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만나다] 유식唯識 (7)

전오식前五識과 의식意識

2017-02-08     김사업

전오식前五識과 의식意識  

유식唯識 (7)
 
김사업
| 마음은 하나일까, 여럿일까?
마음은 하나일까, 아니면 여럿일까? 대부분 마음은 하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의 마음이 보고 듣는 등 여러 작용을 한다고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보는 작용과 듣는 작용은 동시에 일어날 수 있을까, 없을까?
 
불교에서는 눈앞에 대상이 있을 때 그것의 모습을 보는 마음을 안식眼識이라 하고, 그 소리를 듣는 마음을 이식耳識이라 한다. 새 한 마리가 나무 위에서 청명하게 지저귀고 있다. 이때 새의 모습을 보는 마음이 안식이고, 새가 내는 소리를 듣는 마음이 이식이다. “보는 작용과 듣는 작용이 같은 시점에서 동시에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불교식으로 표현한다면, “안식과 이식이 동시에 작용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된다.
 
이 질문에 대해 안식과 이식의 동시 작용이 가능하다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면, 그것은 이 두 식識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안식과 이식이 제각기 따로 존재하고 있어야 동시 작용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식識은 마음을 뜻하는 불교 용어이다. 따라서 안식과 이식이 별도로 존재한다면 마음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고 해야 한다. 마음은 하나일까, 복수일까? 안식과 이식 등은 동시에 작용 가능할까, 아닐까? 장구한 불교의 역사에서 이 문제에 대해 여러 통찰이 출현했다.
 
우선 부파불교(=소승불교)를 대표하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마음은 하나라고 보았다. 이 하나의 마음이 어떤 것의 모양과 색깔을 식별하는 작용을 하고 있을 때를 안식이라고 부를 뿐이며, 그 소리를 식별하고 있을 때를 이식이라고 부를 뿐이라고 한 것이다. 설일체유부는 이와 같이 하나의 마음이 무엇을 그 인식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마음은 여섯 가지의 이름으로 불릴 뿐이며, 그 이름들이 바로 안식ㆍ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ㆍ의식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안식에서 의식까지의 여섯 가지 식을 통틀어 6식六識이라고 부른다.
 
설일체유부의 입장은 결국 마음은 하나며 그 인식 대상이 여섯이라는 이야기이다. 인식 대상의 차이에 따라 안식에서 의식까지의 여섯 가지 다른 이름이 붙여졌을 뿐이다. 안식이든 이식이든 어느 쪽이나 다 마음이다. 보는 작용과 듣는 작용이 동시에 일어나려면, 안식과 이식이 동시에 작용해야 한다. 그리고 이 두 식이 동시에 작용하려면 이 두 식이 별개로 존재해야 한다. 안식과 이식이 별개로 존재한다고 하려면 마음은 하나가 아니라 복수라고 해야 한다.
 
마음은 하나라고 주장하는 설일체유부는 위와 같은 사정에 의해 보는 작용과 듣는 작용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안식과 이식이 동시에 작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설일체유부에 따르면 안식과 이식뿐만 아니라 6식 가운데 어느 식이 되었든 한 순간에는 하나의 식만 작용할 수 있다.
 
우리는 영화를 볼 때 화면도 보고 그 소리도 들으며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생각도 한다. 이때 생각하는 마음은 6식 가운데 의식意識에 해당한다. 한 순간에는 하나의 식만 작용한다는 설일체유부는 영화 감상 때 일어나는 마음 작용을 이렇게 설명한다. 예를 들면 이 순간에는 안식이, 다음 순간에는 이식이, 그 다음 순간에는 의식이 번갈아 가며 작용하며, 이런 연쇄적인 작용이 계속 이어짐으로써 영화 감상은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근간을 이루는 유가행파의 통찰은 설일체유부와 달랐다. 유가행파의 사상, 즉 유식에 따르면 마음은 하나가 아니라 여덟이다. 여덟 개의 마음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마음은 하나다.”를 전문 용어로는 심체일心體一이라고 한다. 마음(心)의 체體는 하나(一)라는 뜻이다. 반면에 “마음은 여럿이며 별개로 존재한다.”에 해당하는 전문 용어는 심체별心體別이다. 마음(心)의 체體는 별개(別)이며 여럿이라는 뜻이다. 설일체유부가 심체일의 입장에 있다면, 유식은 심체별의 입장에 있다.
 
