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만나다] 유식唯識 (6)

화내는 타인은 바로 나다 

2017-01-09     김사업

화내는 타인은 바로 나다 

- 유식唯識 (6)
 
김사업
| 그것 말고 또 뭐가 있겠습니까?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에게서 “포클레인 기사님들은 일반적으로 자존심(?)이 강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공사를 하다 보면 포클레인 작업 이외의 일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뭣 모르고 그런 일들을 도와 달라고 하면 포클레인 기사님들은 내심으로 무척 자존심이 상해서 참다가 어느 때 말없이 깨끗이 손을 털고 공사장을 떠나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곧잘 있다고 했다.
 
수년 전 이곳 오곡도 공사를 하면서 만난 포클레인 기사님은 당시 50대 중반의 베테랑이었다. 포클레인을 다루는 기술도 뛰어났지만 일을 보는 안목도 명석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비록 좀 덜하긴 했지만, 포클레인 기사의 자존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때 함께 일한 것이 인연이 되어 그는 오곡도에 공사가 있을 때면 단골로 들어와 상당 기간 같이 머물면서 우리와 함께 축대를 쌓는 등 여러 일을 했다.
 
이렇게 같이 생활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불교와 선禪에 대해 듣게 되었고, 이곳의 1주일 선 집중수련회에도 몇 번 참가했었다. 그러는 사이 까칠했던 그의 마음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쪽으로 변해 갔고, 쓸데없는 자존심은 자신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름대로 깨달은 듯했다. 그 후 근 2년가량 오곡도에 들어오는 일이 없었지만, 그래도 바빠서 들어가지 못한다는 소식은 간간히 전해 왔다.
 
며칠 전에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무 바빠서 인사하러 갈 틈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불황에 일거리가 없어서 힘들어하는데 어째서 그런 행운을 얻게 되었는지 물었다. 예순의 나이를 갓 넘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곡도에서 배운 대로 가짜 자존심 내려놓고 공사를 맡긴 주인의 입장에서 열심히 포클레인 일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공사를 의뢰하는 사람들이 많아, 한 달에 쉴 수 있는 날이 단 이틀밖에 없습니다. 일요일도 없습니다. 지금은 마음도 편하고 잡념 없이 그냥 일만 술술 합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다가 때가 오면 눈 감으면 되지, 그것 말고 또 뭐가 있겠습니까? 다 오곡도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다가 때가 오면 눈 감으면 되지, 그것 말고 또 뭐가 있겠는가?
 
| 에너지와 물질, 마음과 몸
과학의 발달로 물질과 에너지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물질과 에너지는 마치 얼음과 물의 관계와 같아서 서로 전환되며 동일한 것의 다른 표현(等價)이라고 한다.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가장 작은 알갱이의 물질이 소립자이다. 우리가 물질의 최소 단위로 흔히 알고 있는 원자도 이 소립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물질의 최소 단위는 원자가 아니라 소립자이다. 제일 먼저 발견된 소립자가 전자이며, 현재까지 알려진 소립자는 약 300여 종에 이른다고 한다. 
 
현대 과학은 이 소립자의 세계에서 물질은 소멸하여 에너지가 되기도 하고(전자쌍 소멸), 반대로 에너지로부터 물질이 만들어지기도 한다(전자쌍 생성)는 것을 밝혀내었다. 또한 전자의 경우처럼 동일한 소립자가 물질과 에너지의 양면을 동시에 갖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전자는 어떤 때는 물질(입자)로 작용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에너지(파동)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대 물리학의 물질관은 물질과 에너지는 서로 별개의 고정된 영역에 속한 것이라던 종래의 생각을 뿌리째 바꾼 것으로, 불교의 공空 사상과도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물질이 물질로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서는 에너지가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생겨날 뿐이다.’는 연기를 말함이요, 동시에 ‘모든 것에는 고정불변의 자성이 없다.’는 공을 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현대 과학의 발견을 언급한 것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유식을 어떻게 하면 일반인에게 납득시킬까 하는 고심에 따른 것이다. 유식(唯識, vijñapti-mātra)이란 ‘모든 것은 마음의 나타남, 즉 마음의 현현顯現일 뿐’이라는 뜻이다. 나에게 강이 보이는 것은 우리의 통념처럼 나와 강이 별도로 있고 강이 거울에 비추어지듯이 내 마음에 그대로 인식된 결과가 아니다. 실제로 있는 것은 내 마음이 저 강의 형상을 띠고 나타난 것뿐이다.
 
