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구병의 평화모니] 반야의 공

2017-01-09     윤구병

반야의 

 
광화문에서 열리는 촛불집회에 여러 차례 갔다. 국회에서 탄핵 결의가 있기 전에도 갔고, 탄핵이 의결된 뒤에도 갔다. 걱정스러워서였다. 쪽수 하나라도 더 보태고 싶었다. 병든 시골 늙은이까지 먼 길을 나서게 한 이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힘은 ‘함’과 ‘됨’ 두 갈래로 나뉜다. 옛날에 ‘하면 된다’고 떠들던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하는 대로 꼭 되는 것은 아니다. 함에도 결이 있고 됨에도 결이 있다. 저 언덕으로 건너는 물길은 고르지 않다. 크고 작은 물결이 뱃전에 부딪힌다. ‘아누다라삼먁삼보리’, ‘무상정등정각’(더할 나위 없이 고르고 바른 깨우침)이 거친 마음결을 잠재워야 한다. 마음을 뒤집는 가장 큰 물결은 두려움이다. 『반야심경』에서 눈여겨봄직한 말은 ‘마음에 거리낌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다’(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로 여겨진다.
 
지나치게 큰 힘은 거센 바람을 일으키고 그 바람은 물결을 뒤집는다. 마음결도 다르지 않다. 두려움은 거센 바람결이다. 이 바람을 안고는 저 언덕에 이를 수 없다. 세속적으로 따지면 나라는 큰 배이고, 그 안에 너도 나도 실려 있다. 우리에게 나라는 대한민국도 아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아니다. 그런 나라는 국제법상으로만 있다. 제주도 오름 언저리에 살거나 자강도 한 모퉁이에 살거나 가릴 것 없이 한반도에 몸 붙이고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다.
 
이 우리나라 사람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북녘의 핵무기와 남녘에 주둔하고 있는 주한미군이다. 이 걸림돌을 없애는 길은 우리나라가 ‘영세중립국’이 되는 길이다. 영세중립은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 임금도 바랐고, 그 뒤로 조선의 김일성도 대한의 김대중도 입에 올렸다. 구한말 고종의 말을 귀담아들었던 나라는 러시아뿐이었다. 이름이 ‘청’이었던 중국은 속국인 주제에 시건방을 떤다고 콧방귀를 뀌었고, ‘필리핀은 우리가 먹고, 조선은 니네가 먹고’ 하는 귓속말을 일본과 주고받던 아메리카합중국은 어느 집 개가 짓느냐고 코웃음을 쳤다.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중국까지 넘볼 욕심이 가득했던 일본은 두말할 것 없이 손사래를 쳤다.
 
김일성과 김대중의 중립화 내용은 나도 모른다.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그 내용을 잘 아는 사람은 남북을 다 살펴도 몇 안 되리라. 이제부터라도 알려고 애써야겠지. 알리려고도 애써야겠지. 다행히 SNS에는 ‘한반도 영세중립국’ 논의가 적지 않게 실려 있다. 어쨌거나 이 문제는 남녘이나 북녘의 체제담당자들 손에 맡겨둘 일이 아니다. 먼저 이 나라 사람 모두가 영세중립을 외쳐야 한다. 여기에는 남북이 따로 없고, 남녘에서도 여·야, 보수·진보가 따로 없다. 승·속이 따로 없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 힘만으로는 모자란다. 힘없는 나라의 외침이 메아리 없이 잦아드는 꼴을 우리는 구한말 고종의 모습에서 보았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끌어내야 한다. 한 줌도 안 되는 전쟁광들과 죽음을 사고파는 무기 상인들을 뺀 온 세계의 평화세력과 손을 잡아야 한다. 그 가운데서도 이 땅에서 다시 전쟁이 벌어지면 어쩔 수 없이 전선에서 맞설 수밖에 없는 아메리카합중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평화세력들을 우리 쪽으로 끌어당겨야 한다. 평화를 사랑하는 이 나라 사람들이 그 몸과 마음이 남녘에 있든 북녘에 있든 모두 나서서 친일파, 친미파, 친중파, 친러파의 딱지가 붙더라도 그 나라 사람들에게 울타리가 되어 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그래서 UN의 의결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남과 북이 한 목소리를 내야겠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한반도 전체를 ‘비무장지대’로 만들어야겠지. 그러면 저절로 핵무기도 사드 포대도 자취를 감추겠지.
 
불교 용어에 ‘중도中道’라는 말이 있다. ‘중립’이라는 낱말은 ‘중도’라는 낱말에 맞닿아 있다. 그런데 ‘중립’이라는 말은 남녘에서도 북녘에서도 빈말이 되어버렸다. 가파르게 기울어진 땅에서는 중립이 불가능하다. 한가운데 서겠다는 사람은 그 뜻은 갸륵할지 모르나 아래쪽으로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시소를 머리에 떠올리면 된다. 한쪽에는 힘 있는 놈이 그 힘으로 내리누르고 다른 한쪽에는 힘없는 사람이 하늘 쪽으로 들려 있는 판에 가운데 서겠다고 우기는 사람은 힘 있는 쪽에 서겠다고 이미 마음먹은 사람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아누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서 ‘삼먁’은 ‘바로 고름’(정등 -政等)을 뜻한다. 잔잔하게 결 고른 물을 머리에 떠올리면 된다. 두려움이 불러일으킨 거친 마음결이 잠잠해졌다. 그 물길에 잦아들었다. 이 물길(마음결)이 바로 ‘중도’다. 거기에 띄운 배에 올라야 ‘중립’이다. 
 
