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힐소설경』 번역 토론회 참관기②

2016-12-30     불광출판사

『유마힐소설경』 
 번역 토론회 
 참관기②


이 글은 중국의 고승 선화(宣化, 1918-1995) 스님이1974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유카이아에 건립한 도량 ‘만불성성萬佛聖城’의 고등 교육기관이 주최한 <불교 경전 읽기 및 번역 토론회(Seminar on Reading & Translating Buddhist Texts)>에 참관한 한서경 씨(뉴욕주립대 박사과정 졸업)의 참관기입니다. 만불성성은 미국에서 국제역경원을 건립하고, 지금까지 1백여 종의 불경 영역본을 출간했으며, 수많은 미국인 출가자와 불자들을 배출해온 곳이기도 합니다. 국내에는 『능엄경 강설』, 『부처님 말씀 그대로 행하니』, 『허공을 타파하여 마음을 밝히다』 등 선화 상인의 법문이 번역 출간되어 있습니다. 이 참관기를 통해 경전이 어떤 과정을 통해 번역되는가를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로 알 수 있기에 독자의 일독을 권하며, 이 참관기를 2회에 걸쳐 싣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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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스크리트본이 한문본처럼 품별로 구분이 되어 있는지, 품별 제목이 각 품의 시작 부분에 달려 있는지 등을 확인해 볼 순 없었지만, 오슬로 대학 불교 문헌 전산 자료를 통해, 이 장이 여신devatā과 장소parivartah.로 이루어진 “여신이 머무는 장소Devatāparivartah.”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과 데바따devatā가 그 장 내에서 꾸준히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티베트본일 경우에도, 여신을 의미하는 일하 모lha mo라는 단어가 상응하는 장 내에서 계속 쓰이고 있다는 것도 조사해 볼 수 있었다. 데바따나 일하 모 등은 전산화 과정에서 로마자로 쓰인 부분을 비교해 보다가 알게 된 것이고,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의 경우 낱낱 글자들이 너무 비슷하고 데바따와 일하 모를 나타내는 단어들이 옳은지 확인할 길이 없어, 그냥 로마자로만 표기한다.

