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점을 받고 그 후에

젊은 날의 메모

2007-07-01     관리자
 


 


 항상 남의 앞에 서서 우등생의 자리를 지켜왔던 나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일이다. 그 당시는 과학과목이 4학년 때부터 교과과정에 있어 처음으로 과학시험을 치른 후 발표를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난90점 95점 정도는 받을 거야’ 이런 마음으로 선생님께서 불러 주시는 점수에 귀 기우리고 있었다.

 내 이름이 불러지는 순간, 난 하늘이 무너질 것같은 느낌을받았다. 난생 처음 70점이라는 형편 없는 점수를 받은 것이다. ‘못난 놈들이나 받는 점수를 내가 받았구나’ 하는 생각에 며칠동안 얼굴을 못 들고 다녔다. 다음 시험엔 열심히  공부해 성적은 좋아졌지만 영 과학엔 흥미가 없었다.

 국민학교를 고향인 충남 공주에서 졸업한 나는 그 후 서울로 올라와 혜화동에 있는 보성고등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나라 전체의 생활이 어려운 때라 한읍에서 겨우 다섯 손가락 꼽을 정도의 학생이 진학하는 것이 그때 실정이었다.

 공립학교는 보결이 없는 관계로 그 당시 불교재단 사립학교인 보성 학교에 기대도 아니했던 2학년 2학기 입학 시험에 합격 되어 바로 기하시험을 보게 되었고 수학은 공부를 하지 않았다해도 자신이 있었다.

 중간시험을 본 후 적어도 100점 은 맡아논 당상이라고 우쭐하고 자신만만히 앉아 이름이 불러지기를 기다리며 기하 선생님의 얼굴을 쳐다 보고 있었다.

 “홍정식, 기하0점.”

 또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 도무지 0점이라는 점수가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곧바로 기하 선생님을 쫓아 교무실로 내려 갔다.

 “선생님, 제가 0점이라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다른 아이의 시험지와 바뀐 것이 틀림 없습니다.”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이야기 하는 나에게 가히선생님은 내 이름석자가 선명히 드러나는 답안지를 보여주셨다. 0점 이었다. “왜,틀렸는지 모르는구나. 그러면 100점 받은 시험지를 보여 줄테니 대조해 보렴....”

 난 그제서야 내가 기하에 대해 근본부터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고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고 말았다.

 기하 0점. 이점수로는 우선 한학년 진급이 문제가 되었다. 그래 그 뒤부터 무조건 낙제를 면하기 위해 기하를 암기하여 기말시험에 대비 하였다. 다행히도 60점을 받아 3학년에 진급을 겨우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3학년 새로운 담임 선생님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난 또 아찔했다. 원망스럽기만 했던 기하.그 기하 선생님께서 3학년 바로 나의 담임이 된 것이었다.

‘이젠 죽었구나...’ 내내 이런 생각 뿐 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성북동에서 친구와 함께 하숙을 하고 있던 나의 하숙집을 선생님께서 가정 방문 오셨다. 한참 동안 경직되어 있던 나에게

 “너는 기하를 잘하게 생겼는데 왜 기하성적이 그렇게 나쁘니...”

 “선생님 저는 기하시간만 되면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느낌 그대로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나를 선생님께서는 그저 웃으며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재미없이 학교를 다니던 가운데 3학년 여름방학이 되었다. 그때 마침 담임 선생님께서 잠시 집에 다녀가라고 하기에 난 꾸역꾸역 선생님 댁으로 갔다. 선생님께서는 방학 때면 엄청 났던 그 숙제를 나에게 만은 특별히 면제해 주시겠다고 말씀 하셨다. 난 하늘로 뛰어 올라 훨훨 나르는 기분이었다. 정말 좋았다.

 “그런데, 단 한가지 숙제를 내 줄테니 그것만은 해와야 한다.”

 선생님의 말씀은 귀에 들리지 않았다.

 ‘겨우 한가지는 누워 떡 먹기지 뭐...’

 선생님은 당신 책꽂이에서 기하의 머리, 대수의 머리 라는 수학 참고서를 꺼내 오시더니 이 문제를 풀어보고 그 증거로 연습했던 종이도 모두 챙겨오라 덧 붙여 말씀하셨다. 그때서야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로 내려 온 나는 고향 가까이 있던 갑사에 방 하나를 얻어 지겨운 수학공부를 시작했지만 혼자 공부를 하려니 도무지 풀리지가 않았다. 그때 마침 서울의대를 지망하려고 재수하던 고향 5년 선배를 만나 다행히 도움을 받아 40일 여름방학을 무사히 보내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온 나는 선생님 댁으로 연습종이가 가득 든 고릿작을 가지고 들어갔다. 그랬는데 대뜸,

 “숙제는 다했니?”