『반야심경』 첫머리에 나오는 스스로 있음을 살피는, 또는 스스로 그렇게 있도록 보살피는(觀自在) 깨친 이(깨달은 이)는 다른 이름으로 세상 소리 살피는(觀世音) 보살이기도 하다. 스스로 있음은 세상 소리로 드러난다. 이 보살은 마음을 기울여 저 언덕에 이를 배를 젓는다. 이 배 안에는 온 누리의 톨과 결로 가득 차 있다. 싣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함과 됨으로 이루어진 힘이 여기에 곁들인다. ‘것’(色-‘톨’로 바꾸어도 같은 뜻이다), ‘받음’(受-‘됨’으로 옮길 수도 있겠다), ‘생각’(想-마음에 빚어지는 꼴), ‘다님’(行-닿고 거님, ‘함’으로 옮길 수도 있겠다), ‘앎’, 또는 ‘알음알이’(識-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같다, 다르다로 갈라서 주고받는 말로 이루어진 앎) 이 ‘다섯 얽힘(五蘊)’이 모두 비어 있음을 밝혀 본다. 그것들을 되비치는 거울은 비어 있다. 그 어느 것도 제 모습을 지켜내지 못 한다. ‘늘 없음(無常)’이다. 뱃전을 무섭게 흔들어대던 거친 물결은 잔잔해졌다. ‘마음 놓으시오(放下着)’, 마음 놓인다. 마음 놓는다. 힘은 그대로 남되, 함과 됨으로 갈라서지 않았다. 저 언덕이 보인다. ‘가득 빔(滿空)’이다. ‘경허’에서 ‘만공’에 이르는 길이다.
 
조선 불교는 ‘원효’(元曉 사복-우리 말 새벽의 한자 표기)에서 동터 ‘보조’(普照-두루 비춤)에서 한낮을 맞았다가 ‘서산’(西山-해는 서산에서 진다)에서 저물었다고 하는 이도 있다. 그럴싸한 말이다. 그러나 그런 소리가 빈말임을 경허가 몸 보이고 만공이 뒤이었다.(내 생각이다.) 
 
조선이 고구려, 신라, 백제로 갈라서고, 이제 남과 북으로 맞서 있지만 그래도 뭇산이(중생)들에게는 예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일 뿐이다. 땅이 어디 가나. 그 안에서 움 돋고 꽃 피고 열매 맺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뭇톨들이, 그리고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결이 어디 가나. 시원한 바람결에 땀 가시는 살결, 즈문 가람(千江)에서, 너른 바다에서 물결 속에 낯 씻는 달. 모두 비어 있다.
 
‘맞섬(罣碍)’이 없으니, 맞난다(만난다). 씨앗이 움터 떡잎이 마주 나듯이 맞나서 햇살을 받는다. 달빛을 맞이한다. 이것이 ‘마지’다 마음이 맞나야 한다. 남북으로 갈라서서 70년이 넘게 서로 맞서고 있는, 맞세움 당하고 있는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우리는 다시 만나 하나가 되고, 한결같이 잘 살아야 한다. 비워야 빈다. 맞서지 않으면 걸림돌이 사라진다. 길을 가로막는 돌부리가 없으면 걸려서 엎어지게 만드는 두려움이 사라진다. 암초가 없어진다.
 
‘남북분단’은 우리 뜻이 아니었다. (지금도 우리 뜻이 아니다.) 핵무기 개발도 미군 주둔도 우리 뜻이 아니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자는 것을 한사코 마다하는 전쟁광들과 죽음의 상인들이 사이에 들어 벌이는 ‘죽임 잔치’다. ‘죽임’에 맞서는 말은 ‘살림’이다. 살림은 누구 몫인가. 누가 살림을 잘 하는가. ‘여자’로 사람 사이에 드러나는 ‘암’의 힘이다. 노자 『도덕경』 6장에 나오는 현빈玄牝이다. ‘검은 암의 열림. 이를 일러 하늘과 땅의 뿌리라 한다.(玄牝之門是謂天地之根)’ 
 
공(空, 빔)은 밝지 않다. 어둠에 잠겨 있다. 희지 않고 검다. 모든 ‘것(色)’을 내치는 힘은 ‘흼’으로 나타난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힘은 ‘검음’으로 감추어진다. 빛의 간섭이 없는 하늘은 검다. ‘하늘’은 ‘검’이다. ‘땅’도 ‘검’이다. 이 안에서 모든 게 움트고 자란다. 살림을 차린다. 이 땅에 평화를 가져다 줄 힘은 ‘버시(남자)’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가시(여자)’로부터 나온다. 그렇다고 갈라세워서는 안 된다. 맞서게 해서는 안 된다. 
 
이어진 것만이 결을 이룬다. 톨로 흩어지지 않는다. ‘오온’이 저마다 흩어지려는 톨의 움직임이라면 ‘공’은 이것들을 꼬아서 잇는 결의 흐름이다.
 
다시 비구니 ‘명성’을 생각한다. 살아 숨쉬는 ‘현빈’. 모든 것을 받아 안아 검게 탄 그 마음. 박근혜 같은 사람도 그 품에 안기면 좋았으련만 끝까지 맞서겠다고, 만나지 않겠다고 하니, 이를 어쩌랴.
 
 
윤구병
서울대학교 철학과와 대학원을 나오고 월간 「뿌리깊은나무」 편집장을 거쳐 충북대학교에서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 1995년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전북 부안으로 낙향, 농사를 지으면서 대안교육을 하는 ‘변산교육공동체’를 설립해 20여 가구가 함께 생활하고 있으며, 어린이 전문 출판사인 보리출판사를 설립해 많은 어린이 책을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