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미술의 이해] 굽타시대의 불상조각

2007-07-12     관리자

  굽타왕조의 시대적 상황

  미술사에 있어서 시대적 상황이 그대로 미술작품에 반영되는 것은 고대나 현대나 변함이 없는 사실이다. 서력 기원전후 불교 교단이 서서히 정리되는데, 기원전 100년 경에는 소승 여러 부파의 분열이 끝나고, 산치 바르후트의 불탑이 건립되면서 불교미술도 성황을 이루며, 서데칸의 석굴사원 굴착이 시작되고 있다. 1세기 초엽에 대중불교 운동이 성해지면서 초기 대승경전이 편찬되고, 간다라와 마투라 양대지역을 중심으로한 불교미술(불상)이 대승불교운동과 더불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 후 2세기 중엽에는 아마라바티에서 불교미술이 흥왕을 이루며, 3세기 전반에는 쿠샨왕조가 쇠퇴하면서 이크쉬바쿠 왕조가 일어나서 나가르주나콘다에서 불교미술이 성황을 이루었다.

  4세기 초에 시작되는 굽타왕조는 전 불교 미술사에서 가장 신비로운 이상미(理想美)의 꽃을 피운 시대로 인도미술의 고전시대라 불리어진다. 굽타시대는 320년부터 650년경으로 보지만, 미술사에서의 굽타양식은 1세기를 더 연장하여 750년경까지로 본다.

  인도라는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고, 그 정신의 길이를 잴 수 없는 고도의 정신문화를 가졌건만, 역사서술에는 무관심한 듯한데 그것은 시간을 초월하여 더 깊은 정신의 세계에 침잠한 것처럼 보인다. 현실에 대한 무관심이 결국 초월적인 세계관을 낳고 거기에 삶의 방향을 설정한 것처럼 보인다.

  서북인도를 중심으로 대제국을 건설한 쿠샨왕조는 3세기 중엽에 그 세력을 잃고, 중인도는 각 지방마다 소왕국 형태로 분립(分立)되었다가 마가다국 찬드라 굽타 1세(candragupta Ⅰ: 320-335)가 나타나서 갠지스강 중하류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공식적인 굽타왕조가 출범을 하게 된다. 그 다음 삼드라 굽타(Samudragupta. 335-373), 찬드라굽타 Ⅱ세(Candragupta Ⅱ, 375-414)대는 더욱 그 세력이 확대되어 동에는 벵갈만, 서로는 아라비아해, 남으로는 크리쉬나강, 북으로는 히말라야 산맥에 이르기까지 아쇼카대왕이 차지했던 대부분 지역을 굽타 세력권에 두게 된다(지도참조). 이러한 광대한 영토확보와 더불어 문화 발전에도 큰 발전이 있어 인도문화에서 황금의 시대로 불리우는 문예부흥의 시대를 창출한다. 굽타왕조의 역대 왕들은 천하를 평정했던 무인이면서 문예에도 정통한 국왕들이었다. 안정된 정국과 더불어 황실의 문예진흥책 속에 문화는 백화가 난만하듯 꽃피면서 예술과 학문의 세계는 더욱 풍성해졌다. 안정과 풍요 속에 문예진흥의 기운은 무르익어, 쿠마라 굽타왕(Kumara guptaⅠ 415-454)시대에는 나란다(Naranda) 사원을 창건하여 학문연구의 중심지로서 후일 현장(玄裝)스님, 의정(義淨)스님 등 수많은 유학승들이 이곳에서 수학하였다<법현(法顯)스님이 인도에 수학했던 시기는 405-411 찬드라굽타 2세 통치시절이다>. 이곳에서 연구하였던 학문은 불교이외 다른 사상이나 기술까지 연구하는 종합대학의 기능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간과할 수 없었던 점은 굽타왕조 이전의 문화적 성향은 끊임없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외래문화의 영향이 컸었던 전(前)시대에 비해, 굽타(Gupta) 왕조의 순인도적 문화성향으로 강한 자부심과 공감을 가지면서 세련된 인도적인 문화를 창출한다. 이는 굽타왕조가 인도 전지역을 통해서 보수성이 강한 중인도를 근거로 일어났기 때문에 인도 자생적인 문화에 깊은 애착과 함께 문화적 성향이 인도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종교 사상사적 측면에서 굽타왕조의 왕들은 힌두교를 신봉하여 베다 성전에 대한 가치만이 새로이 인식되어지고 힌두 의례도 재정립되었다. 이는 전통적인 힌두정신을 부활시켜 일반 민중사회에 파고 들어 힌두적 세계관과 인생관이 새롭고 확실한 모습으로 정착되어 갔던 것이다. 이는 후일 불교가 힌두교 속에 흡수되는 과정에 그 복선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 힌두문화의 난만한 전개와 더불어 불교문화도 꽃을 피운다. 그리고 서부인도를 중심으로 한 대승사상이 굽타왕조의 중심부에도 영향을 미쳐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이웃하면서, 대승불교는 만신전(萬神殿)을 가진 일신론(一神論)적 성격을 띠기 시작하고 복잡한 마술적(魔術的) 의식 속에 힌두의 영향이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미 쿠샨왕조 후기로부터 간다라 불상양식과 마투라 불상양식이 상호영향 속에 있던 시기에 마투라불은 점차 간다라불의 조형성을 소화 흡수하는 현상을 보이다가 드디어 굽타 전성기에는 마투라불의 조형적 전통을 근간으로 해서 순인도적인 취향의 양식의 통일을 낳게 된다.

