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치 않는 보배 ‘보리심’ 알기

2017-01-09     불광출판사

변치 않는 보배 ‘보리심’ 알기


본 연재 글은 경전을 함께 독송하는 하나의 시도입니다. 『입보살행론』에서 매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샨티데바 스님의 말씀을 듣고(문聞), 그 내용에 대해 사유의 숲길 따라 깊이 들어가고(사思), 그 중에 삶에서 실천 가능한 것들을 수행해보기(수修)를 실험하고자 합니다. 이는 말씀을 통해 비추어지는 지금 여기의 성찰을 통해, 제가 누구인지 자신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다가가기 위한 것입니다. 사유나 문장력이 부족하지만 저의 수행이 익숙해지기 위한, 성장을 위한 작은 노력입니다. 하지만 이 작은 시도와 나눔을 통해서 누군가 유익하고 이익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합니다. 
『입보살행론』(보디사트바-짜리야-아와따라 Bodhisattvācaryāvatāra)은 7~8세기 경 인도 날란다(Nalanda)대학의 중관학자였던 샨티데바(Śāntideva, 적천寂天) 보살이 지은 것으로 약 1,000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논서는 인도와 티베트에서 약 130여 부의 주석이 있는 후기 대승불교에서 가장 유행한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것은 다람살라에서 정진하시는 청전 스님의 번역본과 혜능 스님의 번역본, 김영로 선생의 번역본 등이 있습니다. 주석서로는 최로덴 선생과 지엄 스님의 주석번역본이 책으로 나와 있습니다. 『입보살행론』은 티베트역본의 제목이고, 산스크리트어의 원래 제목은 『입보리행론』입니다. 한역에서는 『보리행경』이라는 송나라 번역본도 있지만 3장과 4장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입보살행론』의 핵심은 일체중생의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겠다는 대승보살의 큰 서원인 보리심을 일으키고, 깨달음을 실현하기 위한 보리행 수행법입니다. 이 논은 전체 10장(품),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깨달음의 바탕이 되는 보리심이 무엇이며, 어떻게 일으키고, 그 공덕은 무엇인지 자상하게 알려줍니다. 두 번째 부분은 제4장에서 6장까지로 일으킨 보리심을 지키기 위한 사유법과 일상에서 실천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마지막 7장에서 10장까지는 지키고 실천해온 보리심을 지혜와 선정으로 자라게 하는 수행법과 이 모든 공덕을 일체중생을 위해 어떻게 회향해야 하는지 설하고 있습니다.     
이 논을 지으신 샨티데바 스님은 남인도 사무라스트라국의 왕자로 태어났지만 왕위를 버리고 날란다사(寺)에 출가해 비구스님이 되신 분입니다. 스님이 출가한 절은 대학에 속해 있어서 많은 학승들이 교학과 수행을 함께 닦고 있었습니다. 날란다대학은 4~5세기경에 세워진 인도 최고, 최대 불교대학으로 중관학자인 나가르주나(용수)를 비롯해 아상가(무착), 바수반두(세친) 등과 같이 기라성 같은 종교적 천재들을 낳은 곳입니다. 
샨티데바 스님도 이곳에서 큰 스승들로부터 가르침을 전수받으면서 은밀하게 삼매수행을 닦으며 수행의 깊이를 더해갔지만, 겉으로 보기엔 항상 먹고 자고 놀기만 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날란다대학에서 전통적인 경을 외우는 법회에서 스님의 차례가 되었을 때 대중들은 스님이 무엇을 외울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그때 스님은 대중들께 지금까지 외웠던 것을 송경할지,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것을 송경할지 선택을 물었는데, 대중들은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것을 요구해서 이 논이 설해졌다고 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샨티데바 스님이 제 9장의 “마음 앞에 존재도 비존재도 남아 있지 않을 때는 집착의 대상이 없으므로 그때 비로소 대상에 대한 구분이 사라지고 관념적 활동이 없는 완전한 평정 속에 머물 수 있다.”는 게송을 송경할 무렵 스님의 몸은 사라지고 오직 허공에서 음성만 들려왔다고 합니다. 이후 스님은 다시 날란다사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때 함께 들었던 대중들의 기억에 의한 기록이 전해져 온 것이 이 논이라고 합니다. 참 놀랍고 희유한 일이 저에게까지 닿을 수 있어 기쁘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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聞-듣기
샨티데바 스님은 제1장 첫머리에서 이 논은 다만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스님 자신은 능숙한 문장력이 없으며, 이 논이 다른 사람을 위하기보다 자신을 위한 것이라 말합니다. 스스로 선업을 행하고, 신심과 깨달음이 증가하고 익숙하게 하기 위하여 이 논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논을 보는 사람들도 함께 이익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설합니다. 스님은 이 법을 듣는(보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몸을 받은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잘 사유하기를 권합니다. 눈먼 바다에서 천 년에 한 번 구멍 뚫린 널빤지를 만나 그 구멍에 목을 내밀고 숨을 쉬는 거북이의 비유처럼 인간의 몸을 받는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소중한 기회라고요. 하지만 인간의 몸을 받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부처님들의 위신력으로 잠시 선한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예경 받아 마땅한 모든 분들께 예경을 올려야 합니다. 선의 힘은 언제나 미약하고 죄악의 힘은 매우 강대하고 무섭기 때문에 수승하고 원만한 보리심으로 악을 극복해야 한다고 설합니다. 

