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마음 사르는 칼] 모든 게 무너져 내리는 듯싶을 때

2017-01-09     박재현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때, 그때는 어찌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 봐도 결국 안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때, 그때는 정말 어찌해야 하는가. 유일하게 기댈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조차 허망하게 무너져 내릴 때. 그다음엔 도대체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가. 이런 심정을 표현하는 한자어가 ‘패궐敗闕’이다. 서장書狀』에 보면, 증시랑曾侍郞으로 불린 인물이 간화선의 종장인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편지에서 그는, 부처의 법을 익히고 싶었지만, 세상일에 치여 결국 그러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내 한평생 다 버렸다’는 뜻으로 일생패궐一生敗闕이라는 표현을 썼다.

일생패궐이라는 좀 섬뜩한 용어가 최근에 다시 등장했다. 불교서적 전문출판사인 민족사 대표 윤창화 선생이 ‘일생패궐’이라는 제목이 적힌 문서를 발견하고 세상에 알렸다. 선생은 방한암(方漢岩, 1876~1951) 스님이 이 글을 짓고 그의 제자 탄허(呑虛, 1913~1983) 스님이 필사한 것으로 추측했다. 한지에 만년필로 필사된 이 글은 정작 탄허 스님의 유품이나 소장품에는 없고, 그와 동문수학한 사형인 보문 스님이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보문 스님 입적 이후에는 전 통도사 주지 초우 스님이 보관하고 있다가 현재는 강원도 월정사 박물관에 기증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한암은 김천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를 처음 만났다. 당시 경허는 52세였고, 한암은 겨우 20대 초반이었다. 수도암은 땅보다 하늘이 가까웠고, 동쪽으로는 가야산, 서쪽으로는 덕유산과 어깨를 나란히 걸고 쪼그리고 앉아 있는 사찰이다. 중후한 맞배지붕의 건물 속에 들어앉은 화강암 석불이 인상적인 곳이다.

수도암에서 경허로부터 전해들은 금강경』의 한 구절은 한암의 가슴을 후려쳤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흔해 빠진 한마디에, 내내 꾸려 왔던 한암의 살림살이는 거덜 났다. 그즈음에 한암의 심경은 ‘일생패궐’ 문서에 기록된 내용에 솔직하게 드러난다. 두 사람 사이에 이런저런 대화가 이어지다가 마침내 한암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어떻게 해야만 깨달을 수 있습니까?”

경허 화상이 대답했다.

“화두를 들어서 계속 참구해 가면 끝내는 깨닫게 되는 것이네.”

한암이 또 여쭈었다.

“만약 화두도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화상께서 답하셨다.

“화두도 진실이 아니라고 알았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네. 그러므로 그 자리(잘못된 그곳)에서 즉시 무無 자 화두를 참구하게.”

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 있느냐는 질문은 너무 간명해서 섬뜩하다. 에둘러 가지 않는 질문이어서, 묻는 사람이 얼마나 절박한지 짐작케 한다. 할 만큼 해봤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는 질문이다. 이렇게 말하기까지 한암은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패궐의 심정을 느끼도록 이끈 것은 다름 아닌 화두 수행이었다. 화두를 들고 수행했던 그는 마침내, 화두조차 진실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화두를 붙들고 죽어라고 수행했는데, 그것조차 진실이 아니라는 데 생각에 미쳤다면, 그 패궐의 심정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 상황에서 경허 선사는 무심하게도 그냥 화두를 계속 참구하라고만 한다. 결국 한암이 터지고 만다. “화두話頭도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는 어떻게 합니까?”

윤창화 선생은 이 말을 두고, 수행자 모두가 한 번씩은 겪었던 의단疑端의 관문이라고 했다. 화두 참선을 제대로 하는 수행자라면 누구라도 화두 자체에 대해 회의하거나 의심하게 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모든 게 무너져 내리는 듯한 이 지경에서, 경허의 대답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화두도 진실이 아니라고 알았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네. 그러므로 그 자리(잘못된 그곳)에서 즉시 ‘무無’ 자 화두를 참구하게.” 이것은 윤창화 선생의 번역이다. 원문原文은 이렇게 되어 있다. “若知話頭亦妄 忽地失脚 其處卽是 仍看無字話.” 이 문장의 의미에 대해 간화선을 전공하는 불교학자 변희욱 선생의 생각은 좀 다르다. 그는 이렇게 해석했다. “화두도 허망함을 알았다면, 돌연 (기존의 자기가) 무너지는(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곧 ‘무無’ 자 화두를 보라.”

