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가람 터를 찾아 3 - 백제 멸망을 예견한 오합사 그리고 성주사

불교문화산책 93

2007-01-23     관리자

▲ 성주사지석탑, 통일신라, 보물 제19·20·47호 및 시도유형문화재 제26호
옛 절터에는 담장이 없다. 기껏 구획을 나누기 위한 금줄이 고작이다. 절 안팎이 모두 한 공간이거늘 애꿎게 담높일 필요 무엇이었으랴. 처음부터 없던 것인데, 요즘 우리네 사람들은 제 욕심에 겨워 높인 담장에 햇빛 가림을 보지 못한다.

두 나라에 걸친 인연, 오합사(烏合寺)와 성주사(聖住寺)의 내력
서해안에 위치한 성주사는“수나라 양제 대업(大業)12년 백제국 법왕(法王)이 오합사를 건립”했던 유서 깊은 곳으로 『숭암산성주사사적』에 창건기록이 전하고 있다. 오합사는 사서에 따라 오함사·오회사 등으로 불리었는데 동일한 사찰로 이해되고 있다.
▲ 성주사지와 석불입상, 통일신라/조선, 사적 제307호·문화재자료 제373호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따라 성왕 16년(538) 사비에 도읍을 정한 백제는 수도를 지키기 위한 3산과 국토방위를 위해 5악(岳)을 설치하였으며, 이 곳에 호국사찰을 설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관산성 전투로 성왕이 전사하자 잠시 주춤하게 되었고, 법왕대에 들어와서야 국가사업으로서의 대규모 사찰 건설이 추진되었다. 법왕은 전쟁 기간 사망한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5악의 하나였던 북악에 호국사찰로서 오합사를 창건하였다. 『삼국사기』 의자왕 15년조“적색마가 북악의 오합사에 들어와 울면서 불사를 수일간 돌다 죽었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백제 멸망을 예견하는 기사가 빈번한데, 오합사가 호국사찰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후 오합사는 신라하대 9산선문 중의 하나인 성주산문을 개창한 낭혜무염이 크게 중창하였으며, 문성왕이 성주선원이라고 사액하였다. 무염은 13세(812)에 출가하여 822년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으며, 845년 폐불정책으로 귀국하게 된다. 유학 전 이미 북종선과 화엄 양자를 공부한 무염은, 마조선 계통의 남종선을 수용하게 되었고 귀국 후 성주사에 주석하며“선법을 바르게 전하는 사람은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무설토(無舌吐)를 주창하였다.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백월보광’이라 하였다.

▲ 성주사지 석등, 조선시대, 시도유형문화재 제33호
성주사터의 말울음 소리
『숭암산성주사사적』에 따르면, 성주사의 규모는 1,000여 칸에 이르는 대찰이었다고 한다. 수차의 발굴 결과와 『성주사비』에 의하면 현존 5층석탑에 선행하는 백제시대 목탑과 삼천불전, 행랑 그리고 비로자나철불로 추정되는 장육세존상이 봉안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희미한 역사의 묵향에 묻혀있을 뿐이다.
현존하는 유물 중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신라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이 찬한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의 하나로 비신 높이만 251㎝로 신라 최대이며 글자수도 5,120자의 장문을 자랑한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걸작이라 할만하다. 유독 많은 석탑이 눈낄을 사로잡는다. 금당터를 중심으로 앞의 5층석탑과 후면의 3층석탑 3기가 그것이다. 이중 후자는 1층 탑신석에 문비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특히 『성주사비』에 기록된 무구정석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郎慧和尙白月癩光塔碑), 909년(효공왕 13) 이후, 국보 제8호
이외 조선시대 제작으로 추정되는 석등(사진3) 1기가 5층석탑 앞에 복원되어 있고, 훼손이 심해 세부표현을 확인할 순 없으나 두터운 통견법의에 시무외여원인을 결한 여래입상 1구가 전하고 있다. 금당터에는 통일신라말 유행한 철불을 봉안했을 깨진 석조대좌만이 덩그러니 남아있고, 양 쪽에 사자가 아름답게 조각된 계단이 있었는데 몇 해 전 도난을 당하고 말았다.
▲ 성주사지 금당지 석조대좌, 통일신라
무염은 진리는 생활 속에 있으므로, 특별한 수행이 불필요하다고 하였다. 마조도일의 “도는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를 더럽히지 않는 것이다(『景德傳燈錄』 권28)”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한바탕 소나기가 먼지 덮인 옥개석을 씻어주는 여름날, 돌아앉은 선사 어깨 위로 배롱나무 그늘이 덮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