| ‘관觀’을 어떻게 번역할까
현존하는 한문본은 산스크리트본이나 티베트본보다 인터넷 검색이 훨씬 용이하다. 구마라습본의 「관중생품觀衆生品」은 지겸의 『불설유마힐경(佛說維摩詰經, T474)』에서는 「관인물품觀人物品」으로 현장의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T476)』에서는 「관유정품觀有情品」으로 나타나고, 둘 다 일곱 번째 장을 이루고 있다. 즉, 3세기 초 지겸본, 5세기 초 구마라습본, 7세기 중반 현장본에서 사용한 제목들은 서로 다르다. 하지만, 모든 제목이 ‘관觀’으로 시작하고 있고, ‘관’이라는 동사의 목적어, 즉 ‘관’이 되고 있는 대상을 언급하고 있다. 장 제목들을 간단하게 해석해 보면, “사람과 물건을 보는 품”, “중생을 보는 품”, “(중생의) 마음을 보는 품 ” 정도가 되는데, ‘관’을 행하는 주체가 언급되지 않는 것도 동일하다. 구마라습의 한문본을 바탕으로 한 영어본들의 경우, 룩본(“Looking At Living Beings”), 왓슨본(“Regarding Living Beings”), 맥래본(“Viewing Sentient Beings”) 등은 모두 ‘관觀’의 의미를 전달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세 한문본 각 품의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지겸본은 “하늘天”이 언급되고, 구마라습본과 현장본에서는 “천녀天女”가 언급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경의 문맥이나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살펴본다면, “관”을 행하는 주체는 하늘이나 천녀보다는, 보살(菩薩, bodhisattva)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머지 품과 비슷하게, 「관중생품」에서도 보살이 “관”을 어떻게 행하는가에 대해 유마힐, 문수사리, 사리불이 묻고 답한다. 하지만, 이 품에서는 천녀가 등장해서 그 대화를 이끈다. 즉, 스스로(화자)의 몸이나 대화 상대(청자)의 몸 혹은 대화가 일어나는 상태 등을 적절히 변화시켜가며, “관”(하는) 자체의 얽히고설킨 정도를 보여준다. 동시에 그 복잡함 속에서도 “관”을 행하는 보살 능력과 본분을 보여줌으로써, 재가 신자가 어떤 식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할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조사를 계속하고 있는 중인데, 털만본이 “관”하는 주체를 이 장의 제목으로 내세운 점, 그리고 여신(goddess, devatā)을 직접 언급한 점 등이 티베트본과 한문본 자체의 차이인지, 단지 번역에 따른 표현의 차이인지 그 연유를 꼭 알아보고 싶다. 이는 대승불교 이론의 발달과 불경 전파와의 관계를 추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관”을 한국어반에서는 그냥 “관”으로 번역했었는데, 이를 순 한글로 어떻게 옮길 수 있을지 궁금했다. 조선시대 출판된 언해본들에도 그냥 “관”이라는 한글로 나타나긴 하던데, 순 우리말로 풀면 “관”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게 되는 걸까? 한문반에서는 위 영어본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일단은 다른 본과 달리해보자는 의견이 있어 다른 본에서 쓰였던 동사들뿐만 아니라(look; regard; view) 다른 몇몇 동사들까지(observe, consider, appreciate…) 헤아려 보게 됐었다. 문제는 나까지 포함해서, 우리 다섯의 의견이 다 달랐고, 결국 지쳐서 스님 Yi와 (아마도) B가 합의(?) 본 고려/사려하다(consider)로 결론을 봐 버렸다. 이런 적이 왕왕 있었는데, “화化”(change, transform)나 “사捨”(donate, offer, provide, give…) 등의 번역을 놓고 것도 토론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 ‘사捨’, 그 번역의 복잡함
특히, “사捨”를 번역하면서 ‘베풀다’라는 우리말의 의미를 제대로 표현해 줄 영어 단어를 찾지 못해 많이 안타까웠다. 무엇보다도 “공덕功德”을 번역할 때였는데, 우리에겐 한 단어로 익숙해진 “공덕”이지만, 영어로 번역할 경우 “공”과 “덕”으로 나뉘어서 각각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가 공덕을 짓고(짓다), 닦고(닦다), 쌓고(쌓다) 그리고 그 공덕을 누군가가 입게(입다) 된다. 가만히 따져보면, 공덕과 관련된 동사들을 행동으로 옮길 때 빠지지 않고 포함되는 것이 베푸는 행위다. 더욱이 베푼다는 것은 건네는 행위임이 분명한데, 건네는 것이 눈으로 볼 수 있거나 손에 잡혀져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건네는 것을 받는 이가 꼭 정해질 필요도 없고 정해진 이만 받아야 된다는 법도 없다. 그런데, 베푼다는 것을,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지만, 그 인연이라는 것도 수억 겁이 있어야 한다. 또 관계라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 사이에서 생겨난다는 불교적 관점에서 풀어 본다면, 베푼다는 의미는 훨씬 복잡해진다. 단체 모임 때, 베풀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진땀을 뺄 수밖에 없었다. 

