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여사의 부끄러움

연작소설

2007-07-17     관리자

  스님들의 법의(法衣)인 가사는 불법의 상징으로서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착용하신 법복입니다.

  가사불사의 발원문을 읽고 있던 강여사는 알 수 없는 신성한 기운이 가슴 속에 차오르는 것 같아서 가만히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구름 누각에 둘러 앉아서 법문을 듣고 계실 천상의 불보살님들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르는 것 같고, 그 불보살님들도 지상의 스님들이 입고 계신 법의(法衣)를 그대로 입고 계실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강여사는 형언할 수 없는 환희심이 느껴지면서 자신도 가사불사에 동참하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이 일었다. 그래서 강여사는 읽고 있던 발원문을 들고 시어머니 방으로 건너갔다. 우선 시어머니한테 허락을 받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집을 비우면 어쩔 수 없이 시어머니가 집안 일을 돌보셔야 하기 때문에 강여사는 집을 비울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시어머니한테 허락을 받고자 했다.

  "어머니 저 내일 절에 좀 갔다 오겠어요."

  강여사는 시어머니 앞에 앉으며 용건을 말했다.

  "어느 절엘?"

  울긋불긋한 화투짝을 앞에 펴놓고 앉아서 화투패를 떼고 있던 시어머니가 고개를 들며 며느리를 쳐다봤다.

  지난 겨울 외출을 하다가 빙판에 넘어져서 손목을 다친 시어머니는 손이 뻣뻣하게 굳어진다고 하면서 손운동 삼아, 심심풀이 놀이 삼아 늘 화투패를 떼면서 소일하고 있었다.

  "제가 다니는 절에요."

  "그럼 당일로 오지 못하잖냐?"

  "네, 아무래도 하룻밤을 자야할 것 같아요."

  "절에 무슨 일이 있냐?"

  "가사불사가 있대요. 그래서 갈려고요."

  강여사는 들고 온 가사불사 발원문을 시어머니 앞에 펴보이며 말했다.

  "가고 싶으면 갔다오려므나."

  시어머니는 다시 화투장을 집어들며 갔다 와도 좋다는 허락을 해 주었다. 평소 사리에 어긋나지 않게 처신하는 며느리에 대한 신뢰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고부간이란 그저 서로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 상책이라는 걸 시어머니도 알고 있는 듯 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강여사는 시어머니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절에 간다는 일이 기정사실로 된 것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그날 강여사는 시장에 가서 동태 세 마리를 떠다가 전을 부치고 고추하고 멸치도 볶도 그리고 열무를 손질해서 물김치도 새로 담궜다. 자신이 집을 비우는 동안 가족들한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강여사가 바쁘게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남편이 돌아왔다. 그는 신발을 벗고 현관으로 올라서려다가 부엌을 들여다 보며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이야? 아직까지 부엌에 있게"

  전 부치는 기름냄새가 집안에 가득차기도 했지만 밤 10시가 되도록 앞치마 입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아내가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네, 무슨 날이예요."

  강여사는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등으로 쓸어올리며 남편을 쳐다봤다.

  "무슨 날인데?"

  "부인 여행 준비하는 날이요."

  "어느 집 부인인가? 우리집 부인은 여행같은 건 안 하는데..."

  남편은 시침을 떼며 안으로 들어갔다. 강여사는 그런 남편의 뒷모습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다가 부지런히 저녁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어머니 다녀 왔습니다."

  남편은 어머니 방문을 열고 자신이 다녀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오냐, 어서 저녁 먹어라."

  강여사는 두 모자가 나누는 인사말을 들으며 차려놓은 밥상을 들고 안방으로 갔다.

  "저 내일 절에 갔다가 모레 올께요."

  강여사는 남편을 쳐다보며 정식으로 허락을 구했다.

  "절엔 왜?"

  "모레 가사불사가 있대요. 한 번 동참해 보고 싶어서요."

  "당신은 나보다 부처님을 더 사랑하는 모양이군. 절에서 하는 일이라면 열 일 제쳐놓고 가려고 하는 걸 보면.."

  남편은 불만을 표시했지만 그 불만속에 허락의 뜻이 포함돼 있었다.

  이튿날 아침 아이들과 남편을 다 보내고 난 강여사는 설겆이와 집안 청소를 끝낸 후 집을 나섰다. 잡다한 일상에서 벗어나 혼자 여행을 한다는 것은 신선한 해방감을 느끼게 했고 그 해방감 속에서 강여사는 비로소 자신의 실체를 돌아다 볼 수 있었다.