유식은 우리들 마음은 안식ㆍ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ㆍ의식ㆍ말나식ㆍ아뢰야식의 여덟이라고 한다. 각각 별개로 존재하는 이 여덟 마음을 통틀어 부를 때 8식八識이라는 호칭을 쓴다. 8식 가운데 안식부터 의식까지의 6식은 유식 이전까지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유식 사상은 6식에 말나식과 아뢰야식이라는 두 가지 마음을 추가하여 우리들 마음은 8식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말나식과 아뢰야식은 무의식에 가까운 마음으로 평상시 우리들은 이 둘의 존재를 알지 못할 정도로 이 두 마음은 미세하게 작용한다. 이전 호에서 유식 사상의 형성과 발전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유가사瑜伽師라 불린 전문 수행승들의 깊은 선정禪定의 체험이었다고 말했다. 말나식과 아뢰야식도 유가사들의 깊은 선정 체험의 결과로 발견되었으리라고 다수의 학자는 보고 있다.
 
심체별의 8식을 주장하는 유식에 따르면 동일 순간에 여러 식(마음)이 동시에 작용할 수 있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작용 등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 감상은 안식과 이식과 의식이 같은 순간에 함께 작용하면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유식의 정통적 입장이다.
 
| 전오식前五識과 5근五根
유식에서 8식을 말할 때 나열하는 순서가 정해져 있다. 안식ㆍ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ㆍ의식ㆍ말나식ㆍ아뢰야식의 순으로 열거한다. 여덟 가지 식을 통틀어 말할 때는 8식이라 부르지만, 앞에 ‘차례 제第’자를 붙여 ‘제8식’이라 할 때는 순서상 여덟 번째에 있는 아뢰야식만을 가리킨다. 제7식은 말나식이고, 제6식은 의식이다. 또 ‘앞 전前’자를 붙여 ‘전오식’이라 할 때는 순서상 앞의 다섯 가지 식, 즉 안식부터 신식까지를 합쳐서 가리킨다. 전육식은 안식부터 의식까지를 지칭한다.
 
안식부터 신식까지의 전오식은 서로 공통점이 있어 한 그룹으로 묶을 수 있다. 그 공통점이란 세 가지이다. 첫째, 전오식은 그 각각의 인식 대상이 지금 이 순간 바로 눈앞에 있을 때만 작용한다. 둘째, 전오식은 눈ㆍ귀 등과 같은 신체의 감각기관에 의지해야만 작용한다. 셋째, 전오식은 이름과 개념 없이 그 인식 대상을 식별한다.
 
눈ㆍ귀 등과 같은 신체의 감각기관 또는 감각기능을 불교에서는 ‘뿌리 근根’자를 써서 ‘근根’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눈을 안근眼根, 귀를 이근耳根이라고 부른다. ‘근’에 해당하는 산스끄리뜨 원어는 인드리야indriya로, 이것은 제석천을 뜻하는 인드라Indra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제석천은 불교의 진리를 수호하는 신神이다. 인드리야는 ‘제석천과 같이 힘 있는 것’을 그 원뜻으로 하는데 중국 역경가들이 ‘뿌리 근根’자로 의역하였다. 식물의 뿌리는 뭔가를 발생시키는 강력한 힘이 있다는 것에 착안한 것으로 훌륭한 번역이다.
 
불교에서는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을 차례로 안근ㆍ이근ㆍ비근鼻根ㆍ설근舌根ㆍ신근身根이라 호칭하며, 이들 다섯을 합해 5근五根이라 통칭한다. 이 5근은 식물의 뿌리가 강력한 힘으로 줄기와 가지를 만들어내듯이 전오식을 생하게 한다. 그런데 5근을 이해하는 데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눈을 편의상 안근이라 했다. 우리는 ‘눈’이라는 용어를 통해 각막ㆍ수정체ㆍ망막으로 되어 있는 의학적인 눈을 연상하고, 그 눈을 불교에서는 안근이라 부른다고 생각하기 쉽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해다.
 