토론회에 참석한 후 『유마경』과 관련된 자료들을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여러 자료에 따르면 『유마경』은 구마라습 이외, 후한 불엄조(嚴佛調, ?-?)의 『고유마힐경(古維摩詰經, 188)』, 오 지겸(支謙, 222–252)의 『불설유마힐경(佛說維摩詰經, 222-229; K120, T474)』, 서진 축숙란(竺叔蘭, ?-?)의 『이유마힐경(異維摩詰經; 異毗摩羅詰經, 291)』, 서진 축법호(竺法護, 239-316)의 『유마길경(維摩鞊經; 維摩詰所說法門經, 303)』, 동진 지다밀(祇多蜜 Gītamitra, 317?-420?)의 『유마길경維摩鞊經』, 당 현장(玄裝, 602-664)의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650; K121, T476)』 등 한문으로 여섯 차례 더 번역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전해지는 것은 지겸, 구마라습, 현장 번역본뿐이라고 한다. 한문본 외에도 산스크리트본과 달마타실라(Dharmatasila; Chos ñid tshul khrims, 8세기)가 번역한 것으로 알려진 티베트본 역시 전해지고 있다. 또, 코탄(于闐, Khotan)이나 소그드(栗特, Sogdh) 등 소위 중앙아시아에 존재했던 고대 왕국들에서 사용했던 언어들로 제작된 경들이 부분적으로나마 발견되었다고 한다. 일역본 중에는 중국 동진 승조(僧肇, 384-414)의 『주유마힐경注維摩詰経』이 보이는데, 이는 『유마경』의 주석서로 알려져 있다. 일본 아스카 시대 성덕 태자(聖徳 太子, 574-622)의 「삼경의소(三経義疏, 611-622?)」도 존재하지만, 중국 내에서도 10종 이상의 주석서가 제작되었다. 한국고전적종합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고려시대까지는 지겸본도 유통되었던 것 같은데, 조선시대에는 주로 구마라습본이 유통된 것 같다. 언해본은 없는 것으로 안다. 대강 둘러보더라도, 유마힐과 관련된 불교 문헌이 중앙 및 동아시아 전 지역으로 끊임없이 전파되고 번역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좀 더 연구를 해 봐야겠다.

| 번역토론회의 최대 강점
번역 작업은 오전, 점심, 저녁으로 나눠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번역 작업 외의 시간은 만불성성 내 절 수도 생활을 경험해 보는 시간이었다. 수도 생활에 참여해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이 토론회의 최고 장점이자 강점이 아니었나 싶다. 아침 공양이 6시 15분부터였다. 덕분에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공양 시간이 지나버리면 딱히 먹을 곳도, 먹을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아침으로는 따뜻한 흰 죽과 함께 곁들일 수 있는 짠지 종류, 땅콩, 빵, 땅콩버터와 잼 등이 나왔다. 점심 공양은 약 11시부터 시작됐고, 밥과 다양한 야채, 그리고 과일이 제공됐다. 절 소유의 과수원에서 재배한 포도로 만든 주스도 나왔다. 저녁은 5시 15분부터 먹을 수 있었고, 식단은 점심과 비슷했지만 과일과 주스는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했건만, 절에 온다고 해서 내 식탐이 사라지진 않았다. 절에서 직접 만든 포도 주스가 내 입에 맞아버린 것이었다. 반찬을 가지러 가는 척하면서 포도 주스를 2~3잔 정도 마셔댔다. 저녁 공양에 제공되지 않는 것까지 당겨 마셔버린 격이었다. 혹 배가 불러 오후 번역 수업에 지장이 있을까 봐, 점심 밥 양도 아예 반으로 줄여버렸을 정도였다. 이곳 스님들은 하루 한 끼 그것도 점심만 드시는데, 내가 스님처럼 생활하려고 소식하는 줄 아는 친구들 앞에서, 이실직고도 못했다. 그 중 몇몇 친구들은 공양간에서 일하거나 공양주 보살님들과 친했기 때문이었다.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평소 고기류를 즐기는 편도 아니라, 먹는 것에 대한 불편은 없었다. 그런데, 이곳은 마늘 등 오신채와 계란은 먹지 않을 것을 계율로 정하고 있다. 유학 생활을 하면서 먹을 것이 없으면 계란 하나 구워서 고추장과 비벼서 먹어왔던 나였다. 한번은 김치는 어떠하냐며 한국에서 오신 참가자들께 여쭤봤더니, 마늘이나 파 없이도 김치를 담글 수 있고, 한국에 있는 절 중 그렇게 김치를 담그는 곳이 있다고 하셨다. 김치의 미학일까, 발효 식품의 미학일까? 아님, 한국인 입맛의 미학일까? 무엇을 첨가하든, 빼 버리든, 다른 것으로 대체하든, 적절한 과정을 거쳐 한국인이라면 알 김치 맛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식사 장소는 출가자와 비출가자, 그리고 남성과 여성 전용으로 나뉘어져 있다. 식사 때마다 담당 스님께서 짤막한 예불을 올리시고, 점심 식사 시간 동안엔 선화 스님 법문의 영어 번역본을 들려준다. 각자가 먹은 그릇을 설거지할 필요는 없지만, 그릇과 수저 등을 분리하고, 남은 음식 찌꺼기들을 정해진 곳에 버려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앉아서 먹었던 식탁은 직접 닦아야 한다. 재미있었던 것은 식당에 소ㆍ중ㆍ대형 냉장고들이 놓여 있었는데, 각 손잡이 부분마다 연간 전기세를 굵은 글씨로 크게 써서 붙여 놓았다는 거다. 아마도 절전하는 차원에서, 공양주하시는 분들 외에는 냉장고 열지 말라는 경고 같았다. 

