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벽화] 파주 보광사 대웅보전 연화화생도

극락정토를 보고 싶은 사람은 이곳을 찾아가라

2017-02-08     강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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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정토를 보고 싶은 사람은  이곳을 찾아가라

파주 보광사 대웅보전 연화화생도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란 속담이 있다. 범죄영화의 거래장면에서 “먼저 물건부터 봅시다.”란 대사가 늘 등장하는 이유는 믿음이 실물을 보는 것에서부터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는 것이 믿음의 세계와 곧장 연결되지는 않는다. 기존의 경험과 상식을 벗어나는 사건을 목도했을 때 우리는 종종 “보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이란 말을 쓰곤 한다. 믿음은 단순히 대상과 시선의 접촉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태에 대한 적합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인식체계 안에서 수용될 때 비로소 가능함을 말하는 것이다. 즉 ‘보고’, ‘이해하고’, ‘믿는다’는 일련의 과정이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서양 속담에 함축된 의미이다. 
 
불교는 어떨까? 『조당집』에는 석가모니에게 이웃종교 수행자가 찾아와 질문을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질문에 대답 없이 앉아만 있는 붓다를 향해 이웃종교의 수행자는 벌떡 일어나, 깨달음을 줘서 고맙다고 절하며 물러난다. 이를 본 아난이 붓다에게 묻는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붓다는 한마디를 남긴다. “훌륭한 말은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느니라.”
 
상근기는 보고 듣기 전에 믿으며, 중근기는 듣기만 해도 믿으며, 하근기는 보아야 비로소 믿는다. 물론 아무리 듣고 보아도 끝까지 믿지 못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불교에서 이들을 선근이 끊어진 자, 믿음이 없는 자, 붓다도 구제할 수 없는 일천제一闡提라 부른다. 자신이 이 가운데 어떤 근기에 속하는지 궁금한 이가 있다면 파주 보광사를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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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최배문
 
파주 보광사에는 연꽃이 핀다. 연지蓮池를 가득 메운 실제 연꽃이 아니라, 대웅보전 뒤편 나무판벽에서 세월을 견디며 조용히 피어난 연꽃이다. 보광사의 연꽃 그림을 ‘연화화생도蓮花化生圖’라 부르는데, 연화화생이란 말은 『법화경』이나 『무량수경』에 등장하는 용어로 죽은 이가 정토의 연꽃 속에서 홀연히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이다. 보광사 연화화생도에서 연꽃 속 생명이 태어나는 장소는 바로 아미타불이 있는 서방극락정토다.  
 
여기서 잠시 짚어보아야 할 것은 한국인들에게 불교와 동격으로 인식되는 연꽃이 불교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연꽃의 신성함은 고대 이집트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따』는 창조주 브라흐마가 연꽃 속에서 탄생했음을 기술한다. 연꽃이 지닌 풍요와 길상의 의미는 힌두교에서 풍요의 여신으로 받들어지는 락슈미Laks.mi가 서 있는 연화대나, 중국의 신선 가운데 유일한 여성인 하선고의 손에 들려 있는 연꽃에도 깃들어 있다. 연꽃이 지닌 재생과 부활의 모티프는 우리의 고전 소설에서도 등장하는데, 인당수에 빠져 죽은 심청이는 연꽃에 실려 환생하고, 억울한 죽임을 당한 장화, 홍련은 선녀가 내린 연꽃 두 송이의 태몽을 통해 다시 태어나게 된다. 연꽃과 연화화생이 지닌 문명사적 전통은 유구하고 폭넓은 것이다. 
 
