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초와 돈연

불법 만남의 기쁨

2007-07-01     관리자

불법 만나는 기쁨을 한두마디로 끝낼 수는 없다. 그 계기도 여러 가지다. 그중의 하나. 부처님께서 밟으셨던 기를 몸소 밟아간 두 승려 혜초와 돈연의 시와 기록을 대조하며 읽어 갈때의 감동 역시 또 하나의 반가운 불연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틈틈이 일삼아온 서구불교순례의 체험을 통해서 나는 그들의 감회를 더욱 실감나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대는 서번(西蕃)이 먼 것을 한탄 하나 나는 동방으로 가는 길이 먼 것을 한탄하노라.

 길은 거칠고 엄청난 눈이 산마루에 쌓였는데

 험한 골짜기에는 도적떼가 우글거린다.

 새들은 깎아지른 벼랑 위를 날고 사람은 좁은 다리 건너가기를 어려워 한다.

 평생에 눈물 흘리는 일이 없었는데 오늘만은 천줄이나 눈물을 흩뿌리는구나.

 

 이것은 신라사람 혜초가 토화라국(지금의티벳 변경) 어귀에서 그 쪽 방향으로 찾아가는 중국 사신을 만났을 때 읊은 시이다. 눈물을 흘렸다 하니 나그네 길의 쓸쓸함과 고달픔이 오랜 세월 끝까지 그대로 살아남아 메아리 쳐온다.

 혜초가 금강지를 만나 그의 권유로 인도를 향해 출범한 것은 서기 723년, 그의 나이 20세의 약관 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신강성고차로 긴 도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 727년이었으므로 이 시가 쓰여진 것은 그 지점으로 미루어 725년에서 6년으로 넘어가는 삼동의 어느날로 추산된다.

 혜초의 뒤를 그대로 밟아 보겠노라고 천년 하고도 이백년이 더 되는 세월 끝에 스님 한분이 인도에 갔다. 그러나 그 옛날 비행기나 기차가 없었던 시절에 도적떼를 피해가며 누벼갔던 길을 20세기의 승려는 끝까지 밟아 갈 수가 없었다 한다. 갖은 문물과 제도의 발달은 비자와 여건과 이데올로기의 높은 담을 창출해던 것이다. 그래서 돈연스님은 ‘갈 수 있는데 까지는 갔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순례는 왕오 천축국전이 아닌 한권의 시집 ‘순례의 노래’로 우리 앞에 제시되었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걷다가 다 다른 남천축국 어느 마을 용수 보살이 야차신을 시켜서 절을 짓게 했다는 데서 돈연이 지은 시귀에 잠시 귀를 세워보자.

 

 오랜 잠속

 용궁이 되어버린 나가르주나 콘다

 뜨거운 여름 햇빛이

 푸른 호수에 쏟아진다

 할아버지가 남기신 논리는

 시간의 지층되어

 나가르주나 호수처럼 역사에

 고여 있습니다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끊어진 것도 아니고

 이어진 것도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 아니어서

 영원의 시간을 합친

 언어의 마술사

 용수 할아버지

 당신의 집은

 지금 용궁속

 용나무는 용궁속에서 우거져야

 제격이니

 천지창조의 이치에 따라

 고향 마을을 만드셨군요

 ........

 당신께서는

 깊은 정신의 계곡으로

 먼 땅의 백성들까지

 텅 빈 골속을 꽉꽉 채우시고

 역사의 현장까지

 물에 잠기게 하셨군요.

 

 혜초는 용수보살의 생존 당시에는 3천명의 승려가 절에 상주했으며 매일 열다섯섬의 공양미가 들어왔다고 회고하고 있다. 세월이 바뀌면 강산도 바뀌고 절의 모습도 바뀔 수 있으리라. 제 자리에 머무는 것은 구도자의 마음 자세 뿐이며 끊이지 않는 것은 그들 순례자들의 발길 뿐이다. 그 때만 해도 황폐하게나마 지상에 머물었던 절이 돈연이 갔을 때는 흔적도 없이 물속에 가라앉지 않았던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의 필사본은 지금 불란서에 가있다. 언젠가는 돌아와야 하겠고 나들이 치고는 좀 멀리 가 있는 셈인데 거기까지 가게 된 경위를 살피면 이렇다.

