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는 중생에 속하는 것

불광법단

2007-07-17     관리자

  중생이 있어 보살이 성불한다.

  보현행원품 수순중생장 끝머리에 참으로 감격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보리(菩提)는 중생에 속하는 것이니, 만약 중생이 없으면 일체 보살이 마침내 무상정각을 이루지 못하느니라."

  보리-깨달음은, 지고의 가치라고 하는 이것은 중생에 속해 있는 까닭에 중생이 없으면 한 사람도 성불 못한다. 중생이 있어서 비로소 성불한다는 이 대문은 참으로 감격적인 사자후이십니다.

  "중생을 수순하라. 중생을 받들어 섬겨라. 그런데 중생이 누구냐 하면, 부처님을 나무로 비유하면 중생은 그 뿌리며 보살은 그 나무의 꽃이고 과실이다. 꽃과 과실을 무성하게 하고 싶거든, 그 나무를 무성하게 하고 싶거든 마땅히 그 뿌리에 물을 주라. 중생에게 물을 주어서 중생을 받들어 섬기고 중생을 성숙시키면 그대로 불보살의 지혜의 꽃과 과실이 크게 무성해지느니라." 이러한 말씀입니다.

  부처님과 같이, 스승님과 같이, 아라한과 같이, 부모님과 같이 받들어 섬겨라. 병든 이에게는 어진 의원이 되고, 어두운 밤에는 등불이되고, 길 잃은 이에게는 바른 길을 가르쳐 주고 가난한 이에게는 복을 열게 하는 등 중생을 수순하고 받드는 것도 지혜스럽게 해야 합니다.

  불교의 목표

  우리 불교에 목표가 있다고 한다면 간략하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중생성숙입니다.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을 완전무결한 사람으로 완성시킨다 하는 것입니다. 중생을 성숙시켜서 알찬 중생을 만드는 것입니다. 중생을 부처로 만드는 것을 중생을 성숙시킨다고 하는 것입니다. 중생성숙이라고 하면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깨우쳐서 거짓된 허망의 둥지에서 벗어나고, 참된 자기로 돌아가서 자기의 참된 가치와 모습에 안정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중생이 참된 자기를 실현하는 것을 중생성숙이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국토성취입니다.

  국토성취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조건, 이것은 불법을 그대로 구현한 땅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이상국토의 실현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있는 고귀한 덕성들을 완전히 발휘하여 쓸 수 있는 사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들의 사회가 인간이 타고난 덕성을 다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 있는가 돌이켜 볼 때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타고난 재주를 쓰지 못하고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설사 타고난 재주를 쓴다고 하더라도 올바른 데 쓰지 못하고 그릇된 방향에 쓰다 죽은 사람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이 세상 인간이 인간의 참가치를 누리고 살 뿐만 아니라 인간이 참생명을 충분히 보장받고 충분히 그 빛을 낼 수 있는 완전한 국토인가 생각해 보면 아직도 먼 미래의 일입니다. 불교는 인간을 성숙시켜서 완전한 인간을 만들어 내고 그 완성된 인간이 자기의 참가치를 충분히 발휘하며 살 수 있는 사회를 구축해서, 인간의 내면가치를 발휘하고 보장받을 수 있도록 불국토를 성취하는 것이 불교의 기본목표 중의 하나입니다.

