주사비』에 의하면 현존 5층석탑에 선행하는 백제시대 목탑과 삼천불전, 행랑 그리고 비로자나철불로 추정되는 장육세존상이 봉안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희미한 역사의 묵향에 묻혀있을 뿐이다.
현존하는 유물 중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신라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이 찬한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의 하나로 비신 높이만 251㎝로 신라 최대이며 글자수도 5,120자의 장문을 자랑한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걸작이라 할만하다. 유독 많은 석탑이 눈낄을 사로잡는다. 금당터를 중심으로 앞의 5층석탑과 후면의 3층석탑 3기가 그것이다. 이중 후자는 1층 탑신석에 문비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특히 『성주사비』에 기록된 무구정석탑으로 추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