 서기 5, 6세기 전후하여 이룩되기 시작한 돈황의 막고굴이 그 속에 감추어온 고서, 회화, 직물등 문화재를 왕 아무개의 손을 빌어 처음 밖으로 드러낸 것은 1900년의 일이었다. 그 후 러시아 영국 불란서 일본 미국 등은 앞을 다투어 들락 거리면서 불과 1, 2십년 사이에 감언이설과 뇌물로 많은 것을 빼돌렸다. 그들이 지불한 돈은 물건의 대가라기 보다 뇌물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영국의 A. 슈타인, 불란서의 페리오, 일본의 오다니는 돈황의 3대 도적으로 일컬어진다.

 그런데 왕오천축국전과 직접 관계가 있는 사람은 페리오다. 그는 1907년 8년, 9년, 세차례에 걸쳐 가장 알차게 내용물까지 검토해가며 실어 날랐는데 왕오천축국전은 두 번째 보따리에 묻어갔다. 천불동의 문화재가 11세기에 서하의 침략에 대비하여 밀봉된 것은 차라리 다행하다 하겠으며, 페리오의 면밀한 연구 조사로 혜초의 것임이 밝혀진 것도 고마운 일이기는 하나, 그렇게 멀리 가 있다는 사실은 못내 서운한 일이다. 하긴 그것 역시 원본이 아닌 필사본 일 바엔 그것이 항간에 나도는 두루마리 족자에 담긴 왕오천축국전과 다를게 무어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법정신 문화의식에는 그러한 기능주의가 범하지 못할 향수가 짙게 깔려 있게 마련이다. 그 향수라는 것이 곧잘 인간적 이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 아리숭 하면서도 끈질긴 구속력을 갖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하지 못한다. 한발 더 나아가서 혜초가 중국 승려가 아니라 신라인 이었다는 것이 일본 학자에 의해 밝혀졌다면 이 사실 역시 무심히 들어 넘길 수 만은 없는 야릇한 느낌을 안겨 준다. 민족혼을 부추기는 푸념은 이 쯤에서 그치고 왕오천축국전을 들쳐보기로 하자.

 “그들은 삼보를 사랑하지 않는다. 맨발에다가 벌거벗고 있으니 외도들이라 옷을 입지 않는다”로 시작한다.

 한달 후에는 석가가 열반에 드신 쿠시나가라에 다다른다. 거기 세워진 탑과 하늘에 휘날리는 깃발 그리고 해마다 8월 8일 승려과 속인이 대거 모여들어 불공을 드린다는 이야기와 30여 채로 구성된 사반다사를 청소하고 있는 선승들의 이야기 하며 참으로 현장감이 넘치는 르포라 하겠다.

 다음 행선지는 석존의 도반이었던 다섯 비구가 처음으로 설법을 들었던 바라나시, 이어서 녹야원, 구시나가라, 왕사성, 마하보디의 네 영탑이 들어선 마가다국이다. 이렇게 시작된 혜초의 발길은 남인도까지 내려갔다가 북상하여 지금의 카시미루,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페르샤, 터어키, 중앙아세아를 거쳐서 천산남로에 접어들게 된다.

 마지막 귀착지인 고차에서 3대 씰크로드의 개문인 돈황까지의 변두리 지방은 5세기에는 현장이, 그리고 8세기에는 혜초와 오공이 지나간 곳이다. 그 밖에는 동서의 대상들이 수 없이 글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13세기에는 이태리 사람 마르코포오로가 그 곳을 통과하여 원 나라에 이르렀던 것이다.