등불은 밝게 빛나는 것만으로 자신의 모습이 드러난다. 자신을 비추는 별도의 작용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은 어떤 형상을 띠고 나타나는 것만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별도의 작용은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 형상을 스스로 인식하게 된다. 강의 형상으로 나타난 마음만이 있다는 것이 유식이요, 그것이 진실이다. 강을 보는 나도 없고, 나의 외부에 강도 없다.
 
그러므로 내가 경험하는 이 세계는 모두 마음의 나타남이다. 미운 놈도 내 마음의 나타남이고, 사랑하는 연인도 내 마음의 나타남이다. 희로애락의 대상 모두 내 마음의 나타남이다. 유식은 내 몸(有根身)과 내가 살고 있는 산하대지의 자연계(器世間)도 내 마음, 그중에서도 아뢰야식의 나타남이라고 한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마음이 미운 놈의 형상을 하고 나타나는 것은 과거에 그런 형상이 나타날 만한 종자를 내가 아뢰야식에 심었고, 그 종자가 지금 때가 되어 미운 놈 형상의 마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과정을 상세히 밝히고 있는 것이 식전변설이다.
 
신체적 행위와 말과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과 선악의 성질이 동일한 종자가 아뢰야식에 심어진다고 했다. 유식은 모든 것이 마음의 나타남이라 보기 때문에 신체적 행위와 말과 생각도, 곧 신・구・의 3업도 모두 마음의 나타남이고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이 의도(意思)를 동반하여 일으키는 작용이 곧 신・구・의 3업이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여기서는 의도를 동반하여 마음이 일으키는 작용을 업이라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의도를 동반한 마음의 나타남이 곧 업이다. 
 
말에는 한계가 있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게 표현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도 많아져서 고심을 거듭하는 경우가 꽤 있다. 이쪽을 살리자니 저쪽이 무너지는 꼴이다. 마음이 어떤 작용을 일으킨다고 말하면 이해하기는 쉽다. 동시에 마음이라는 고정불변의 뭔가가 있어 이것이 여러 작용을 일으킨다고 오해하기도 쉽다. 결과적으로 마음을 아뜨만과 같은 자성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마음은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생겨났다가 조건이 다하면 소멸하는 연기적 존재요, 찰나적 존재이다. 반짝 빛났다가 다음 순간 소멸하는 빛과 같다. 찰나적으로 생했다가 멸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고정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오해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생멸의 반복이 틈이 없을 정도로 연속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불빛이 조금의 간극도 없이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면 마치 계속 켜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이상의 사정을 감안하여 ‘마음의 작용’이라는 표현을 일단 ‘생멸을 반복하는 마음이 조건에 따라 그때그때 특수한 형상을 띠고 나타남 또는 그 나타남의 연쇄’란 뜻으로 이해해 주기 바란다.
 
위에서 물질과 에너지는 동일한 것의 다른 표현이라고 했다. 에너지는 물질로 전환된다. 이렇게 전환되어 물질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이것은 에너지와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다. 에너지의 특별한 상태, 에너지의 밀도가 높은 상태가 곧 물질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의 작용은 에너지에 가깝다. 중생인 우리에게는 미운 놈・연인・몸・자연계 등이 마음의 나타남으로서가 아니라 실물로 보인다. 이것은 물질에 가깝다. 에너지에 의해 생겨난 물질이 비록 물질의 모습을 하고 있고 물질로 보이고 있다고 할지라도 진실은 에너지와 다른 것이 아니듯이, 미운 놈・연인・몸・자연계 등도 마음과 별개인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진실은 마음 작용으로 생겨난 것이며 내 마음과 다른 것이 아니다.
 