연꽃이 불교를 대표하는 상징이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불교는 연꽃이 지닌 역사적 상징성을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존에 없던 의미를 연꽃에 부여했기 때문이다. 불교는 연꽃을 통찰과 수행의 대상으로 삼았다. 보광사 연화화생도의 갖은 연꽃들도 감상보다는 수행자의 마음으로 관조해야 하는 대상이다. 연화화생도가 수행도修行圖로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극락을 묘사한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가운데 특히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관무량수경』은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 무량수, 즉 아미타불이 있는 극락세계를 육신의 눈이 아닌 마음의 눈을 통해 바라보며 수행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경전이며, 여기서 제시된 관법이 16관법이다.  
경전 속 붓다는 극락을 보기 위한 첫 단계로 서쪽으로 지는 선명한 해를 마음으로 떠올려 해의 영상을 늘 마음속에 담아두는 관법을 제시한다. 누구나 실행할 수 있는 초보적인 수행의 단계로 흰 종이 한가운데 찍어둔 점을 마음속으로 떠올리며 그 점을 실제로 보는 듯 정신을 지속적으로 집중하는 것과 유사하다. 두 번째로 제시한 관법은 물의 투명함을 관하는 수행법이다. 형상이 또렷한 해에 비해 투명한 물을 관하는 수행법은 분명히 한 단계 높아진 수행법이다. 붓다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물을 통해 얼음을 바라보고 그 얼음을 통해 다시 유리로 된 땅을 관하라고 말한다. 이렇듯 파생된 관법은 극락의 나무, 연지, 보배궁전, 연꽃으로 이어지는데 그 묘사의 치밀성과 복잡성은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먼저 칠보로 된 땅 위에 피어 있는 연꽃을 생각하시오. 연꽃의 꽃잎마다 백 가지 보배의 빛깔이 있고, 그 꽃잎에는 8만4천 줄의 엽맥이 있는데, (중략) 연꽃에는 8만4천의 꽃잎이 있고, 꽃잎 사이마다 100억의 마니보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낱낱의 마니보주는 또한 1천의 광명을 발하여 (중략) 마니보주로 이루어진 연화대는 (중략) 500억의 미묘한 보배 구슬로 찬란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보배 구슬마다 8만4천의 광명이 빛나고, 그 낱낱의 광명은 또한 8만4천의 색다른 금색을 지니고 있는데, (중략) 이러한 것을 연화대를 관조觀照하는 화좌관華座觀이라 하고 일곱째 관觀이라고 말합니다.”
 
보광사 연화화생도 우측 상단에 솟은 거대한 연꽃은 바로 위의 내용을 그린 것인데, 경전의 묘사에 비해 턱없이 순박하고 부실한 그림에 웃음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컴퓨터그래픽이 고도로 발전한 오늘날에도 경전의 내용을 모두 담아 연꽃을 그려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경전에서 묘사한 연꽃은 실제 연꽃이 아닌 인간의 인식의 범위를 넘어선 무한을 상징하는 것으로 오직 마음으로만 보고 담아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경전은 극락의 무한함을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듯 환하고 분명하게 살펴볼 수 있을 때까지 마음을 집중하라고 요구한다. 경전에 제시된 순차적인 트레이닝을 통해 극락의 교주인 아미타불과 협시보살인 대세지와 관세음보살까지 관하게 되며, 최종적으로 극락에 왕생하는 상품상생부터 하품하생까지의 아홉 부류의 중생들이 연꽃에서 화생하는 모습까지 관찰하게 됨으로써 수행자의 마음속에는 극락정토가 완성된다. 『관무량수경』은 서방정토가 서쪽 10만억 국토를 지나서 있다는 『아미타경』의 구절과는 다르게 오직 마음속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넌지시 알려주는 것이다. 
 
“부인(위제희)은 잘 모르겠지만 아미타여래는 결코 멀리 계신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청정한 업으로 이루어진 저 극락정토를 자세히 관찰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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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광사 연화화생도를 볼 때마다 『관무량수경』의 복잡한 내용을 대웅보전 뒤편의 나무판벽에 천진스럽게 그려낸 화사의 배짱과 지혜에 경의를 표한다. 극락을 그림으로 그리고자 발심한 용기에 감탄하고, 무한의 세계를 한 칸짜리 판벽에 간결하게 담아낸 지혜에 또 탄복한다. 화사가 경전에 천착하면서도 경전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았음은 벽화의 과감한 생략과 자유분방한 구도에서 잘 드러난다. 화면 중앙을 채우는 9개의 커다란 연화대와 그 위에 각각 자리 잡은 불보살, 그리고 자그마한 연꽃 위에 올라 그들에게 예배하고 있는 화생자들의 모습에서 이곳이 극락 9품 연지임이 단박에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는 극락임을 알려주는 표지일 뿐, 경전에서 묘사한 9품 연지의 각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경전은 경전만의 길이 있고, 그림은 그림만의 길이 있으니, 극락이라는 느낌은 전달하되 굳이 자구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뜻이다. 
 
