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정도경영] 고통에 뿌리 내려 행복의 꽃을 피우는 길

고통에 뿌리 내려 행복의 꽃을 피우는 길

2016-12-30     이언오

 

팔정도경영, 
고통에 뿌리 내려 행복의 꽃을 
피우는 길  
 
| 고통스런 세상에 행복의 길을 열어야
육신을 가진 인간은 죽음 다음으로 배고픔을 두려워한다. 죽음은 불확실한 미래, 배고픔은 매 순간 직면하는 현실이다. 배고픔의 두려움을 회피하려고 약육강식 투쟁에 몰두한다. 그러다가 탐욕이 목적이 되고 증오가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니 전도, 근본 목적을 잊으니 망상이다. 탐·진·치에 빠져 고통을 자초하니 참으로 어리석다. 
 
과거 배고픔의 시대에는 기업의 탐욕이 너그럽게 받아들여졌다. 정치는 기업 탐욕을 지원하는 데 주력했다. 배고픔의 두려움이 컸던 탓에 탐욕에 대한 증오를 억눌렀다. 배고픔이 해소되자 배아픔이 새로운 문제로 떠올랐다. 기업 탐욕이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정치가 그것을 부추기고 있다. 국민이 어리석어 기업 탐욕과 정치 증오를 방치한다. 기업은 원래 탐욕스럽고 정치의 존립 기반은 증오이다. 생겨날 때부터 그러했고 앞으로도 개과천선할 가능성이 낮다. 지금의 위기상황은 기업 탐욕, 정치 증오, 국민의 어리석음이 악순환을 일으켜서 초래되었다. 배고픔은 물질로 채웠지만 배아픔의 마음은 치유하지 못한다. 
 
각국의 행복 수준을 비교해보면 한국은 200여 개국 중 60위로 중상위권에 위치한다. 1인당 소득 세계 30위에서 보듯이 물질은 풍족하지만 삶의 질과 정신적 여유에는 불만이 많다. 현재 고통스러운데 미래가 비관적이고, 눈높이는 선진국인데 행태는 후진적이다. 불교의 존재감이 미미하고 사자후는 들리지 않는다. 출가자가 마음을 제대로 닦지 않고 재가자가 불법에 맞게 살지 않아서이다. 
 
영화 ‘십계’에서 모세 역을 맡은 찰턴 헤스턴이 지팡이를 들자 홍해가 갈라졌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것을 보고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다. 신이 먼저 기적을 행하고 인간이 그 은총을 입었다. 성서의 기록은 이와 다르다. 신이 모세에게 “앞으로 나아가라 말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이 움직이고 나서 모세가 지팡이를 들었고 바다가 갈라졌다. 나아갈 믿음과 용기가 있는 자에게 길이 열린 것이다. 
 
불교의 고통 치유는 성서의 방식에 가깝다. 신이 계시를 내리거나 기적을 행하지는 않는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 도반들과 함께 스스로 정진해야 한다. 진정한 행복의 길임을 증명해야 신심이 살아나고 불법이 이어진다. 불교가 고통스런 세속에 행복의 길을 열어보여야 한다. 지옥에 머물며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이 역할모델이다. 지장보살은 왼손에 법륜을 들고 있다. 팔정도경영은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효험이 증명된 법륜이다.
 
행복 = 고통의 뿌리(탐·진·치) × 행복의 꽃(건강+돈+관계)
 
불법은 근본 진리여서 나와 세상을 진정으로 행복하도록 만든다. 고통을 논해서 무겁고 자력 수행을 강조해서 어렵게 보이기는 한다. 가벼운 쾌락, 어설픈 안심을 추구하는 요즘 세태와는 거리가 있다. 타 종교는 믿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고 세속 행복은 신의 뜻이라 말한다. 신에 의존해서 접근이 쉽고 신행생활은 활기차다. 핵심은 무엇이 진리이며 행복한 삶을 증명해 보이는가이다. 
 
국립국어원은 윗사람에게 ‘수고愁苦한다’는 말을 쓰지 말라고 권고한다. 고통을 회피 대상으로 보는 사회 통념을 반영한다. 불교는 고통을 피하거나 억누르지 말고 행복을 위한 양약으로 쓰라고 가르친다. 「보왕삼매론」은 역경이나 질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한다. 어차피 주어지는 고통이라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이 고통스러운 것은 치유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영국 양치기들의 격언에 “나쁜 날씨는 없다. 나쁜 옷차림이 있을 뿐이다.”는 말이 있다. 나쁜 고통은 없고 마음자세가 중요함을 의미한다. 생로병사가 날씨라면 옷차림은 탐·진·치 대응이다.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 행복은 추구해야 하는 바른 길이다. 행복은 고통의 순간이나 극복 과정에서 얻는 깨달음이다. 행복도 좋지만 행복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 또한 좋다.  
 
행복은 고통에 뿌리 내려 정성으로 피우는 꽃이다. 진흙탕에서 맑게 피는 연꽃 이미지이다. 불교의 행복방정식은 고통의 뿌리(탐·진·치) × 행복의 꽃(건강+돈+관계)(『달라이라마의 행복론』(김영사, 2001년)에 예시된 행복의 조건들로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으로 나타낼 수 있다. 탐·진·치는 서로 얽혀 있어 벗어나기가 어렵다. 수행해서 깨닫고 보살행을 실천해서 극복해야 한다. 세속이 중시하는 건강, 돈, 관계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바르게 추구하면 선이고 고르게 누리면 행복해진다. 
 