  수순은 자비심으로 지혜롭게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중생을 수순하고 받들어 섬기는 것도 필경에는 위의 목표와 부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섬기는 일도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술꾼을 만년술꾼으로 만들거나 탕아를 만년탕아로 만드는 식의 섬김은 그 사람을 바로 받들어 섬겼다고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술을 좋아하니까 술집에 갔고, 저 사람은 노름을 좋아하니까 도박장에 갔고 하는 식으로 그 사람의 좋아함을 따라서 좇아 주는 것은 그 사람을 성숙시키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순을 하더라도 지혜롭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수순하는 방법이 국토를 성취시키고 이 땅에 진리가 표현되고 인간의 참가치가 보장되는 사회가 되는데 도움이 되는 방법인가? 그리고 그 사람이 완전한 가치관을 세우고 원만한 인격과 덕성을 발휘하도록 인도하였던가를 점검하고 반성하면서 수순하고 받들어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중생성숙은 그 사람의 내면의 가치에 눈 뜨게 하고 그 가치를 발휘해서 충분히 자기 능력을 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타락시키고 그 사람의 능력을 폐쇄시키고 그 사람의 가치가 매몰되는 방법인데도 따라만 준다고 해서 수순중생 잘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든 상대방을 위의 두 가지 목표에 부합되게 수순하고 받들어 섬기는 그 자체는 나의 마음에 밝음을 가져옵니다. 나와 더불어 대립된 경계가 극복되고, 내가 저와 더불어 함께 하기 때문에 나는 그 만큼 확대된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을 받들어 모신 것이 내가 저에게 먹힌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저가 나 가운데 합쳐진 것이고 따라서 내가 그만큼 복을 받게 됩니다. 수순을 할 때는 내 마음의 자비의 표현이 되어야 하고  또 지혜스럽게 하여 그 사람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여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 가정의 수순을 먼저 하여야 합니다. 나와 가장 가까이 계신 부처님들, 부모 형제 부부 그리고 자손들 이들에 대한 수순을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 법을 배워서 밖에서는 수순을 잘 하면서 부모에게나 형제간에 화목하지 못하고 반목하면서 불교를 믿는다고 한다면 행원의 수순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수순중생은 법공양이며 자기수행입니다. 수행과 설법과 중생성숙을 한꺼번에 하는 것입니다. 육조단경에 보면 육조스님이 제일 강조하신 것이 항상 자기 허물을 보고 남의 허물은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조금 똑똑한 사람들이 남의 허물을 봅니다. 남의 허물을 보고 말하려거든 진정 자비한 마음으로 그 사람을 위하는 입장에서 말을 해야 하되 조금이라도 잘못을 지적하고 충고해 주는 입장에서 말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한 태도는 너와 내가 깊은 생명을 나눈 그런 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육조스님께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 허물을 보라. 남의 허물이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은 자기 마음의 상태가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의 잘못이 보이는 것 그 자체가 나의 허물이다. 자기 허물을 항상 보는 것 이것이 바로 최상의 설법이고, 법공양이고 자기 수행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행이 우리의 환경을 만들어 갑니다. 환경을 만드는 것은 잘못을 지적하여 고쳐서 되는 것보다 오히려 상대방이 바뀌기를 요구하지 말고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깨달음의 행을 하라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깨달음을 행할 때 그 깨달음의 행동을 통해서 이 국토 하나하나가 불국토로 바뀌어 갑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아무리 복을 기원한다고 하더라도 미혹한 행위 (자기 중심의 이기주의적인 행), 무지한 행위를 계속한다면 그것은 깨달음의 행이 되지 못하고 자기가 자기 발등을 찍는 결과밖에 되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일방적으로 자기만 생각하고 상대방은 생각해 주지 않는 경우이고, 자기 가정만 생각하고 남의 가정은 생각하지 않는 경우이고,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나라와 사회를 생각하지 않는 경우이고, 국가인 경우 자기 국가 이익만 생각하고 국제질서나 인류의 평화공존을 생각하지 않는 이런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그대로 극락국토로 만들려고 한다면 한사람 한사람의 행이 깨달음의 행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행원을 공부할 때는 이것을 불교의 근본 목표와 상관시켜 가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필경 수순한다는 것이 무한한 자기 본성 그 내부에 있는 가지가지 이질적인 요소를 그대로 참 자기로 승화시키는 것이 됩니다.