또 화사는 몇 가지 비틂과 변주를 통해 종교적 도상이 빠지기 쉬운 상투성을 피해나간다. 먼저 불보살이 앉은 연화대를 반듯하게 늘어놓지 않고 오선지 위의 악보마냥 들쑥날쑥하게 배치한 점이다. 이는 연화대가 마치 연지의 출렁이는 물결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면서 그림 전체에 자연스런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두 번째로 파격적인 불보살의 배치이다. 좌측 상단의 관세음보살과 좌측 하단의 대세지보살이 중앙의 아미타불과 함께 상하로 배치되어 있다. 두 보살이 늘 아미타불의 좌우에서 협시하는 모습만 보아온 이들에게는 의아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런데 찬찬히 살펴보면 불보살이 앉아 있는 방향은 정면이 아니라 각 연화대 좌측에 그려진 왕생자들 쪽임을 알 수 있다. ‘나’의 시선이 아닌, 왕생자의 시선으로 보면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두 보살이 협시한 기존의 구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화사는 불보살의 배치를 살짝 비틀면서 우리가 왕생 수행자로 동참해서 극락을 관하고 있는지, 단지 그림을 구경하는 관람객인지를 느닷없이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경전에 등장하지 않는 연엽화생蓮葉化生의 도상을 과감히 끌어들여 왕생자를 표현하고 있다. 연꽃에서 화생한 이들이 하나같이 꼿꼿한 자세로 앉아 불보살의 법문을 듣고 있는 반면 유독 연잎 위에 있는 몇몇은 잠든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관무량수경』에 의하면 극락에 왕생한 모든 이들은 연꽃 속에 있지만, 지은 죄업에 따라 연꽃 봉오리에 갇혀 꽃이 피기를 기다려야 한다. 하품으로 화생한 자의 경우 짧게는 49일에서 길게는 12대겁까지 기다려야 하니, 말이 극락이지 연꽃 감옥과 다름없다. 화사는 하품 화생자들을 꽃봉오리 속에 가두는 대신 연잎 위에서 평화롭게 잠든 아기처럼 그려냄으로써 왕생자 간의 차별성을 구현함과 동시에 극락에 숨어 있는 긴장감을 해소한다. 연꽃 왕생자만 그렸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단조로움을 벗어나 연잎과 연꽃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풍성한 구도는 덤으로 챙기면서 말이다.
 
그러나 보광사의 연화화생도가 특별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림 중앙 하단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빈 연화대 때문이다. 세월이 빚어낸 우연인지, 화사의 의도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교묘하게 인물만 사라진 빈 연화대는 화두처럼 육박해온다. 이 빈자리는 벽화의 흠결인가, 아니면 공적空寂의 법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부처로서 내 모습이 있어야 할 공간인가? 답은 무엇이 되어도 좋다. 다만 지금은 극락을 보고 들은 당신에게 극락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는지가 궁금할 따름이다.        
 
강호진
한양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불교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중학생 때 어머니를 따라 해인사 백련암에 올라가 삼천 배를 하고 성철 스님에게 일각 一角이란 불명을 받았다. ‘오직 일체중생을 위해서 살라’는 성철 스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지금껏 별달리 일체중생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도 그 가르침대로 살지 못한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다는 심정으로 『10대와 통하는 불교』,『10대와 통하는 사찰벽화이야기』를 썼다. 
 
사진 : 최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