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이 낡은 격식인가

선의 고전 (선문단련설-禪門鍛鍊設)

2007-07-01     관리자
 

 

 간혹 스승이 선문(禪門)의 이면을 알지 못하고 그저 학인에게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인가’ 와 ‘어떤 것이 본래면목인가’ ‘어떤 것이 학인 자기인가’ 따위 만을 참구하게 한다면, 이것은 위에서 자물쇠를 채우지 않고 공중을 향하여 소리치는 격이다.

 스승이 단단히 칼자루를 잡지 않으면 학인이 의정을 말하는 것이 무력하여 썩은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꼴이어서 늙어 죽을 때까지라도 깨치지 못하리라.

 참선하는 병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어찌 애통한 일이 아니겠는가.

 가장 사람을 그르치게 하는 것은, 처음으로 선문에 들어와서 근본을 깨닫지 못한 자에게 남전의 참묘나, 백징의 야호, 단하의 소불, 여자출정 등의 화두를 참구케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네모난 자루를 둥근 구멍에 맞추려는 꼴이어서 세월만 허송할 뿐, 어림없는 노릇이다. 이들을 두찬(杜撰)이라 해서 결코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선중을 단련코자 하면 자세히 근기를 살피고 화두를 간결하여 모두 맞게 하고 이둔(利鈍)에 적합하게 하여야 한다. 이것이 입문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 할 것이다.


3.학인을 철저히 분석하여야 한다


 이미 화두를 일러 주었으면 다음은 참구하게 하여야 한다.

 그러나 참구하는 방법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화평한 것이요, 둘째는 맹리(猛利)한 것이다.

 화평하게 참구하는 경우에는 학인이 깨닫기가 어렵고, 간혹 이치를 깨닫는다 하더라도 특출하기는 어렵다.

 맹리하게 참구하는 경우에는 학인이 깨닫기가 쉬워서 한번 용광로에 들어가면 매우 특출한 사람이 배출되는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화평한 방법을 쓰면 괴단성이 없고 느슨하여 단지 들뜬 마음을 억제하고 거친 생각을 씻을 뿐이어서, 오래 오래 익힐지라도 티 없이 깨끗하기만 할 뿐 관문을 부수고 득의만면 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깨닫기가 어렵다고 한 것이다.

 또한, 찬 재에서 콩을 굽 듯 하는 자는 비록 끝끝내 기운이 흩어진 자와 같아서 한번 혹독한 수단이나 가풍을 만나면 즉시 주저 앉고 말 것이거든 하물며, 큰 일을 치루거나 큰 짐을 나르며 많은 대중을 거느리면서 이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특출하기는 어렵다고 한 것이다.

 만약 사람을 얻고자 한다면, 불현듯 절단해 버리고 활활 타는 불속에서 몸을 뒤치며 험준한 절벽위에서 목숨을 던져서 좌절을 당하고 고초를 겪더라도 안연부동 하는 자의 경우에는 맹리한 참구법이 아니면 안된다. 맹리법이 비록 훌륭한 것이기는 하지만 힘이 미치지 못할까 염려될 뿐이다.

 날짜를 정하여 다그쳐 공을 이루고자 한다면 7일간의 기한을 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7일간의 기한을 정하면 용맹하고 뛰어난 자는 배나 힘을 낼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겁이 많고 유약한 사람이라도 한번 총림에 들어가서 기필코 죽을 각오를 하게 될 것이요. 또한 몸과 목숨을 버릴 용기를 품게 될 것이므로 7일간의 기한을 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만약 7일간의 기한을 정하고자 하면 입실을 우선해야 한다. 입실은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다. 장로가 이미 단련하는 일로 목적을 삼았으면, 조심함이 돈독해야 하고 용의가 깊어야 하고 법을 세움이 준엄해야 하고 공력을 가함이 세밀해야 한다.

 그 사람을 알지 못하면 비록 한방에서 머리를 맞대고 지내더라도 전혀 낯선 사람과 같아서, 소위 결제라는 것이 흥청대는 집안 꼴이 되고 말 것이니 선중에게는 아무 이익이 없을 것이다.

 그 사람은 알았으나 그의 본참화두를 알지못하면 장로가 선당에 들어가서 학인을 단련하려 하여도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칼자루를 손에 쥐지 않았으면 이때에 선문의 낡은 격식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낡은 격식인가.

 겨울이나 여름의 안거에 모든 일은 집사에게 맡겨버린다. 집사는 자기의 소임에 충실하여, 앉아 있을 때는 그들이 혼침하든 산란하든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고 걸어 갈 때는 그들이 느릿하든 피곤해하든 상관 않는다.