  차창에 기대 앉아서 스쳐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이미 중년의 문턱에 깊숙히 들어가 있었다.

  가슴을 조이며, 종종걸음을 치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왔지만 그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자신의 몫으로 돌아온 것은 과연 무엇인지 강여사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에게 가장 분명하게 인식되어지는 것은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 뿐이었고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삶 안에는 별다른 의미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산다는 것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생존만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고달픈 의식작용은 무엇때문에 인간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인지... 강여사로서는 막막하기만 했다.

  강여사가 절에 도착한 것은 저녁 5시쯤 돼서였다. 계곡으로 이어지는 숲길을 얼마간 오르자 해탈교(解脫橋)라고 쓴 조그만 화강암 다리가 나왔다. 강여사는 걸음을 멈추고 다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이 다리 건너에서 공부하고 있는 스님들은 해탈에 이른다는 뜻인지, 아니면 이 다리를 건너는 사람은 적어도 해탈에 대한 의지만은 가져야 한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강여사로서도 다리를 건너는 순간 속세에서 입고 온 누더기 하나쯤은 벗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계곡 사이로는 맑은 물이 콸콸 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있었고 오솔길 옆으로는 아름드리 나무가 하늘을 덮고 있었다. 다람쥐, 족제비, 새, 풀꽃, 산개구리까지 어울려 있는 숲은 교향곡의 화음같은 운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숲길을 오르고 있는 강여사 마음은 맑은 물에 씻기운 것처럼 깨끗해 졌고 그런 강여사는 누구를 향해서도 미소를 짓고 싶은 여유마저 생겨났다.

  흔히들 절이 깊은 산에 위치해 있다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지만 강여사로서는 오히려 절이 깊은 산에 있다는 것에 대해 고마움이 느껴졌고 깊은 산에 있는 절을 지키고 계신 스님들에 대해서도 고마움이 느껴졌다.

  물론 강여사로서도 포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포교 못지않게 산사(山寺)가 주는 교화의 힘도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여사가 법당 뜰에 들어섰을 때 사미스님이 반기며 강여사를 요사채 빈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방에 들어간 강여사는 방이 청소돼 있지 않았음을 알고 걸레와 빗자루를 찾아서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벽장문을 열고 빗자루를 들여 놓으려다가 이불을 발견하곤 캐시미론 이불을 내려 속을 살펴보았다. 이불에는 예상했던 대로 긴 머리카락이 여러 개 붙어 있었다.

  강여사는 이불 앞 · 뒤를 뒤적이며 머리카락을 한 움큼이라면 좀 과장이지만 거의 한 움큼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이 떼서 쓰레기 통 속에 버리고는 세면실로 갔다. 세면실에서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한 후 저녁공양을 든 강여사는 법당으로 들어갔다.

  법당 안에는 이미 가사불사에 동참하기 위해 모여온 신도들이 빽빽하게 들어서서 예불을 드리고 있었다.

  산사(山寺)에 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산사(山寺)에서 하룻밤 묵어간다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강여사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자정까지 법당에서 기도를 드렸다. 그러던 그녀는 자정이 훨씬 지났을 때 법당에서 나와 요사채로 갔다. 달빛은 고요히 경내를 감쌌고 먼 산 어디에선가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강여사는 기도를 드린 후에 오는 환희심과, 깊은 밤 산사(山寺) 특유의 정취에 취하여 조심조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요사채 안으로 들어간 그녀가 숙소로 정한 방문 앞에 이르러 문을 열었을 때 방 안에는 얼굴도 알 수 없는 보살들이 누워서 자고 있었다. 보살들의 잠든 얼굴을 보는 순간 강여사 머리 속에는 자신이 방안을 청소했던 일과 이불에 붙은 머리카락을 한 움큼이나 떼어내던 일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 가면서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방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고는 "이 이불을 덮고 주무시면 어떻게 해요."하며 자신이 손질한 이불을 덮고 자는 보살한테 항의를 했다.

  그러자 보살은 갑자기 밝아진 불빛에 눈이 부신 듯

  "이불은 벽장 안에 또 있어요."하며 도로 돌아 누웠다.

  강여사는 찡그린 얼굴로 그 보살을 내려다 보다가 할 수 없이 불을 끄고 빈자리에 가 누웠다. 하지만 가슴 속에선 여전히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면서 심사가 편치않아 뒤로 돌아 누우려고 몸을 돌렸다.

  그때 뒷문 창호지 위로 환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이 보였다. 달빛을 보는 순간 강여사는 자기 자신이 갑자기 부끄러워져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아,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깊은 골이 패어져 있는 것인가!' 佛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