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불교의 가늠길

권두수상

2007-07-16     관리자

   하마 20여년 전의 일이다. 해남 대흥사에 전해 오던 귀한 서첩이 저자에 나와 이목을 끌었었다. 그 내용은 거의가 완당(阮堂 : 金正喜)이 초의(草衣 : 長意恂)스님에게 써보낸 글인데, 그 글씨야 새삼 용훼의 나위도 없지만 그 꾸밈새가 하도 정갈스러워서 첫눈에 초의스님의 손때가 묻었음을 짐작케 했었다.
   그 속에서는 “도는 받는 것이지 전할 수는 없다”는≪초사≫〈장유(壯遊)〉편의 대문이라든가, 원(元)의 산수화의대가 곽희(郭熙)와 소나기 그림으로 유명한 이성(李成)에 관한 대련이 그야말로 값져 군침을 절로 삼켰었다.
   더욱이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초의스님에의 사시(私諡)대각보제존자(大覺普薺尊者)였다. 정녕 희한한 일품이었다.
   큰 깨우침에는 워낙 잗달은 껄끄러움과 자자분한 부끄러움도 없는 법이니 오로지 불법의 깃대를 우뚝 세우고 어서 속히 법계에 올라서 크게 종풍을 불러일으켜 8도의 승속을 바로잡을 일뿐이다. 다른 데는 눈을 돌릴 겨를이 없으니 빨리 율령대로 거행할지어다(원문은 생략)
실로 도타운 거사다운 당부였다.
   승유정책으로 말미암아 가뜩이나 낮보던 승가였는데 차마 현상유지를 위한 빌붙음이 매양 싫었던 완당이었다. 따라서 시문은 물론 계율 또한 엄전한 초의스님에 빌붙는 신심이 글자 밖에 사무쳐 있어 어지럽던 당시의 승속을 거울처럼 반사하는 빛저운 사시였다.
   물론 사시는 예로부터 있었으나 허균(許筠)이 사명대사에 드린 사시도 있다. 위의 완당의 사시는 아마 동정속에 접어서 쓴 듯하다. 더구나 끝에는 완당의 자(字)인 원춘(元春)과 생장한 곳인 용산(龍山) 예당(禮堂)의 6자를 합쳐 하나로 꾸민 수결이 놓여 있어 멋졌다.
   이 완당의 사시는 그 내용이 어수선한 오늘을 사는 우리 불교계에 하도 적절한 사연이어서 굳이 앞세웠다.
   사실 나라의 안팎이 매우 어지러운 오늘이다. 민주화의 밀물이 사회 각 부문에 밀어 닥쳐 자못 걷잡을 수 없는 사단이다. 북방정책의 나사가 풀려 덧없는 밀입북자로 해서 법석이다. 그런가 하면 노사분규로 경제가 흔들리고 기성을 불신하는 전대협의 아우성에다 교원노조로 말미암은 대립의 소용돌이에서 올림픽 이후 선진공업국가에로의 발돋음에 제동이 걸려 그야말로 아찔하다.
   분명 내가 있은 뒤에 남이지만 나와 남이 더불어 누리는 민주사회를 위해 내남없이 누을 자리부터 살피고 발을 뻗어야 옳은데 발부터 뻗으니까 문제가 덮친다. 억지와 트집은 받자하는 상대가 있어야 씨가 먹히는 법이다.
   우리 불교계라고 예외일 순 없다. 정화 이후 많은 자리바꿈을 해서 적지 않은 발전을 가져왔지만 그것이 배를 주고 배속을 빌지 않았냐는 비양도 없지 않으니 문제다. 이른바 겉치레가 실속과 상반됐으면 오죽 좋았을까에 상도할 때 우연하시는 부처님 뵙기가 남세스럽기 그지없다. 딴은 늦게나마 불교방송국이 발족되고 불교병원의 설립이 거론되고 있다. 실로 반가운 쾌사가 분명하다.
   그러나 급변하고 있는 세태에 상응하는 종풍의 쇄신이 급선무라고 본다. 구태의연은 제자리걸음일 따름이다. 구태여 하이테크를 드세우지 않아도 우선 펄럭거려 거추장스런 오지랖부터 여며야 하겠다. 참다 못한 승가대가 혁신을 주창하고 대불련이 개혁의 깃발을 곤두세우지만 해묵은 전통의 물림상은 좀처럼 용납의 기미가 부실해 탈이다. 외치는 언동에 비겨 실천이 못따라 승복이 안돼서다. 모름지기 딱한 현상이다.