 장로는 체면을 차리느라 집사가 종을 치고 정중히 청하지 않으면 승당에 내려오지 않는다.

 그러나 관례를 깨고 대중을 위하는 자라 할지라도, 간혹 하루나 이틀 만에 한번 승당에 내려오거나, 어떤 때는 사흘이나 닷새, 귀찮아하는 자는 열흘이나 보름, 심지어 해제가 되도록 승당에 내려오지 않는 자도 있다.

 장로가 승당에 내려오면 집사가 엄숙히 도열하고 있는 것은 마치 관청에 아전이 늘어선 듯 하고, 참통을 들고 이름을 부루는 것은 관리가 출근을 점검하는 듯하다.

 장로가 선중의 이름이나 얼굴도 모르고 또한 그들의 본참화두도 알지못한 채 부득불 한 질문을 던진다거나 한 공안을 들어서 그의 책임을 모면하려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나쁜 격식이라 할 것이다.

 오랫동안 선석을 경험한 자는 익숙한 걸음으로 스스로를 점검 할 수 있는지라, 장로가 승당에 이르지 않아도 의지가 분명하고 계략이 충실하다.

 그런데 장로가 사로잡거나 죽이거나 살리는 강종의 수단을 사용하여, 그의 의도를 찾아 그 소굴을 습격하지 않고, 그저 단순한 응답이나 편리한 말솜씨로 영리하다고 여기고, 하나의 질문을 하기만 하면 억지로 한 두 마디 말로 그의 허물을 감추려 한다면, 오랫동안 참예하더라도 아무 이익이 없을 것이다.

 우둔하거나 처음으로 참구하는 자는 선서도 종래 읽은 적이 없고, 혼침과 산란도 아직 제하지 못했으며, 화두도 익숙지 못한 상태다. 그래서 장로가 승당에 내려오면 열에 아홉 사람은 몸을 숨기거나 멀찌감치 서서 감시 가까이 오려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비록 간혹 점검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본참공안을 물어서 살피지않고, 마치 나무꾼에게 글방의 일을 묻는 것 같이 하여, 일률적으로 한 두 대의 매를 때려 이를 모면하려 한다면, 이것은 신참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장로가 점검을 마치고 방장으로 돌아가면, 선중은 망상 속에 들어 앉아 있거나 썩은 물 속에 침몰하고 그렇지 않으면 혼침이나 산란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따름이니 올바른 공부길도 전혀 찾지 못하거든 하물며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소위 낡은 격식인 것이다.

 선지식이 이러한 낡은 수단으로 사람을 위한다면 자신은 편안하기는 하겠으나, 선중은 광대겁의 업식을 어떻게 맑힐 수 있으며 지견을 어떻게 끊을 수 있으며 의단을 어떻게 피하며 생사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이것들이 모두 그 사람을 알지 못하고 그 본참을 알지 못하는 과실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만약 이런 것들을 알고자 하면, 그 방법은 승당에 들어가서 학인을 엄히 다스리는데 있다.

 대게 사람의 근기는 한결같지 아니하여 참학(參學)하는 이들도 갖가지의 차별이 있다. 비록 화두를 알고 있으나 어떤 이는 참구할 뜻이 없고, 어떤 이는 사심을 얻지 못한 이도 있다. 혹은 뜻은 있으나 의정이 일어나지 않으며, 어떤 이는 화두를 들기만 하면 망상에 휩싸이는 자도 있고, 또는 몇 년을 참구하였으나 어떤 것이 공부인지 조차 모르는 자도 있다. 어떤 이는 경교의 이치로 화두에 맞추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저 화두를 빌려서 망상을 없애려는 자, 또는 무사안일에 안주하는 자, 혹은 억지로 대답한 것으로써 주재로 여기는 자, 어떤 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것으로 깨달음이라고 여기는 자도 있다.

 이러한 많은 병통들은, 잘못을 바로 잡아 주는 이도 없고 안으로 진실한 의심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입실할 때에 일일이 엄하게 다스리고 소탕하여 그들에게 붙은 것을 떼어 주고 묶인 것을 제거하며 막힌 것을 틔우고 서툰 것을 연마하며, 자신도 모른채 묶여 있는 밧줄을 끊어 주고 깊이 든 병을 낫게 하여, 진실한 참구를 할 수 있도록 하면 수행의 길도 반드시 올바를 것이다.

 만약 엄하게 다스려서 병통을 제거하지 않고, 분별없이 하나의 화두만을 주거나 사리에 맞지 않게 하나의 공안만을 준다면 학인이 올바르게 용심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삿된 것을 바로 잡고 더러운 것을 깨끗이 하며 어두운 것을 밝게 하고자 하지만, 온 몸에 퍼진 선병(禪病)을 도저히 고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는 학인이 입실할 때에 치밀하게 용심하는 것 이 중요하다.