에너지의 밀도가 높은 상태가 물질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몸이 아뢰야식의 나타남이라는 것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유식은 아뢰야식과 몸은 ‘안위동일安危同一’의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양자는 안락함과 위태함을 함께 한다는 뜻으로, 한 덩어리라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의학적으로도 밝혀졌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경쾌하고 밝을 때는 몸을 건강하게 하는 호르몬이 배출되어 몸도 경쾌하게 되고, 마음이 침울할 때는 건강을 해치는 호르몬이 배출되어 몸도 상하게 된다는 것 등이다. 
 
값비싼 보약보다도 마음 편한 것이 건강에는 더 중요하다. 대학생 시절 어머니에게 안부 인사드리러 고향에 간다는 나의 말을 들은 한의사 한 분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것보다 어머니에게 더 좋은 보약은 없습니다. 기쁨을 주는 자식이 부모님에게는 최고의 보약입니다.”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말 한마디, 이것으로 가족과 직장 동료와 이웃에게 최고의 보약을 선사할 수 있다.
 
| 분노에 가득 찬 사람은 화내는 사람과 만나기 쉽다
마음 작용이라는 에너지가 청정하면 그 에너지에 의해 나타나는 몸과 경험 세계도 청정하게 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분노에 가득 찬 사람은 화내는 사람과 만나기 쉽다고 한다. 이 말은 어떤 점에서는 유식과도 통한다. 화내는 타인은 분노라는 내 마음의 에너지에 의해 생겨난 형상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분노하면 분노할수록 화내는 사람을 만날 확률도 높아진다. 다만 유식은 화내는 타인이 말 그대로 타인이 아니라, 내 마음의 나타남, 즉 바로 나 자신이라고 말한다.
 
정갈한 마음과 바른 생각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하면, 몸도 건강해지고 선량한 사람을 만나며 아름다운 광경을 보게 된다. 이곳 오곡도 수련원에서 꽤 오랫동안 선禪 수행한 분 가운데 중학교 선생님 한 분이 있다. 그는 첫인상부터 맑고 진솔했는데 수행도 올곧게 잘 했다. 언젠가 수행 마지막 날 총평 시간 때 그는 우연히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평상시 본인은 아침에 일어나 정신을 가다듬고 그날 처음 내는 맑은 목소리로 이곳 수련원의 발원문을 읽는다고 했다. 그때서야 동석한 많은 사람이 그가 인상이 맑고 주위 사람들에게서 신뢰와 존경을 받는 큰 이유를 알았다. 
 
우선 매일 잡념 없는 맑은 정신으로 발원문을 읽으면서 하루를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은 것 자체가 보통 일은 아니다. 이미 그의 됨됨이가 여기에 다 반영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 뒤 결심한 대로 매일 빠짐없이 발원문을 읽고 그 내용을 새기면서 생각하고 말하며 생활한 그 에너지가 그를 더욱 진실되게 한 것이다.
 