팔정도경영八正道經營은 고통을 넘어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주인主人은 고통을 느끼고 치유에 뜻을 낸다. 수명이 유한한 인간으로서 평생 건강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그러면서 미래와 세상의 행복을 위해 보살菩薩로서 헌신을 한다. 현재 고통이 미래 행복이니 행원行願, 나의 고통이 세상 행복이니 자비이다. 수행修行을 통해 탐·진·치에 대한 중도中道 정견을 깨닫는다. 머릿속 알음알이가 아니라 스스로 행복하고 남을 감화시키는 체득된 지혜이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머무는 바 없이 한 마음을 내니 모두가 한량없이 행복하다. 
 
동사同事로 바르게 돈을 벌고 보시布施로 유용하게 쓴다. 각자 자리에서 열심히 먹고살며 도움을 주는 조직, 사회, 자연에 은혜를 갚는다. 돈에 집착하지 않고 벌고 쓰기를 도를 닦는 방편으로 삼는다. 모자람과 넘침을 경계해서 돈이 항상 흐르도록 한다. 고통·행복의 상호의존성을 자각해서 올바른 연결連結을 도모한다. 고립, 조직, 패거리를 지양하고 열린 마음으로 자비의 관계망을 작동시킨다.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자비의 동심원을 넓혀 모든 생명과 자연을 그 아름다움 안에 끌어안아야 한다.”고. 수순隨順으로 고통을 줄이고 행복을 늘리는 선순환을 계속한다. 부자와 빈자, 장년과 청년이 서로 수순하면 함께 행복해진다. 현재 고통에서 지혜를 얻어 미래에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 불교 주도의 마음혁명을 기대하며    
부처님이 활동하셨던 시기는 ‘축의 시대’로 불린다. 세계 각지에서 현자들이 출현해 진정한 행복에 대한 통찰을 제시했다. 공통적으로 자비·사랑의 실천을 주창하고 개인숭배와 조직화를 경계했다. 하지만 추종자들이 교주를 신격화하면서 종교조직이 만들어지고 탐·진·치에 빠져들었다. 그 결과 물질문명의 폐해가 심각한데도 고통 치유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다. 불교는 산중 수행을 강조해서 세속과 멀어졌다. 원래 세간·출세간 구분이 없는데 세상 흐름과 괴리되면서 그렇게 되었다. 
 
나와 세상이 행복하려면 불교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부처님은 마음이 고통의 원인이자 해답임을 가르치고 증명해 보이셨다. 불교발 마음혁명으로 물질문명을 바르게 이끌어야 한다. 부처님은 개인행동, 교단운영, 대사회 관계에서도 지혜로운 지침들을 남기셨다. 출가자-재가자-세속인의 구분이 없는 수행공동체가 마음혁명의 진원지이다. 
 
불교는 고통에서 출발해서 수행-깨달음-보살행을 거쳐 행복으로 나아간다. 수행-깨달음-보살행은 불교의 틀, 고통-행복은 세속의 현장이다. 틀에 갇히면 알음알이, 깨달음의 체득이 아니다. 틀을 깨고 행동해서 동체대각·동체대행해야 한다. 근본 해답을 가진 불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불교와 인연 맺은 이들은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재가자는 세속 고통의 당사자이다. 행복을 위해 스스로 노력하고 주위에 나누어야겠다. 불행의 원인을 살펴 탐·진·치를 다스려야 한다. 건강, 돈, 관계를 추구하면서 불법의 효험을 경험해보자. 먹고사는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여 자기발전의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 간화선이 어려우면 고통·행복을 일종의 화두로 해서 명상하면 된다. 정직한 말, 온화한 표정, 무주상보시를 시도해서 습관으로 만들어야 한다. 
 
기업은 고통 유발을 참회하고 치유 주체로 변신해야 한다. 기업 목적은 유익한 사업을 벌여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다. 성장·이익 편향에서 벗어나 이해관계자들의 행복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강자가 탐욕을 절제하면 약자의 고통이 그 몇 배 줄어들어 전체로 행복이 늘어난다. 경영자는 보살의 원을 세워 업무에 수반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위기상황이라면 더욱더 수행에서 답을 찾고 출가자에게 지혜를 청해야겠다. 
 
사회 혼란이 극심했을 때 역설적으로 불교가 흥기했었다. 세속 고통에 자극받아 개인·세상의 행복을 절실하게 추구했다. 지금 산사에서는 동안거 수행이 한창이다. 깨달음으로 세상 고통이 얽혀 있는 매듭들을 한방에 잘라야 한다. 중국의 사마온공이 한 아이가 물 항아리에 빠지자 돌로 독을 깨트려 구해낸 것처럼. 계절에 비유하면 불교는 겨울과 봄 사이에 위치한다. 고통의 겨울을 넘어 행복의 봄을 향해 간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겨울에 성도하셨고 봄에 태어나셨다. 내년 봄 수행자들의 한 소식이 울려 퍼져 세속에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대한다.                  
 
이언오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경영학 박사를 받았다. 삼성경제연구소 전무와 부산발전연구원장을 지냈으며, 지금은 바른경영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대학 때부터 불교를 공부하였으며, 불교와 경영을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불교와 경영의 접목을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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