 “한다고는 했지만 3분의 1정도 뿐이 못 풀었습니다.”

 “증거물은 가지고 왔니? 시험을 치러봐야 겠다.”

 난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친구 같았으면 벌써 한방 쥐어 박고도 벌써 끝이 났는데... 고작 물어보는 말이 숙제이야기 뿐이라니.

 선생님께서 내주시는 문제는 다행히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자신있게 풀어 눈 앞에 펼쳐 보였다.

 그제서야 선생님은

 “여보, 맛있는 것 좀 몽땅 내오구려, 이 아이가 열심히 공부했으니 기쁘구려, 수고했다.”

 “.....”

 머리를 쓰다듬는 선생님 손길을 느끼는 순간 눈물이 핑돌았다.

 그때부터 수학은 우리반에서 최고였다. 어려운 고비를 돌파한 후에야 비로소 진실한 성취가 나타날 수 있음을 실감했던 것이 바로 이때이기도 하였다.

 보통고등학교를 마치며 상급학교 입학 때가 다가왔다. 진학을 서두르고 있었을 때였는데 흉년이 들어 1년 뒤에 학교에 진학하고 당분간 시골 집에 내려와 있으라는 아버님의 편지가 하숙집으로 날아왔다. 낙담은 이루말할 수 없었고 법학공부를 하려던 내꿈이 수포로 돌아가는 느낌, 절망감 뿐이었다.

 아버님 말씀을 따라 무력하게 한달을 시골 집에서 보내고 있었던 때 공비 장학생으로 불교공부를 해보라는 권유를 마곡사 본산에서 요직일을 맡고 계시던 스님이 하셨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불교공부를 하려고 생각은 하지 않았던 터라 쉽게 수락할 수 없었다.

 “참 모르는구나. 앞으로 불교가 발전을 하게 되면 불교계에 인재도 필요하고, 나라에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 같이 똑똑한 인재가 불교공부를 해야하지 않겠니.”

 스님은 우리집에 사흘동안 머물면서 줄곧 불교공부 하기를 거듭 말씀하셨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비로소 공부해 봄직한 학문이라고 생각되어 바로 불교전문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3학년 졸업반이 되었을 무렵, 당시 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계시던 박한영스님의 염송이라는 강의를 듣고 시험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33명의 졸업반 학생들은 1번부터 끝번 학생 모두 스님께서 불러주는 점수를 듣고 있었는데 한결같이 70점이라 했고, 학생 전부는 의아해 하며 앉아 있었다.

 70점이라는 점수에 나는 화가 났다. 어려운 과목이긴 했지만 적어도 그 이상의 점수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래 곧장 교장실로 갔다.

 “스님, 똑같이 70점이면 어느 사람이 공부하겠습니까?” 대뜸 이렇게 말하는 나에게“그래, 너는 좀 더 잘 보았는데 점수가 다른 학생과 똑같아 불평하러 왔구나. 그럼 좋은 수가 있다. 너는 시험을 다시 보도록 하자꾸나.”

 스님 말씀에 난 겁이 덜컹 났다. 당시 불교학에 최고봉이셨던 스님 앞에서 다시 시험을 치룰 용기는 벌써 도망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염송은 깨침을 위해 공부하는 것인데, 깨친 놈이나 덜 깨친 놈이나 그게 그것인데 불평할 일이 아니다. 그것부터 네가 알아야 하느니라. 널 미워해서 그랬겠니...”

 아직까지도 귀가에 생생히 맴도는 말씀이었다. 마지막으로 70점이란 점수를 받아 본 웃지 못할 일이 또 벌이지긴 했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해방이 된 후에 나는 당시 불대학장으로 계셨던 김잉석선생님의 추천으로 동국대학에서 불교학 강의를 맡아 이 때부터 본격적인 불교공부를 하게 되었다.

 어려운  시대 상황에도 별 탈없이 불법을 공부하게 된 것은 모두가 부처님의 커다란 은덕이라 생각되니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공덕이 나에게도 있다면 일체중생 모두에게 회향하여 불제자의 도리를 다하고 싶은 마음 간절 하다.

 ‘산은 스스로 무심히 푸르고 구름도 스스로 무심히 희니 그중에 덕 높은 훌륭한 스님 역시 산과 구름으로 무심객이네’ 시귀와 법화경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불승의 훌륭한 사상과 더불어 있으니 항상 기쁜마음 그지 없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