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多聞)제일 아난다존자

부처님과 聖제자들

2007-07-17     관리자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아난다는 제일 오래 부처님을 모시고 있으면서 설법을 가장 많이 들었으며, 또 한 번 들은 것은 결코 잊지 않는 총기가 있어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고 한다.

  '환희' '경희(慶喜)' 또는 '무염(無染)'이라고 번역되는 아난다(Ananda, 阿難, 혹은 阿難陀)는 부처님과는 사촌간이며, 부처님의 숙부인 슈크로다나왕(백반왕)의 아들이며, 데바닷다의 친동생이었다.

  생김새가 단정하고 얼굴은 둥근 달과 같으며 눈은 쳥련화와 같았고,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잘 생겼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다정한 성품을 가진 아난다는 동진출가(아주 어린 나이에 출가)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고향에 돌아와 왕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법을 설하자, 부처님의 위의(威儀)에 감동을 받은 아난다는 아누룻다, 라훌라, 데바닷다 등 샤카족의 7왕자와 함께 출가했던 것이다.

  일찌기 출가하여 수행하면서 불교 교단내에 많은 공적을 남기고 있는 아난다의 전기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십여 년간 부처님을 모시며 시봉한 일, 둘째는 부처님의 이모인 마하파자파티의 출가를 도와 비구니 교단을 형성케 한 일, 그리고 세째는 부처님의 말씀을 경전으로 편찬(제1결집)하는데 있어 빠져서는 안 될 그의 공적이다.

  20여년 간 부처님을 모시며 시봉하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시어 부처가 되신 지 어언 20여년이 지났고 세속의 나이로는 쉰이 넘으셨다. 그 동안에는 사리불, 목건련, 가섭 등 여러 제자들이 그때 그때 시중을 들어 드렸지만 이제 차차 늙어가심에 누군가가 늘 곁에서 시중을 들어야 했다.부처님께서는 왕사성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도 이제는 늙었다. 옆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이 한 사람쯤 있었으면 싶다. 너희들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추천해 주기 바란다."

  이때 맨처음으로 제자가 된 교진여와 4~5명의 비구가 자원하였으나 모두가 나이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러자 부처님의 참뜻을 헤아린 목건련이 아난다를 추천했다.

  아난다는 부처님을 늘 곁에서 모셔야 하는 어려움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했다. 항상 부처님의 신변을 보살펴 드리고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실 때에는 그 대요를 기억해 두어야만 했다. 그것은 명예로운 일이기는 하지만 과연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일종의 불안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러 장로들이 거듭 당부를 하자 3가지의 조건을 내놓았다.

  "제가 부처님을 모시되 첫째는 부처님이 입으시던 옷은 새 것이든 헌 것이든 절대로 제가 입지 않겠습니다. 둘째, 부처님께서 신도의 집으로 공양초청을 받고 가실 때는 결코 따라가지 않겠습니다. 세째,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부처님 곁에 있지 않겠습니다."

  목건련이 아난다의 이야기를 그대로 부처님께 전하자 부처님께서는 기쁘게 말씀하셨다.

  "아난다는 참으로 현명하다. 그는 시끄러운 문제를 미리 예방하고 있다. 비구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아난다가 옷 때문에 붓다를 시봉한다고 할 것이다. 또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하여 시봉한다고 할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비구들이 어느 때 여래를 만나는 것이 좋은가를 알고 있다. 또 신도와 이교도가 여래를 만나기 위하여 어느 곳을 찾아가는 것이 좋은지를 알고 있다. 여래가 식사를 마치고 안온하게 있는지를 살피고 여래가 설법하기에 적당한 시기가 어느 때인가를 알고 있다. 아난다는 현명한 비구이다."

  부처님께서는 아난다가 내놓은 세 가지 조건을 받아들이시고 그를 시자로 삼으셨다.

  아난다가 시자가 되었을 때의 나이는 겨우 20세였다. 비록 나이가 젊기는 하였으나 그 인격이 원만하고 겸허하였으며, 실제로 아난다는 부처님의 기분과 심경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항상 근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결코 게으르거나 싫증내지 않았고 불평스런 태도를 보인 일이 없었다. 특히 그는 설법을 듣는 데는 남다른 열성이 있었다.

  한 번은 아난다가 등창을 앓게 되어 부처님은 유명한 의사인 지바에게 치료를 부탁하였다. 지바는 "이 종기는 수술해야 합니다. 무척 아플 것이므로 그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을 때가 아니면 어렵습니다"고 하였다.

  다음 날 아침 아난다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을 때 등의 종기를 째는 대수술을 하였다. 그런데 그는 전혀 아픔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고통이 없었느냐고 묻자 아난다는 "부처님이시여!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때는 옴 몸이 부서진다 하여도 조금도 아픈 줄을 모릅니다."고 대답하였다. 그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모두 기억하여 다문제일(多聞第一)이 된 이유가 여기에도 있지 않을까.

  아무튼 우리는 불교경전의 여기저기에서 아난다의 이름을 곧잘 볼 수가 있다. 불전에 그 이름이 나온 횟수는 아마 십대제자들 가운데 가장 많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까지 그림자처럼 부처님을 따르며 시자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출가를 도와 비구니 교단을 형성하다

  또한 아난다는 부처님의 이모인 마하파자파티의 출가를 돕고 여인들의 출가를 위해 애썼다.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가 날로 늘고, 사회의 많은 지식인들이 부처님의 사상에 감명을 받고 부처님을 따르게 되자 교단은 하루가 다르게 번성해 갔으나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여인들에게는 출가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데 최초로 여성으로서 출가를 허락받은 것은 아난다의 도움을 받은 마하파자파티 부인이었다.