유식은 근에는 부근扶根과 정근正根이 있다고 말한다. 부근은 정근을 도우는 2차적인 기관으로 의학적인 눈은 이 부근에 속한다. 부근이 아니라 정근이 5근이다. 따라서 의학에서 말하는 눈은 안근이 아니다. 정근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정근은 청정한 물질로 만들어져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정근은 청정한 보배 구슬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고 한다. 청정한 보배 구슬이 빛을 발하여 사물을 비추듯이, 5근은 감각적 에너지를 각각의 대상에 비추어 그 인식이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정근과 부근 중 보고 듣는 등의 감각 작용을 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은 하는 것은 정근이며, 안근 등의 5근은 바로 이 정근을 가리킨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의학적 눈과 귀 등은 정근인 5근을 도우는 부차적인 감각기관, 즉 부근일 뿐이다. 안근은 위와 같은 정근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눈은 망막과 같은 부근이므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선 안근을 ‘진실의 눈’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른다. 이근부터 신근까지 나머지 5근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좌선을 계속하다 보면 저녁노을이 잡티 하나 없이 마음 가득히 들어오고 새소리가 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울리는 체험을 한다. 좌선을 하기 전이나 후나 의학적인 눈과 귀는 종전 그대로인데 왜 이렇게 달리 보이고 들릴까? 정근인 안근과 이근이 발하는 감각적 에너지, 보배 구슬이 발하는 빛과 같은 그 에너지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진실의 눈과 귀가 좌선을 통해 제 역할을 회복한 것은 아닐까.
 
나아가 유식에는 ‘제근호용諸根互用’이라는 사상이 있다. 5근이 그야말로 청정 그 자체가 되면 5근 가운데 어느 하나만으로 모든 감각 작용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한다. 예를 들면 안근이 사물의 모습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도 듣고 냄새도 맡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식 사상을 잉태한 유가사들이 선정의 실천을 통해 얻은 사실로 보아야 한다. 선禪에서도 “귀로 들으면 깨닫기 어렵다. 눈으로 소리를 들을 때 비로소 온몸으로 안다.”는 말을 한다.
 
‘제근호용’은 경지가 매우 높은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한 경우이다. 이하에서는 다시 유식 일반론으로 돌아가 언급하겠다. 안식에서 신식까지의 전오식은 위에서 언급한 5근 가운데 자신만의 특정한 한 근에 의지해야만 작용할 수 있다. 하나의 예로서 안식은 안근에 의지해야만 안식으로서 작용한다. 시각장애인은 안근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전오식은 자신만의 인식 대상이 있다. 안식은 사물의 모습만을 인식하고 이식은 그 소리만을 인식한다. 전오식 각각의 근과 그 인식 대상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안식은 안근(눈)에 의지하여 색깔과 모양을 식별하는 마음이다. 안식의 인식 대상인 색깔과 모양을 색경色境이라 한다. 색경에서 경境이란 인식 대상을 뜻한다. 마음에 따라 파악되는 인식 대상이 여러 종류가 되므로 색경ㆍ성경 등 다양한 명칭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식은 이근(귀)에 의지하여 소리를 식별하는 마음이다. 소리를 성경聲境이라 한다. 비식은 비근(코)에 의지하여 냄새를 식별하는 마음이다. 냄새를 향경香境이라 한다. 설식과 신식은 각각 설근(혀)과 신근(몸)에 의지하여 맛과 감촉을 식별하는 마음이다. 맛을 미경味境이라 하고, 감촉을 촉경觸境이라 한다.
 