스님께서는 우리가 보리심에 의지해서 불법을 수행한다면 가장 수승하고 미묘한 지복을 반드시 얻게 된다고 합니다. 보리심을 일으키는 순간 부처님의 아들이라 불려지고, 신들과 사람들에게 예경의 대상이 된다고 했습니다. 중생을 인도하시는 부처님께서 깊이 사유하신 무한한 지혜의 눈으로 보았을 때 ‘보리심은 매우 존귀한 보배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 보배로운 보리심은 고통스런 윤회와 온갖 죄업을 완전히 소멸시켜주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에 보리심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와 다른 이를 고통과 두려움, 윤회와 죄업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보리심은 귀한 보석이라는 말씀입니다. 보리심은 산스크리트어 ‘보디찟따 - Boddhicitta’로 ‘깨친 마음’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보리심은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깨달음을 이루겠다고 서원하는 마음입니다. 모든 존재들이 무수한 고통을 극복하기 바라며, 그 고통을 없애주고 최고의 행복을 얻게 해주려는 열망을 가지는 것이 보리심입니다. 보리심은 연금액과 같아서 오염되고 탁한 범부의 부정한 몸을 고귀한 부처님의 몸으로 변화시킵니다. 보리심은 지속해서 오래도록 열매를 맺는 나무와 같아 시들지 않습니다. 『대승밀엄경』에서는 보리심을 ‘부처의 성품을 지닌 씨앗, 선업이 자라는 복전, 모든 생명을 지탱하는 대지, 가난을 물리치는 부富, 모든 보살을 보호하는 아버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여의주, 의도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이루어주는 보병’이라고 정의합니다. 

思-사유하기
우리는 매일 일체중생을 행복하고 이롭게 하겠다는 생각이나 다짐, 발원을 얼마나 하시나요? 아침에 일어나면서 이 하루를 살게 된 것을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하시나요? 또한 행운으로 여기고 고맙게, 새롭게 시작하는가요? 달라이 라마 존자님은 매일 아침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오늘 하루 화를 내지 않겠다’는 발원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싶으신가요? 인간이라는 몸과 마음에 대해 얼마의 시간 동안 경이롭고 신비스럽게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듯이 이 존재를 알아차리는가요? 여러분들이 신뢰하고 의지하고 귀의할 만한 분들은 어떤 분들인가요? 그리고 그분들께는 얼마나 자주 공경하고 예를 올리는가요? 공경하는 이에 대한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불자님들은 삼보에 귀의하는 마음을 얼마나 자주 일으키는가요? 

저는 이 글을 준비하면서 샨티데바 스님으로부터 배울 점으로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수행하는 것을 자원으로 마음에 담습니다. 수행한다고 떠벌리고 다니지 않는 것, 말이 앞서지 않고 사유하고 실천하는 것을 티내지 않는 것, 이것이 제가 더 계발해야 하는 부분임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제 눈에 보이는 다른 사람 모습이 전체가 아니라 숨은 전체성과 온전함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다시 새깁니다. 그리고 일체존재를 이롭고 행복하게 하기 위한 보리심을 매일 반복해서 일으키는 것이 제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임을 받아들입니다. 저를 변화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보리심이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애써야겠습니다. 

修-행동하기
이번 한 달 동안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순간, 하루이건, 밥을 먹기 시작하건, 공부나 일을 시작하건, 대화를 시작하건 무엇을 시작할 때 일으키는 마음, 의도가 무엇인지 한 번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리고 그 무엇인가를 할 때 부드럽고 따뜻한 시선으로 일체존재의 기쁨과 행복을 발원하면서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요? 특히 매일 하루를 시작할 때 일체중생의 궁극적인 행복과 상대적인 행복을 위해서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선한 의도를 인식하고 다짐하는 것은 어떨까요? 고맙습니다.


재마 스님 
중앙승가대학교에서 불교사회과학연구소 상임연구원으로 불교의 사회참여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움직이는 법당, 춤추는 절을 꿈꾸며, 매주 소마명상여행을 이끌고 있다. 또한 종교를 초월해 ‘마음비추기’ 피정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완화의료(암)병동에서 매주 환자들과 보호자들을 위한 영적 돌봄 봉사를 하고 있다. 박사논문으로 「사무량심의 가치 재발견과 체화프로그램 개발연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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