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믿음의 산맥을 가꾸어 가는 사람 -부산 하도명화 보살님

인물탐방

2007-07-01     관리자
 



 이 세상에 만점짜리 인생이 있을까. 어떠한 경계에도 휘둘리지 않고, 두려움이 없으며, 마음에 걸림이 없고, 안으로도 밖으로도 편안함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는 이. 이러한 분이 있다면 우리는 만점짜리 인생이라고 이를 만할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이러한 자신의 만족을 이웃과 함께 하여 이웃이 기쁠 때 함께 기뻐해주고, 이웃이 슬플 때 함께 슬퍼해줄 수 있다면 인생의 점수는 만점에서 그 이상이 될 것이다.

 올해 68세가 된 도명화 보살님은 자신이 만점짜리 인생이라고 말할뿐더러, 주위에 있는 분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인생을 살아온 보살님이시다.

 젊었을 때부터 남다른 수행 정진을 해왔고, 지금도 출가인 못지 않게 수행하고 계신데다 많은 불사에 함께 하심에 웬만한 부산 불교신자라면 보살님의 법명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현재 절대다수가 불교신자로 구성되어 있는 부산의 불교신도회 부회장이시기도 한 보살님의 신행담과 불사의 손길은 많은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또한 정진력을 키워 줄만 하기에 여기에 옮겨 본다.


 보살님은 현재 부산시 금정구 두구동에 있는 신창농장(이를 일러 보살님은 1급 토굴이라 한다)에 주로 머물고 계신다. 농장이라고는 하나 생각과는 달리 잘 가꾸어진 널찍한 정원이라는 느낌이 잘 들 정도로 주위가 잘 정돈되어 있었고, 입구를 지나 걷다 보니 왼쪽편에 특별히 설계를 해서 지은  한 모양새가 좋은 집이하나 있었다. 현관 오른편에는 커다란 화강석인 듯한 돌로 깎여진 포대화상이 큰 자루를 맨 채 활짝 웃으며 오는 이를 반겨주었다.

 현관 문을 열고 들어간 집의 첫 느낌은 마치 가람처럼 정결하고 고요했다. 도명화보살님의 인상 또한 그랬다. 68세라고는 하나 전혀 그 나이를 가늠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훨씬 젊어 보였으며, 기자를 대하심이 오래전부터 알아온 사람을 대하듯 자연스럽고 따뜻했다.

 그러나 때로는 선풍도골처럼 의연하고도 단호하게 신행담을 들려 주시다가도, 또 때로는 온 힘을 바쳐 전법하는 젊은 불자들 얘기를 하시며 ‘그 분들이 얼마나 귀한줄 아나’ 하시며 일래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믿음으로 인생의 산맥 몇 개는 훌쩍 넘은 듯 이제는 고요한 평화를 찾은 도명화 보살님의 첫마디와 끝마디는 ‘한번 멋지게 살아보라’는 말씀이었다. 그것은 24시간을 잘 재단해서 불같은 신심을 기도하는 사람에게만 얻어질 수 있는 공덕이라고.


 “니는 어떻게 살고 싶나. 금메달 딸 사람은 다르다. 한 번 멋지게 살아 보그래이. 생활과 불법과 정진이 둘이 아닌기라. 불같은 신심으로 돌진 돌진해야 하는기지. 내사 마 동서양을 다녀도 두려운 것이 하나도 없다. 어디를 가도 좋은 기라. 혼자 있어도 좋고, 이렇게 같이 있어도 좋고. 이게 바로 극락이지 뭐꼬.

 내가 한참 기도 정진속에 있을 때는 어땠는 줄 아나. 매일같이 머리 안감으면 안되는 줄 알았다. 한겨울에 머리를 감고 빗으로 빗어내리면 어름이 서그렁 서그렁 떨어져도 매일 감아야 하는 줄 알았다. 좋은 방, 좋은 이부자리, 극락 같은 내 집 놔두고 뭐라할꼬 지옥같은 절에 가서 밤을 세우며 기도를 하겠나. 안해보면 모른다. 그게 얼마나 좋은지. 마 얼마나 좋은 지 미치겠더라.

 기도 정진없이 사는 세상은 등불없이 어두은 길을 가는 기고, 뿌리없는 나무와 같은기라. 기도없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노. 기도도 하지 않고 법석 떨며 사는 사람들 보면 내사 마 한심스럽다.”

 보살님이 하신 기도와 수행담을 들려 달라고 여쭙자 도명화보살님은 처음 본 기자의 무릎을 ‘탁’ 치시며 ‘한 번 멋지게 살아보라’신다.

 그 ‘멋지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잔뜩 궁금한 기자는 보살님께 바싹 다가 앉으며 그 길은 여쭈었다. 그 ‘길은 한 마디로 신명을 다바쳐서 하는 기도’라고 말씀 하셨다.

 원래 보살님의 친정은 대구이고, 보살님의 외가댁은 장로교 계통의 기독교 집안이었다. 보살님이 부산으로 시집오면서부터 절에 다니게 되었고 그때부터 기도를 시작했다. 맨처음부터 부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많은 불보살님 가운데 ‘잘하면 상을 주고 못하면 벌을 준다’ 는 독성님이 좋아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집에 모시고 매일 예불을 올리고 기도를 하고 계신다.