  자기화 하는 것, 그래서 수순이야말로 자기확대이고 자기성숙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자기 자성 가운데에 중생이 있으면 자기 마음 가운데에 허물이 있는 것이고, 자기 마음에 중생이 없고 완전히 맑아졌을 대 비로소 자기 자성은 청정무구하고 완전히 조화된 원만한 성불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수순중생이라는 것은 이러한 것이 밑바닥에 깔린 것입니다.

  국민의 번영이 국가의 번영

  "보리는 중생에 속하나니 만약 중생이 없으면 한 보살도 성불하지 못한다"하는 이 대문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살필 부분이 많습니다.

  먼저 정부와 국민의 관계입니다. 정부가 아무리 훌륭한 정부라 하더라도 국가의 번영은 국민에게 있으므로 국민이 없으면 한 정부도 정부 노릇을 못한다. 이런 식으로 이 도리를 적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국민이 없으면 국가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국가적인 번영은 국민을 위해주는데 있는 것이다'하는 이런 도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국민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이 정부를 무시하고 정부의 권능을 무시하여 이기적이고 개인적으로만 행동한다면 개인이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부와 개인의 관계도 그런 것입니다.

  생산과 소비의 경제체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이 소비자를 도외시하고 극단의 이익만을 추구할 때 생산자는 스스로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기업이 소비자를 육성해 주고 소비자의 이익을 보장하는 데서부터 영리라는 이윤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종교인이 사업을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이 옳은 일이냐? 하는 문제를 제기해 온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긍정합니다. 불교를 참으로 잘 믿는 사람은 부자가 되어서 천국까지 살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부는 일방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소비대중이라는 많은 대중에게 많은 서비스를 제공했을 때 비로소 많은 이윤이 돌아오는 것이지 결탁하거나 유통의 조작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은 얼마 가지 않습니다.

  진실한 부의 기초는 대중에 대한 봉사, 소비자에 대한 봉사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봉사하고 편의와 이익을 제공함으로써 이익을 본 것은 훈장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신 축적한 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별개 문제입니다.

  일단 불교의 입장에서 볼 것 같으면 왕성한 경제활동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고 경제적인 힘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도 죄될 것이 없습니다. 생산이라고 하는 것이 소비자를 떠나서 혼자 할 수 없기 때문에 소비자를 향한 봉사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인 부를 얻는 것도, 보리는 중생에 속한다 하는 도리가 적용되는 것입니다. 중생이 없으면 한사람도 성불하지 못한다. 즉 소비자가 없으면 한사람도 기업을 성공시키고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근로자와 사용주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로자가 노동생산치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임금 인상을 요구한다든가 뜻을 관철하기 위하여 단체행동을 하는 것도 이 방법이 그럴 듯해 보이지만 그러나 기업이 깨어지면 나누어 먹을 것도 없습니다. 기업을 키워놓고 많이 나누어 먹자고 해야지 기업을 깨지게 해놓고 많이 달라고 해 보아야 기업이 문 닫게 되었는데 나누어 먹을 것이 있겠습니까. 사용주 입장에서도 근로자에게 고른 분배와 편의시설을 제공하여 기업과의 관계가 아니라 공동운명체임을 근로자가 스스로 느끼고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 점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같이 보리는 중생에 속한다. 그러니까 보리는 중생, 중생은 보리, 이것은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이 도리가 모든 경우에 해당됩니다.

  국가와 국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나라의 번영과 부강을 위해서 군사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경제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근래에 오일파동을 몰고 왔던 아랍의 경우 석유민족주의라고 할 정도로 자기나라의 부를 추구하고 세계경제에 파탄을 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결국엔 자기 나라도 못살게 되는 것입니다. 쌀 한 톨 안나는 나라에서 그러니 식량도 무기화해서 식량을 안주면 기름만 먹고 살 것인가? 결국 자기들도 못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자기의 능력을 충분히 개발해서 서로 하나가 되어 자유스럽게 유통시켜야 공존이 있고 공영이 있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내 나라가 흥하기 위해서 남의 나라의 정복을 불사하는 이러한 편협한 생각으로는 그 나라도 되지 않습니다.