 혜초의 기행은 나라 이름만 열거해도 서른에 가까운 먼 여로의 견문기 이다. 좀더 길고 상세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없는건 아니나 희귀한 자료로서의 값어치는 나름대로 인정받고 있다. 불교를 믿는 나라 안 믿는 나라, 불교중에서도 대승불교가 성행하는 나라, 대승과 소승을 병행하는 나라의 사정을 낱낱이 적어내려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나라마다의 시대상과 풍속이 간략하게 나마 거침없이 수록되어 있다. 일명 배화교로 알려지고 있는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투루판국 사람들은 불교를 알지 못할뿐만 아니라 수염과 머리를 깎고 털모를 쓰기 좋아하며 어머니나 자매와도 혼인을 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투카라국, 카피스국, 바미얀국, 자부리스탄국 같은데서는 형제가 몇 명이 되건 한 사람의 아내를 공동으로 맞이하는 해괴한 풍속이 있는데 그것은 결혼으로 인해 형제들이 뿔불이 흩어질까 두려워서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4,5년전 영국의 심리학자이자 티벳불교 전문가로 티벳에 열다섯번이나 다녀 왔다는 크룩교수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같다. 그렇다면 그곳 풍속은 천년을 두고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왕오천축국전은 단순한 견문기가 아니다. 군데 군데 보석처럼 박혀 있는 시귀절에서 승려 혜초의 또다른 옆모습을 발견한다. 순례자의 마음과 눈과 귀는 부처님을 향해 크게 열려있다 하겠으나 새로운 문물을 접하는 신선한 기쁨이 그의 육신의 피로를 늦끄워 주기도 했고, 휘영청 밝은 달이 그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순례자의 길은 구법과 시가 둘이 아닌 하나로 아로새겨진다. 그래서 혜초와 돈연은 같은 길을 걸었고, 또 나그네는 똑같이 길에서 시를 썼다.

 혜초의 시를 한 수 더 들어보자 돈연이 나가르주나를 찬탄한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여수를 달래고 있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 구름은 너울너울 고향을 돌아가네.

 나는 편지를 봉하여 구름편에 보내려하나

 바람은 빨라 내 말을 듣기 위해 뒤돌아보지 않네.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다른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해가 뜨거운 남쪽에는 기러기가 없으니

 누가 내 고향 계림으로 나를 위해 소식을 전할까.

 

 이제 또 돈연은 “부처님도 현장도 혜초도 모두 이 길을 걸었다”고 부연하면서 부다가야에서 녹야원으로 가는 일주일코스, 2백 40리의 도보여행에서 그의 감회를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여섯째 날

 아아 좋았다

 오늘 하루는 정말 좋았다.

 그렇지만 오늘은 백리 가까운 길을 걸았다.

 바라나시 전방 75키로부터

 털보식당

 지친 다리를 풀며 그렇게 적었다.

 

 일곱째 날

 늙은 사두가 지키는 힌두사원

 거지 소녀와 나란히 누워 별을 바라본다.

 내일은 녹야원으로 입성한다.

 뜨거운 열정이 낱낱이 세포를 깨운다.

 석탄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그리고 그는 마치 무슨 결론이라도 내리려는 듯이 이렇게 종지부를 찍는다.

 

 아무것도 타인일 수 없는

 한 나무에 내리는 비여

 만나고 떠나고

 그리고 끝내는 없음므로

 돌아가는가

 

 후자는 본래 시인이므로 그의 눈에 비치는 사물은 더욱 시적으로 형상화 되는 상 싶다. 힌두강변에서 마주친 힌두교도들의 무리가 보여주던 유연한 자태가 잊혀지지 않느나고 그는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공작새가 그들과 어울려 무리지어 노닐고 있는 것이나, 마음 놓고 뒤까부는 원숭이들의 태연한 짓거리가 더욱 인상에 깊었던 걸로 비친다.

 전해 듣기만 해도 어째서 석존의 보살핌의 테두리 안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유정과 무정, 동식물과 자연까지가 두루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가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또한 혜초도 돈연도 걷고 또 걸었기 때문에 인도가 넓은 땅임을 실감나게 체험했고 그들의 체험은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부처님의 생각은 하늘과 땅만이 아니라 낮과 밤의 기온의 차이, 겨울과 여름의 차이까지가 한자리에 공존하는 미증유의 광활한 스케일을 제시한다.

 왕오천축국전은 또 하나의 시적 의의 가 있다.

 뱃길로 떠났다가 육지로 돌아온 혜초의 왕오천축구전은 해로로만 왕복한 의정의 남해기귀내법전과 육지로만 왕복한 현장의 대당서역기와는 또 다른 면을 보여주는 자료라 하겠다. 그는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않고 원측대사 처럼 타향에서 입적했다.

 지난 달 국립박물관에서는 동국 대학 박물관장이 인솔했던 씰크로오드 학술 조사단의 보고자료가 전시되었다. 신라인 혜초의 염원과 업적을 또 한번 떠올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일 저 일로 불교인이 서로의 자긍심을 상호 북돋아주는 것은 이 시대의 불교인이 해야할 일중의 하나 일 것이며 아울러 국민과제의 하나라 하겠다. 그것이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임을 사족으로 달아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