이 짧은 내용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뭔가를 죽어라고 열심히 하는 상태, 제아무리 애쓴다고 해도 불교이론에 근거해서 보면, 그것은 ‘나(我)’의 확장에 지나지 않는다. 의지는 장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의 변화, 내 안의 혁명을 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불순한 것이 되고 만다. 이런 류의 의지는 결과적으로 업業을 강화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강화된 업은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원동력이 된다.

화두는 ‘나(我)’의 동력과 그 확장을 잠시 멈춰 세우는 작용을 한다. 화두는 일부러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기존에 ‘나’를 유지해왔던 동력을 무력화시킨다. 예를 들면, “물소가 창살을 지나가는데, 머리와 네 발은 모두 지나갔는데 꼬리만 남았다.” 같은 것이다. 이런 황당하고 비상식적인 상황에 봉착해야만, ‘나’는 겨우 무너진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끝내 성성해서, 내 깜냥은 빈틈없이 발휘되며 ‘나’는 갈수록 더 강성해진다. 화두는 이런 ‘나’를 ‘야!’하고 불러 세우는 선문禪門의 비전秘傳이다.

그렇게 ‘나’가 무너지고 나면, ‘나’를 무너뜨린 그 화두도 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화두를 들었으니, 내가 무너지고 나면 화두조차 무너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변희욱 선생의 의견에 따르면, 화두조차 허망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화두가 허망하다고 느껴졌다는 것은, 지금껏 화두를 떠받치고 있었던 ‘나’가 마침내 무너졌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감축할 일인 것이다.

이제 반은 되었다. 있던 것을 무너뜨려야 다시 세울 수 있다. 있던 것을 그대로 두고 어찌해보려고 하면 절대로 안 된다. 눈 딱 감고 쓸어버려야 새로 세울 수 있다. 눈 딱 감고 그동안 애지중지했고, 귀하고, 짠하고, 나를 지탱해 준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한번에 쓸어버릴 수 있으면 반은 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화두의 역할이다. 그 화두가 뜰 앞의 잣나무든, 마른 똥막대기든 상관없다.

이제 남은 반을 지탱해낼 화두는 무無 자다. 모든 게 무너져 내리는 듯싶을 때,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때, 어떻게 해 봐도 결국 안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때, 유일하게 기댈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조차 허망하게 무너져 내릴 때, 바로 그때 들어야 하는 화두가 무無다. 적어도 ‘일생패궐’에 나타난 경허 선사의 말에 따르면 분명 그렇다.

패궐, ‘내 인생 절단났다.’, ‘다 헛짓이었다.’는 그 지경에 이르지 않고서 어떻게 내 안의 혁명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무리 해도 안 된다, 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그 절대적 허망함에 봉착하지 않고 어떻게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가. 화두는 나를, 내 마음을 사르는 칼이다. 그래서 살인도殺人刀라고 한다. 또 화두는 마침내 새로운 나를 세워내는 칼이다. 활인검活人劍이라고 한다.

막막하고 암울한 세월이다. 모든 게 무너져 내리는 듯도 싶고, 도대체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도 없다. 수백의 어린 생목숨을 바닷속에 가라앉히고도 우리는 어찌하지 못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주가 초토화 되어도 우리는 어찌하지 못한다. 법치국가라면서 법을 희롱하는 권력자들을 뻔히 두 눈 뜨고 보면서도 우리는 끝내 어찌하지 못한다. 이 참혹한 세월 속에서, 나의 화두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무리 해도 결국 이 지점으로 되돌아오게 될 것이다. 결국 되돌아오기 위해 나는 떠난다.

 

 

박재현
서울대학교 철학박사. 저술로 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 깨달음의 신화』, 만해, 그날들』 등이 있고, 「한국불교의 간화선 전통과 정통성 형성에 관한 연구」 외에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부산 동명대학교 불교문화콘텐츠학과에서 겨우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