 이미 그 사람의 이름이나 용모를 알고 그 사람의 본참을 기억하며, 또한 능히 그 사람의 선병을 제거하여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게 되면 단련하는 방법을 차츰 베풀 수 있는 것이다.


4.승당에 내려와서 일깨워 주는 법


 이미 학인을 철저히 분석 하였으면 잘못된 길을 걷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학인이 참구함에 있어서 마치 역수에 배를 저어 가듯 사람을 다그쳐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면 퇴타하는 경우는 많고 전직하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또한 강가에 다달아 뛰어들 것을 부추기듯 사람을 종용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면 우선 전진하기는 하였으나 쉽게 물러 설 것이다.

 그러므로 승당에서의 일깨워 주는 법이 가장 절실할 것이다.

 일깨워 주는 것은 3일이나 5일에 한번씩 하는 정도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루에 세 번씩 성실하게 일깨워 주어야 한다.

 일깨워 주는 방법은 , 그 사람의 근기나 성실성을 살펴서 완급에 맞게 해야 한다.

 이러한 일은 꼭 단정할 수는 없으나 그 종류를 말하면 대략 아래와 같은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입지를 분명히 하도록 한다.

 둘째,  참구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셋째, 게으름을 경책한다.

 넷째, 마병을 막아준다.

 다만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은 언설의 갈등을 자제하면서 도리를 설해야 하는 것이다.

 입지를 분명히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세간의 예업(藝業)도 입지가 분명치 않으면 몸으로 근고(勤苦)를 견디지 못하며, 근고를 견디지 못하면 반드시 그들의 예술을 성취하지 못한다. 더욱이 정식(精識)을 끊고 심성을 밝히며, 생사를 벗어나 불조의 대도를 성취하려 함이랴.

 그러므로 참구하고자 함에 앞서 철석과 같은 마음을 세우고, 금강과 같은 서원을 발함으로써 길잡이를 삼게 해야 한다.

 차라리 뼈가 깎이고 살이 마를지언정 큰 일을 성취하지 않으면 물러서지 않을 것이요, 차라리 몸과 목숨을 버릴지언정 조사관을 뚫지 않으면 쉬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생사를 투탈 하고자 하는 견고한 서원을 갖추면 의정을 발함이 반드시 진실할 것이요, 이렇게 불조를 감당하려는 굳센 뜻일 지니면 참구함이 반드시 힘찰 것이다.

 의정이 진실하고 참구함이 힘 차면 어찌 마침내 크게 깨닫지 않을수 있겠는가.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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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전이 어느날 동서 승당에서 고양이를 가지고 시비하는 것을 보고, 문득 고양이를 쳐들고 말했다. " 말하라. 바로 이러면 베지 않으리라" 대중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남전은 곧 고양이를 베어 죽여버렸다. 후에 이 일을 조주에게 말하니 조주는 신발을 이고 나가 버렸다.

2) 백장 회상에 법회마다 참석하여 법을 듣곤 하는 한 노인이 있었다. 하루는 백장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요," 저는 과거 가섭불 시에 이 산에서 살았던 자 올시다. 학인이 ' 대수행인도 인과에 떨어집니까'하고 묻기에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과보로 오백년 동안이나 여우의 몸을 받았습니다. 바라건대 일전어(一轉語)를 내리사 해탈케 하소서." 이에 백자이 '인과에 매하지 않노라(不昧因果)'하고, 여우의 몸을 벗게 하였다.

3) 단하선사가 낙양 혜림사에 있을 때의 일. 마침 추운 겨울이어서 법당에서 불상을 내려 불을 지폈다. 원주가 놀라며 물었다. '어찌하여 불상을 태우는가". "사리를 얻으려고 하네". "목불에 무슨 사리가 있단 말인가". "사리가 없으면 무슨 부처인가".

4) 문수가 부처님 처소에 이르러 참배했다. 그 때 한 여자가 부처님 곁에서 정에 들어 있었다. 문수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는 여인인데 어찌하여 부처님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있습니까." "그 여인을 삼매로부터 깨워 직접 물어보라" 문수는 여인을 세번 돌고 신통으로 손가락을 튕기어 깨우려 했으나 되지 않았다. 이를 본 부처님이 말씀했다. "....하방으로 42억 항하사 국토를 지나 망명(罔明)보살이라는 이가 있다. 그가 능히 깨울 수 있다. "망명이 여인 앞에 이르러 손가락을 세번 튕기니, 여자가 정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