| 관세음보살께 삼배, 눈물이 났다
예불 시간도 철저하게 지켜졌다. 새벽 예불과 저녁 예불이 있는데, 한국 절에서 말하는 대웅전 격인 ‘Buddha Hall’에서 열린다. 식당과 마찬가지로 출가자와 비출가자, 그리고 남성과 여성 전용 입출구가 있다. 법당이라고 해도, 완전한 현대식 건물이다. 주불은 천수천안관세음보살상으로, 한국 절에서 볼 수 있는 불상보다는 상당히 허리가 길고 크다. 약간 고개를 숙이신 채로 합장을 하고 계시는데, 은근한 미소는 보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신다. 좌우로 여러 불상과 보살상이 놓여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 상단에는 올라갈 수 없었다. 선화 스님의 사진은 관세음보살상 앞에 걸려 있다. 선화 스님을 모시는 법당은, 붓다 홀 입구 쪽에 따로 세워져 있는데, 스님 조각상이 중앙에 놓여 있다. 스님의 사진은 보살상에 비해 무척 작다. 그 분의 사진이 내 눈에 들어온 것이나, 보살상이 합장을 올리고 있는 것을 알아본 것은 예불을 몇 번 더 참석하고 난 후였다. 

저녁 예불은 6시 30분부터 시작되는데, 가만히 서 있거나 법당을 돌면서 1시간 동안 예불문을 소리 내어 읽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예불문은 중국어본과 영어본, 베트남어본 등이 책자로 구비되어 있긴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나에겐 책자를 보고도 따라 하기 힘들었다. 중국어본은 너무 빠르고, 영어본은 (중국어를 영어로 의미에 맞게) 번역한 것이다 보니 원본보다 훨씬 길었다. 내가 하도 못 따라하고 무엇을 읽는지조차 못 찾으니까, 초등학생 참가자들이 눈치껏 내 옆 자리에 서서 날 도와줬다. 나중에 식당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둘은 자매로, 언니도 여동생도 미국계 중국인이었고, 여름 방학 때마다 어머니와 함께 인디애나Indiana 주에서 만불성성까지 수련하러 오는 독실한 (꼬마) 신자였다. 

책자의 책장을 넘기면서 내가 따라 읽어낼 수 있는 부분까지 독송하고 말았지만, 저녁 예불에 빠지진 않았다. 저녁 공양 후 저녁 토론 수업 전까지 자유 시간이었기 때문에, 쉴 수도 있었지만, 난 저녁 예불 때가 되면 붓다 홀로 향했다. 무엇이 날 이끌었던 걸까. 울고 싶어서였을까. 실은 첫날, 저녁 예불을 참석하려고 붓다 홀에 들어서서 관세음보살상에 삼배를 올리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도는 것이었다. 실은 만불성성으로 출발할 무렵 난 이미 지쳐 있었다.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상태가 좀 많이 안 좋았었던 터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그냥 지나쳐버렸는데, 둘째 날 예불 때는 아예 울어버릴 뻔한 것이었다. 삼배를 올리려고 합장을 하던 때였는데, 숙였던 허리를 들자 당신의 천 개의 눈이, 손이, 그리고 당신의 미소까지도 파르르 어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삼배의 마지막 절을 올리면서, 울어도 괜찮다는 말을 나 자신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속으로 쏟아 놓은 것이었지만, 함께 내뱉은 얕은 한숨 소리보다도 더 크게 들렸다. 적지 않게 놀랐다. 지난 수년 동안 울 일이 생기면, 왜 울 필요가 없는지 왜 울어서는 안 되는지를 온갖 구실로 합리화(?)시키고, ‘어떻게든 잘 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까지 거는 것에 익숙한 나였다. 살아오면서 이 말을 스스로에게 처음으로 해 준 덕인지, 처음 들은 덕인지, 저녁 예불엔 마지막 날까지 참석했었다. 