전오식은 각각의 인식 대상이 지금 현재 바로 눈앞에 있을 때만 작용한다. 과거나 미래의 것을 전오식은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현재의 인식 대상도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인식하지 못한다. 또한 전오식이 하는 인식은 이름과 개념이 없는 인식이다. 안식이 나무를 인식할 때, 나무의 색깔과 모양은 인식하지만 그것이 녹색이라든가 둥근 모양이라든가 나무라든가 하는 개념 없이 인식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안식을 통한 우리의 인식은 거의가 다 이름과 개념을 동반한 인식이다. 은행잎 등 어떤 특정한 이름 없이 나뭇잎을 본 적이 없지 않은가? 이름도 모르는 나뭇잎을 보았다 해도 그것은 이미 ‘이름도 모른다’거나 ‘나뭇잎’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인식이다. 안식을 통해서 일어나는 실제의 인식이 이렇게 이름과 개념을 동반하는 까닭은 안식의 작용에 의식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 의식意識
의식은 전오식과 달리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모든 것을 그 인식 대상으로 한다. 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했다고 하는 진리를 그 인식 대상으로 하여 여러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의식의 인식 대상을 법경法境이라 한다. 법경은 30년 전 학창시절의 친구가 될 수도 있고, 1년 뒤에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일일 수도 있다. 마트의 계산대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지금,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물건값도 법경이다. 의식은 이와 같이 시간과 공간에 제약 없이 어떤 것도 회상할 수 있고, 상상ㆍ추정ㆍ계산ㆍ사유할 수 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과의 모양을 이름과 개념 없이 식별하는 것은 안식이다. 그러나 어제 본 사과의 모양을 회상하는 것은 의식이다.
 
의식은 대부분의 경우 이름과 개념을 동반한 인식을 행한다. 나와 너, 선과 악, 옳다ㆍ그르다, 밉다ㆍ곱다 등의 생각은 모두 의식이 일으키는 것이다. 공중도덕을 지키려는 것도 의식이고, 원한 맺힌 일을 잊어버리지 않고 계속 생각하는 것도 의식이다. 자다가 꿈을 꾸는 것도 의식이고, 실험 결과를 토대로 과학적 진리를 도출해 내는 것도 의식이다. 의식은 이와 같이 우리 생활에 유용할 때도 있지만 쓸데없는 번뇌를 일으키기도 한다.
 
의식은 전오식과 함께하지 않고 단독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전오식과 함께 작용하기도 한다. 전오식과 같은 찰나에 함께 작용할 때의 의식을 오구의식五俱意識이라 하고, 단독으로 작용할 때의 의식을 불구의식不俱意識이라 한다. ‘함께할 구俱’자를 써서 전오식과의 동시 작용 여부를 나타낸 것이다. 
 
의식이 전오식과의 관련 하에 작용하는 경우에 대해 살펴보자. 전오식은 의식과는 달리 의식과 함께 작용해야만 명료한 인식 작용을 할 수 있다. 바깥에는 무수한 소리들이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소리 중 의식이 향하는 소리만이 우리에게는 명료하게 들린다. 소리를 듣는 이식은 의식과 함께해야만 명료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나머지 전오식도 이식과 마찬가지다.
 
의식이 향하는 것만 명확하게 보이고 들린다. 상대의 흉을 보려고 하면 흉만 보인다. 무엇을 보고자 하고 무엇을 듣고자 해야 할까?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할까?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은 어떻게 보는 것일까?
의식은 전오식의 인식에 대해 개념적 사고를 행하기도 한다. 안식만으로 아무리 내 아들을 보고, 이식만으로 아무리 목탁 소리를 들어도 그것이 내 아들이나 목탁 소리라는 것은 알 수 없다. 그것의 형체나 진동만 식별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들을 보는 순간 조금도 지체 없이 아들임을 안다. 의식이 안식의 작용에 아들이라는 이름과 개념을 넣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다양한 작용을 하는 의식이지만 항상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경우에는 작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깊은 잠에 빠지거나 기절했을 때 의식은 작용하지 않는다. 무상천無想天이라는 천상에 태어나면 의식은 전연 작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무상정無想定이나 멸진정滅盡定이라 불리는 선정에 들어도 의식은 작용하지 않는다.
 
무상정은 외도나 범부가 닦는 선정으로, 무상천에 태어나는 원인이 된다고 한다. 멸진정은 성자가 닦는 선정이다. 무상정에서는 의식만 작용하지 않지만, 멸진정에서는 의식뿐 아니라 말나식도 작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김사업
오곡도 수련원 부원장.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ㆍ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불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유식설에서의 연기 해석」, 「선과 위빠사나의 수행법 비교」 등이 있다.
김사업 부원장은 장휘옥 원장과 함께 전문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대학 강단을 떠나 남해안의 오곡도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했으며, 2003년부터는 간화선 수행에만 전념하여 일본 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 지도로 900여 회에 이르는 독참을 통해 피나는 선문답을 나누며 수행해 왔다.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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