  바꾸어 말을 하면 자기 나라를 지키지 못하면 그것도 세계의 변란을 가져오는 요인이 됩니다. 자기 나라가 흥하기 위해서 남의 나라를 치고 남의 나라의 경제적인 파탄은 고려치 않고 자기 나라의 경제적인 팽창만을 추구하는 것도 세계 평화를 깨뜨리고 마침내는 자기 국가마저도 위태롭게 하는 행위이지만, 반대로 자기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외국의 침략을 받거나 자기 나라의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구걸하는 상태의 국가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불안을 가져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도 조선조 말엽에 일본사람이 쳐들어 왔다고 그러지요. 침략주의적인 것이 나쁘긴 나쁘지요. 그렇지만 제 나라를 지키지 못한 것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변란을 자초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조선조 말엽에 우리가 우리나라를 스스로 지켰던들 오늘의 정세가 이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약해 보이니까 일본이 넘보고 러시아가 넘보고 해서 유사 이래 없었던, 나라를 빼앗긴 비참한 일이 생긴 것입니다.

  가정으로 보아선 가정이 한 덩어리이고, 기업으로 보아선 근로자와 기업주가 한 덩어리이고, 국가로 보아선 그 안에 있는 모든 계층의 사람이 한 덩어리인 것처럼 세계도 그 안의 모든 국가가 한 덩어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질서를 무시하고 세계공영을 무시하고 일방적인 팽창과 부강을 추구하는 것은 세계질서를 깨뜨릴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 스스로도 유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살펴야 하겠습니다.

  공만(公慢)을 가져라

  '사람이란 것은 아만심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아만심을 버려야지 교만해서 되겠는가. 수행인 가운데 제일 나쁜 것이 교만한 것인데, 하심하고 겸손한 게 제일이다.'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러나 공만(公慢)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공만의 경우 가정으로 볼 때, 내 집안은 내가 잘 해야지 내가 잘못하면 집안이 망한다. 내 집의 흥망은 내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집안에서 그러한 마음을 가지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그 집안에서 훌륭한 사람입니다.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에 있는 한사람 한사람, 위로는 사장으로부터 그 회사의 모든 사람이 각각 내 직장은 내가 지킨다. 내가 마음 먹고 그러한 긍지와 자존심을 가지고 즉 공만을 가지고 일을 하면 그 회사가 잘 됩니다. 이러한 자세의 총화가 회사 전체의 향상에 기여하고 그 내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이익을 가져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 국가는 바로 내 생명이고 나에 의해서 움직여진다. 국가는 나 하기에 달려있다 라고 하는 공만을 가질 때 훌륭한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진정한 국민이요, 애국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운명은 내게 달려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잠시도 소홀하지 아니하고 주체적인 공만을 갖고 업무에 임하면 그것이 곧 최선의 애국의 길인 것입니다. 남이 대우를 해주든지 말든지, 알아 주든지 말든지 그런 것은 관계가 없습니다. 오직 내가 일을 아니 하면 안된다는 그런 마음만 갖고 열심히 하는 것이 애국이요, 진정한 공만이요, 또 올바른 불자의 자세이고 정신입니다. 안중근 의사같은 분은 '내 국가, 내 민족 이것이 내 생명이다'라고 말하며 국가일신, 민족일신을 구현하신 분입니다.

  부처님은 어떤 분이신가? 진리를 단위로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인류를 초월하시고, 육도중생을 초월하시고, 온 법계를 초월하시어서 진리 자체를 자기로 삼으신 분입니다. 내가 진리고 진리가 바로 나인 것입니다. 진리로 당신을 삼아 일체 중생을 건지시기 위해서 가지가지의 방편을 나투셨습니다. 혹은 부처님의 몸으로, 혹은 아수라의 몸으로, 혹은 중생의 모습을 나투시면서 중생계를 제도하십니다. 부처님은 곧 진리이시므로. 佛光

이 글은 불광법회에서 행하신 법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문책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