| 번역토론 전 명상하다
저녁 예불과는 달리 새벽 예불은 두 시간으로 구성돼 있었다. 새벽 4시부터 5시까지는 예불문을 읽고 5시부터 6시까지는 절을 하는 것이었다. 저녁 예불과 다른 예불문이지만 한 책자 안에, 저녁 예불문과 함께 실려 있다. 난 예불문 읽는 시간만 골라 이틀 참석했다. 만불성성을 떠나는 날과 그 전날이었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번역 모임에 지장을 줄 순 없다며, 첫 5일은 빼먹었던 것이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새벽에 3시가 조금 지나 일어날 자신이 없었고, 1시간 동안 연속으로 절을 올릴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새벽 예불은 법고 소리로 시작했다. 붓다 홀의 여성 비출가자들이 드나드는 문 부근의 천정에 법고가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새벽 예불에 참석하면서였다. 번역 참가가들에게 이름표가 주어졌는데, 각 이름표마다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을 그리는 분은 대만에 거주하시는 만불성성 신도분이라고 들었다. 뵌 적도 없고 이름조차도 모르는 그 분이, 내 이름 석 자 옆에 그려 넣어 주신 것이 법고였다. 새벽에 법고를 쳐 주신 그 스님도 따로 뵐 기회는 없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당신 팔 길이보다 길어 보이던 채로 법고를 두드리시던 뒷모습을 본 것이 전부였다. 

토론회 참가들 중 저녁 예불에 참가하는 이들은 좀 됐지만, 새벽 예불에 참가하는 이들은 드물었다. 새벽 예불 후 아침을 먹고, 토론회를 시작하기 전에 40여 분간 명상 시간을 가졌는데, 이 역시 참가하고 싶은 사람만 참가하면 되는 자리였다. 하지만, 명상하는 교실은 늘 꽉 찼다. 명상 수행이 끝나면, 차나 커피 한 잔씩을 챙겨 들고 옆 교실로 옮겨서 번역을 시작했다. 다른 참가자들과 그렇게 하루를 시작해서 온종일을 함께 보냈던 곳은, 재건축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 무지 낡은 건물이었다. 그러나 나에겐, 한 번도 만난 적도 없고, 만나게 될 것이라는 상상조차 못했던 이들과 함께 힘을 모아 부처님의 말씀을 번역을 할 수 있게 해 준 곳이었다. 

언젠가 “보이지 않는 힘invisible power”을 신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주말 오후에 웃고 즐기면서 느긋하게 차나 한 잔 마시자며 만든 자리였다. 첫 번째이자 유일한 규칙은 공부에 관련된, 즉 복잡한 이야기 안 하기였다. 하지만, 철학이나 문학 혹은 역사를 전공하는 소위 인문학 골수들이고, 대부분이 박사 과정 수업을 이수하는 중이었으니, 우리 대화가 자신도 모르게 토론으로 변해버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아마도 내가 했던 말이 화근이었던 것 같다. 유학생이었던 나에게 영어로 인문학 수업을 듣는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신이든 보이지 않는 힘이든 아님 누구든, 내 영어 실력 좀 당장 향상시켜주고, 이번 학기 기말 리포트 제대로 써서 제출할 수 있게 해 줬음 좋겠어.” 농담으로 단 수십 초간 뱉어낸 푸념이었건만, 신과 보이지 않는 힘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이고 서로 간의 관계는 무엇이며 어떻게 돼야 한다는 등등 거대한 토론의 장을 열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친구들부터, 부처, 예수, 혹 알라를 믿는 친구들뿐만 아니라 힌두교는 물론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자기 나라 혹은 부족 고유 신을 믿는 친구들까지 모여 있는 자리였으니 오죽했으랴. 물론 그 열띤 토론에 끼지는 못했다. 왜 그리 말들이 빠른지. 내가 왜 그런 푸념을 했는지는 그새 잊은 듯했다. 어쩌면 내 하소연이 영어로 잘못 표현돼 이해를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집으로 가려고 다들 일어섰을 때 누군가 말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 더욱이 학교 밖에서 커피까지 마시면서 만난 건, 신이든 보이지 않는 힘이든 뭐 누가 됐건 우리한테 준 선물이자 축복 아닐까?” 누가 그 말을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친구의 말 대부분을 알아들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건 기억한다. 