  부처님의 이모이자, 부처님을 낳고 이레만에 돌아가신 마야부인의 뒤를 이어 부처님을 양육해 주었던 마하파자파티 부인은 쓸쓸하고 마음에 의지할 사람도 없이 서글픈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궁에 있던 젊은 왕자들이 모두 부처님을 따라 출가했고, 자신이 낳은 부처님의 배다른 동생 난다마저 출가했을 뿐만 아니라, 왕손인 라훌라도 출가하고 숫도다나왕도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글프고 쓸쓸한 나날을 보내던 중 마침내 출가할 것을 결심하고, 부처님께 이 뜻을 아뢰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여자가 출가해서 비구들과 같이 생활하게 되면 깨끗한 계율이 지켜지기 어렵고 승가의 질서를 유지하기가 어려울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이었다.

  부처님이 출가하시기 전의 태자비였던 야쇼다라 부인을 비롯한 왕족 여인 오백 인이 출가하기로 결심하고 카필라성을 떠나 멀리 베살리성에 계신 부처님을 찾아가 거듭 세 번씩이나 간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마하파자파티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며칠 뒤 스스로 머리를 깎은 다음 비단옷 대신 누더기를 걸치고 맨발로 부처님의 가신 길을 뒤따랐다. 발은 돌부리에 채여 피가 흘렀다.

  이 광경을 본 아난다는 한 편 놀라고 또 한 편 측은하여 마음이 아팠다. 아난다는 마하파자파티 왕비가 어린 태자를 키우느라 애썼던 과거를 회상시키면서 부처님께 여성의 출가를 간청하였다.

  "부처님이시여, 마하파자파티 부인은 부처님의 이모이시며, 부처님을 양육해주신 분이며 다른 오백 인들도 지난날 부처님을 섬겼던 야쇼다라를 비롯한 샤카족의 귀족들일 뿐 아니라 지극한 마음으로 법을 배우고자 먼 길을 찾아왔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만일 여성일지라도 출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에 힘쓴다면 수행의 성과를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침묵을 깨고 대답하셨다.

  "그렇다, 아난다여, 여인도 이 법에 귀의하여 지성으로 수행하면 성과(聖果)를 얻을 수 있다."

  부처님 말씀에 용기를 얻은 아난다는 다시 마하파자파티의 출가를 간청하였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내가 여인들에게 출가를 허락하지 않는 것은 여인들에게는 본래 허영심과 교만한 마음이 많을 뿐 아니라 음란하기 쉬워 청정한 교단의 계율이 무너지고 질서가 어지러워질까 걱정이 되어서다. 그러나 그들의 뜻이 그러하고 너의 간청이 지극하다고 생각되어 여성들의 출가를 하락한다. 그러나 승가의 규율을 더욱 엄히 할 것이며, 수행에 조금도 게으름이 없도록 하라."

  부처님의 허락 말씀을 들은 아난다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예배를 드리고 물러 나와서 이 기쁜 소식을 마하파자파티를 비롯한 오백 인의 여인들에게 전해 주었다.

  이로써 불교교단에 비로소 비구니가 생겼으며 오늘날까지도 비구니 제도가 전해져 오게된 것이다.

  여인들의 유혹에 시달리다

  아난다는 부처님의 시자로 있으면서 이렇게 부처님께 간청하여 여성출가를 인정케 했을 뿐만 아니라 출가하지 않은 신도들에게나 심지어 외도들에게까지도 그 명성과 신망이 두터웠으며,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교단의 장로들 못지 않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부처님을 비방하는 무리들에게 정연한 논리로 불법을 설하여 부처님께 귀의시켰으며, 환속했던 굴타비구를 다시 교단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또한 승단의 불화를 육화(六和, 여섯 가지 화합하는 길, 본래는 보살이 중생과 서로 화합하는 여섯 가지를 일컬으며 1. 같은 계품을 지니고 서로 아끼고 공경하며 2. 견해를 같이 하고 3. 같이 행하고 4. 몸으로 자비를 행하고 5. 입으로 자비를 행하고 6. 뜻으로 자비를 행함으로써 화합함)의 정신으로 화합하게 하였다.

  고귀한 왕족 출신이며 본래 우아하고 총명한데다가 부처님의 법에 따라 수행을 했기 때문에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모두 거룩할 정도로 세련되었던 아난다는 여난(女難)에 시달리기도 했다. 불전(佛典)의 여기저기에 보여지는 얘기들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마탕기(摩登祈)의 유혹' 이야기이다.

  어느날 아난다는 발우를 들고 스라바스티 거리로 나가 탁발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마을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는 노예 계급의 처녀를 만났다. 마침 목이 말랐던 아난다는 가까이 다가가서

  "물 한 그릇만 주시오."하고 청하자, "존자님, 물 한 그릇 드리기는 어렵지 않사오나, 저같은 천한 계집이 어찌 귀하신 분께 가까이 가서 물 공양을 드리겠습니까?"

  네 계급이 뚜렷했던 당시의 인도 실정으로는 당연한 일이었으나 아난다는 서슴없이,

  "나는 출가하여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비구입니다. 부처님 법에 따르면 신분에는 상하귀천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평등하여 차별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마탕기는 바가지를 헹구고 정성껏 물을 떠서 바쳤다. 공손히 합장을 하고 물을 받아 마신 아난다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발길을 옮겼다.

  그런 일이 있던 그날부터 그 여인의 마음 속에는 고귀하고 자애로우며 빼어난 아난다의 용모가 마음속 깊이 새겨져 마침내 간절한 그리움이 되어 짝사랑을 하게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