   흔히 강요는 의무를 개갠다고 하는데 실세를 따지는 오늘 무작정 참고 기다리기에는 발등의 불똥이 너무 따갑다. 과시는 예도에 어긋난다지만 앞에 제시한 완당의 말대로 종풍의 광정을 위해서는 어차피 겪어야 하는 개신의 파동이니 사소한 망설임은 아예 금물이다.
우리는 승주의 송광사를 꼽고 문경의 봉암사를 과한다. 그리고 법주사의 미륵대불과 석굴암의 대종을 자랑한다. 그러나 어쩌다 새벽 예불에 동참하다 보면 그 큰 법당에 10여명의 도반이 경배를 올리는 것을 보면 무엇인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고 본다.
   섣불리 산간불교와 기복불교를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거기에 맞춘 시정불교의 실효를 진작 다잡아야 했다. 대중의 중이요 중생의 중인데 아무리 포장을 했다 해도 후미진 산골에 앉아서 포교를 꾀하는 사태는 결국 관광장소로 둔갑시키고 말았으니 생각사록 한심한 작태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명산대찰을 찾노라면 인파는 들끓어 발을 옮길 수도 없는 판인데 법당은 썰렁한 현상을 빚고 말았으니 대체 이것이 어디에 기인한 인과인가를 곰곰 명심하고, 부추기는 민주화와 자유화에 앞선 자아반성이 선결문제라고 본다. 비단 이교의 대중에의 영합과 눈부신 침투를 시새워서가 아니라, 그들은 마을마다 파고 들어 교세를 확장하기에 하루가 바쁜데 우리는 여의도 광장도 메꾸지 못하는 우리 불자의 최대명절인 부처님오신날의 봉축행사를 치러야 하니, 글쎄 이것이 무슨 탓이냐 말이다.
   은은한 쇠북의 메아리는 우리의 사상감정을 바로잡아 동방의 불토를 일구어 자아완성과 중생제도의 거룩을 삼천리에 심었다. 그래서 그 모진 숭유배불의 서슬에서도 굳건히 버틴 불교다. 거추장스런 법복을 탓하고 머리와 신발이 비아냥의 대상이라지만, 문제는 전통의 굴레를 벗어 탈바꿈하는 슬기도 누구에 못지 않은 우리 불교다. 가부앉음의 참선이 계율을 지키는 으뜸의 수행이자 헝클어지는 심상을 가라앉히는 가장 오롯한 방법이지만 그렇다고 이 급변하는 세태에 면벽하고 앉았으라면 행자가 아닌 이상 어려운 하임이다. 따라서 참선을 일반에 맞게 대중화하고 예불 또한 현실화하는 과단이 아쉽다. 듣건대 총무원에서는 복제와 의식의 개혁을 위한 갖가지 모임이 있어 종회에 회부되기 전에 사부대중의 공청회까지 마련하고 있단다. 백번 반가운 소문이다.
   종풍을 쇄신하는 길은 졸연친 않다. 허물을 벗는데는 그만한 진통이 곁따라야 한다. 그렇다고 후진(後塵)이나 쏘이는 불교가 아님은 역사가 입증한다. 비근한 보기로 ‘삼귀의’나 ‘사홍서원’을 우리말로 고치는 데도 많은 장애가 있었다. 저마다 방하착(放下著)을 외치면서도 그 때를 벗는 아쉬움의 미련이 거세다. 그래도 일단 결정이 되니 일율로 따른 우리 불교다. 그러나 그렇게 소망하는 「반야심경」은 여전히 한문으로 봉송하니 알다가도 모를 불가사의다.
   대중불교의 가늠길은 생활불교 밀착에 있다. 온고지신의 장엄 아래 실제 사회생활과 부합되는 자리행(自利行) 이타행(利他行)을 두루 함께 받들어 대중의 앞장을서는 불교가 되었으면 오죽 보람차겠냐 간구하면서 공손히 합장한다. 만해(卍海)스님의 <불교유신론>이 자꾸 훈수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