| 부족했던 것은 내 모국어
그날 이후, 우리 모두가 강의실 밖에서 만나 함께 수다 떨 기회는 주어지진 않았다. 그래도 그 친구가 했던 말이 가끔 기억나곤 했었다. 그 말이 다시 떠오른 건 이번 여름, 불경 번역 모임에 참석하면서다. 이번 기억은 기억조차 색다른 경험이었다. 내가 기억하려고, 기억해내려고 애쓴 적도 없었다. 내가 애를 더 쓰거나 덜 쓴다고 해서 기억되거나 안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번에서야 알았던 것이다. 더욱이 지난 수년 간 그 말은 주어와 서술어 등을 가진 일종의 문장 형태로 문득 떠올랐다 곧 사라져 버리곤 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모스 부호처럼 뚝뚝 끊겨서 오늘, 우리, 만남, 선물, 축복이라는 단 다섯 개의 단어가 하나씩 차례로 떠오르면서, 각각의 의미뿐만 아니라 서로 간의 관계에 대해 곱씹어 보게 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참가하러 오신 분들, R, 스님 Chih, 관세음보살상, 법고 …. 내가 누군가와 만나게 되는 것도, 우리가 되어가기까지도 쉽지 않건만, 그 만남이 서로에게 선물로 받아들여진다면, 그리고 우리의 만남이 축복으로까지 느껴질 수 있다면. 

몇몇 참가자들과는 오랫동안 만나온 친구들처럼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 버렸다. 다르마 대학교 학부생들과는 한국 드라마 덕분에 친해질 수 있었다. 나보다 연예인들을 더 많이 알고 있길래 오히려 내가 물어봐야 했다. 어떤 친구는 중국계 뉴질랜드 인으로 프랑스에 살고 있었는데, 지난 수년간 만불성성 행사에 꾸준히 참석해 온 터였다. 지금껏 자신이 행사에 참여하면서 배우고 깨우쳤던 바를, 그리고 실수까지도 아낌없이 들려주는 것이었다. 너무 고마웠다. 아르헨티나와 멕시코에서 온 친구들과 만나면, 우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자기들 나라에는 아직 부처님의 가르침이 생소해서, 배울 기회가 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중 한 명은 자신의 남편이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고 믿는 것이 고추장인데(그 친구는 고추장 발음을 전혀 못했다.)멕시코에서 쉽게 구할 수 없어서 해외 출장 때마다 한국 비행기를 타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한국 절에서 만드는 고추장은 파는 것보다 더 맛있는데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더니, 한국 절에 수행하러 오겠다고 했다. 만불성성에서 만난 친구들과 꾸준히 이메일도 주고받고 있다. 우리가 또 다시 만나게 될까? 기회가 되면 한국 절에서 운영하는 템플스테이에 초대해 보고 싶다. 내가 토론회를 참석해서 느꼈던 바를 한글로 쓰고 있다고 했다니, 영어로 번역해 달란다. 아, 번역. 영어가 부족하고 한문이 부족한 줄 알았다. 더 부족했던 것이 한글, 내 모국어였다.    
                          

한서경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논문 주제는 성리학 교화서인 『삼강행실도』의 출판과 보급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 이를 중심으로 한국 특히 조선 시대만의 독특한 책 문화를 다뤘다. 현재 아시아, 특히 동양의 문헌들이 고대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전파와 번역이라는 과정을 통해 어떻게 생산되고 재생산되었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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