화두 참구를 통해 모든 구속에서 자유로운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간화선 수행은 말할 것도 없지만, 아침 예불도 우리의 인품과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친다. 고요한 새벽의 미명에 올리는 아침 예불. 아침 예불을 하고 안 하고에 따라 하루 생활에 차이가 많이 난다. 예불문은 아침과 저녁 예불에 따라 첫 부분에서 약간 차이를 두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부처님께 다섯 가지 향을 일심으로 살라 올린다는 의미를 담은 다음의 구절로 시작한다.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이 다섯 가지 향을 오분법신향五分法身香 또는 오분향五分香이라고 부른다. 오분법신이란 최고의 깨달음에 이른 성인이 구비한 다섯 가지 공덕을 말하는 것으로, 계・정・혜・해탈・해탈지견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오분법신향은 최고의 가치를 담고 있는 향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향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전단향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다. 당나라 때 무착無着 스님이 중국 산서성山西省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받은 게송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공양구란 부처님이나 부모, 스승 등에게 올리는 물건이나 그 물건을 올릴 때 사용하는 용구를 말한다. 부처님에게 올리는 가장 참다운 공양구는 명품 차도 아니고 값비싼 대리석 향로도 아니다. 평소의 맑고 청정한 얼굴, 그것이 최고의 공양구이다. 아무리 명품 차를 올리고 값비싼 촛불을 켜도 화내고 찡그리는 탁한 얼굴을 한다면 헛일이다.
 
한 갑에 몇십만 원 하는 향이나 전단향이 최고의 향이 아니다. 부처님께 올리는 가장 좋은 향은 상대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부드러운 말 한마디이다. 희망과 용기를 잃은 이들에게 꿈과 힘을 주는 말 한마디, 양보하는 말 한마디, 험악한 분위기에서도 상대의 마음에 평정을 되찾게 하는 말 한마디, 누구에게도 해악을 끼치지 않는 말 한마디, 매사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말 한마디가 최고의 향이다.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향기가 천지를 진동한다.
 
어떤 것이 부처님 마음일까?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부처님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아서 변함이 없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내 마음이 티 없이 깨끗해 진실하다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 마음이다. 
 
몸으로는 성 안 내는 종자를 심고, 입으로는 부드러운 말 한마디 종자를 심으며, 마음으로는 티 없이 진실한 종자를 심어 나가는 사람이 구도자이다. 만만치 않지만 그래도 옆길로 새지 않고 이런 종자를 하나둘 심어 나가는 사람, 그가 바로 구도자이다.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예불에서 이 구절을 독송하는 순간은 내가 계향이 되고 정향이 되고 혜향・해탈향・해탈지견향이 되어야 한다. 나의 온 존재가 부처님께 올리는 최고의 향이 되어야 한다. 한 티끌의 잡념도 없이 내가 향 그 자체가 될 때, 내 마음과 목청이 내는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의 그 청정한 소리는 내 몸을 울리고 내 주위를 울리고 온 우주를 울린다.
 
예불문에 나오는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에서 ‘지심至心’은 지극한 마음이고, ‘귀명歸命’은 목숨을 다해 그 하나만을 향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지심귀명’은 온 몸과 마음을 다해 그것 하나만 하는, 혼을 다한 정성이며 절절함이다. 참으로 우주를 움직일 정도의 정성이다. 지심귀명례란 이런 지극한 마음으로 예를 올리는 것이다.
 
예불문의 마지막은 “오직 바라오니, 다함없는 불・법・승 삼보시여, 대자대비로 저의 이 지극한 예를 받으시고 그윽한 가피를 내리시어, 모든 중생이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로 끝을 맺는다. 이렇게 지심귀명으로 예불한 에너지가 내 몸을 만들고 내 주위를 만들고 이 세상을 만드는 데 눈에 보이지 않는 큰 몫을 한다. 
 
다가오는 정유년 새해 첫 새벽,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정신을 가다듬고 뜻을 온전히 하여 예불을 올리고 발원을 할 것이다. 
 
모든 중생이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청명한 겨울밤의 별빛 같은 마음을 잃지 않는 자비의 수행자가 되기를.
 
 
김사업
오곡도 수련원 부원장.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ㆍ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불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유식설에서의 연기 해석」, 「선과 위빠사나의 수행법 비교」 등이 있다. 김사업 부원장은 장휘옥 원장과 함께 전문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대학 강단을 떠나 남해안의 오곡도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했으며, 2003년부터는 간화선 수행에만 전념하여 일본 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 지도로 900여 회에 이르는 독참을 통해 피나는 선문답을 나누며 수행해 왔다.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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