  굽타불의 양식적 특징

  세계 종교미술사에서 가장 신비롭고 장엄한 형상이라 할 수 있는 굽타불들은 초기 불상에서와 같이 붓다의 형상화에 머무르지 아니하고--초기 불상은 역사적 인물로서 붓다의 모습이 형상화된 것으로 과거생에 보살로서 인욕행을 하실 때에서부터 현세에 정각을 이루어 설법하시는 모습에 이르기까지--그 표현은 석존 중심이었다. 그러나 굽타왕조에 들어오면 역사적 인물로서 석존상과는 다른, 이상화된 불상들이 조성되어지는데, 이는 그 당시 불상조성의 교학적 전기라 할 수 있는 대승사상의 흥기와 함께 대승불교 불신관(佛身觀)에 의한 불상조성으로, 불타는 우주를 꿰뚫은 진실 그것도 객관적으로 추상화된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 숨쉬고 있는 인간존재를 관통하는 영원한 생명의 상징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굽타불은 앞서 지적한 것처럼 마투라불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간다라불의 조형성도 수용하여 전체적인 모습은 기품있고 완벽에 가깝게 정리되어 그 세련미가 극치에 이른 느낌이다. 불신(佛身)은 유연하면서도 양감이 있어 탄력적이며,얇은 법의를 통해서 느껴지는 불신은 신비감이 충만하다. 양감과 법의 주름의 선(線)적인 흐름 아래 감추어진 신체의 굴곡 등은 완만하여 선과 양감이 완벽하리만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양감이 넘치는 얼굴의 정제된 모습은 잘 생긴 인도의 귀공자 모습을 연상케 한다. 또한 부드럽고 탄력적인 신체 아래 영원한 생명력이 박동하는 청년의 모습에서 완벽한 고요함과 심오한 사색의 느낌이 법의의 옷주름을 타고 흘러오는 듯하다. 인도미술의 고전적 모습은 적정(靜)과 약동(動), 정신성과 세속성이 공존하는 것이라고 쿠마라스와미(Coomaraswamy, A.K)의 지적처럼, 깊이를 잴 수 없는 존재의 심연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이는 굽타불상의 깊은 선정에 잠긴 모습은-전체적인 균형과 조화가 빈틈이 없음을 발견한다. 헤어스타일에 있어서 나발과 육계는 분명한 형태로 정리되어 있고, 반개한 눈과,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표현되었고, 귀는 양식화가 심화되어 길게 늘어져 있건만 전체적인 균형은 깨뜨리지 아니하고 목은 굵으나 삼도(三道)가 있어 비대한 덩어리로 보이질 아니한다. 당당한 어깨나 균형잡힌 불신의 비례에서 건장한 청년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마투라불에서 볼 수 있던 얇은 법의와 간다라불의 통견의(通肩衣)의 모습이 함께 표현되어 있는 자태에서 신비로운 불신을 느끼게 한다. 반쯤 내리뜨고 있는 눈은 선정에 잠긴 모습으로 앞에서 기술한 것처럼 형상의 세계를 넘어 정신의 완벽성과 초월성으로 이끌어 가는 느낌을 갖게 한다. 불신의 전체에서 신비성 뿐만 아니라, 중인도 특유의 관능미도 살며시 감추어 놓고 있다.

  손과 발은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물갈퀴(手足網曼 猶如雁王: 손과 발에 물갈퀴가 기러기왕과 같다)가 표현되어 있어 간다라불의 영향이 잔존하고 있다. 그리고 후광의 표현은 화려하게 각종 무늬(연화문, 당초문, 연주문...등)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간다라불의 두광의 연고문(連孤文)에 비해 너무 화려하게 조각되어 광배로서 더할 나위 없는 형식을 본다.

  굽타불상은 대승불교을 바탕으로 하여 육감적이고 건장한 청년의 몸을 빌어, 영원한 정신성을 담아 고요하고 초연하며, 그리고 육신의 감각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영원의 생명력을 부각시켜 놓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구원의 실상을 밝혀 부처님의 절대의 세계를 느끼게 한다. 佛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