 스물한살에 불교에 귀의하여 스물여덟살 이래 생활의 전부인냥 집에서, 혹은 전국의 사찰을 돌며 기도를 해왔지만 기도 정진력이 한번도 남에게 뒤떨어져본 적이 없다고 하신다. 기도의 최고봉은 부산 금강사에서 서경보스님과 그 제자들이 동참한 가운데 함께 한 49일 용맹정진기도였다고 귀뜸해주시며, 마흔여덟살이 되어 오대산 상원사에서 10만배를 함으로써 기도를 회향했다고 하신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공산당들이 오대산에 들끓었고 사람을 닥치는 대로 잡아죽이던 때였음에도 아무런 두려움없이 상원사에 들어가 능해 태응스님과 함께 3.7일 용맹정진기도를 하셨다고.

 “그런데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한번은 내가 금강사에서 3.7일기도를 입재하고 기도를 시작하는데 회향하는날 공청(하늘에서 울려오는 소리)이 오더라. 계속하라고. 그래서 또 100일 기도를 입재하고 기도를 하는데 50일만에 화련을 본기라. 그런데 그게 얼마나 희한하고 묘한 줄 아나”하시며 그 때의 얘기를 자세히 들려 주신다.

 그 당시 보살님께서는 잠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저녁 9시에 기도를 마치고 잠이 들면 자정 5~6분 전에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나 자정부터 또 기도를 시작했다. 물론 잠에서 깨는데 5분 이상의 차질도 없었을뿐더러 잠자리에 누우면 10초 이내에 잠이 들었다. 이렇게 100일 기도하던 50일째 되던 날 밤이었다. 그 날도 밤 12시 5분 전에 다기를 들고 법당에 들어가 촛불을 켰다.

 관음전에 불을 켜려고 성냥을 그어대는데 마치 가스불에 불을 붙일 때처럼 ‘훅’하고 불이 와서 붙었다. 놀라서 움찔 하는데 그 촛불이 갑자기 커다란 연꽃이 되었다. 너무 신기하고 놀라와 그 옆에 있는 초에 불을 켜니 또 마찬가지로 연꽃불꽃이 피어 올랐다.

 관음전에 불을 다 켜고 신장전에 불을 켜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연꽃모양이 얼마나 신비하고 기이한지 보살님도 모르게 이쪽 저쪽을 보며 절을 하였다. 1시간 동안 정신없이 절을 하고 일어나 바라보니 불꽃모양이 여전히 똑같았다.

 ‘기도는 희마에도 말리지 말고 비마에도 말리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왜 이렇게 불만 보고 절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자 절하던 것을 놓고 평상시대로 천수경을 했다.

 천수경을 마치고 눈을 떠보니 심지가 춤추던 것이 멈추었다. 그리고 커다란 연꽃모양의 불꽃이 차츰 작아졌다. ‘아 작아지는구나’ 싶어 평상시대로 또 절을 했다. 한시간 정도 더 절을 하고 나니 불꽃모양이 본래대로 되었다.

 그 때가 정월보름이었다. 경봉스님께 세배도 드리고 자신이 본 촛불이 무엇인지도 여쭐겸 알부민주사약을 사들고 통도사 극락암에 갔다.

 극락암 큰 방에서 세배를 받으시느라 바쁘신 경봉스님을 작은 방으로 모셔와 주사를 놓아드리면서 자신이 본 촛불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스님께서 주사를 맞지 않는 한쪽 손을 머리위에다 올리시며 ‘야 참 불가사의 하다’하고는 한 말씀도 안하셨다. 무슨 말씀이 없으신가 하고 앉아 있는데 주사를 다 맞으시고 일어나 앉아 계시다가 갑자기 보살의 손을 ‘확’ 잡아 당기며 손바닥을 ‘탁’ 치셨다. 너무나 깜짝 놀라 얼떨결에 스님을 쳐다보니

 “니 잠은 마음 대로 하지”하셨다.

 “네, 잠은 마음 대로 합니다”했다.

 그러나 “뭐는 못보지”하셔서 “네 뭐는 못봅니다”했다.

 그러자 “아이구, 공부를 했으면 도인이 되는긴데 공부를 안하니 아깝다”고 하시며, 그 희귀하다고 한 것을 보여 줄 테니 따라 오라고 하셨다.

 스님을 쫒아 큰 방으로 가니 “네가 본 것이 화련 이라고 하는 것이다. 화련만 보는 것도 희귀한 것인데 (크기를 손으로 그리시며) 이 만한 화련을 보았으니 더욱 귀한 것이다. 또 그만한 화련도 귀한 것인데 심지가 춤을 춘 것은 더욱 귀한 것이다. 네가 그 화련을 보고 오면 너를 위하여 이 글<자기 본래심을 보려면 야반삼경에 초 춤추는 것을 보라는 게송, 지금은 독성님을 모신 불단 위에 걸려있음>을 기념으로 써줄 것인데 네가 오기 전에 내가 이 글을 이미 써놓았으니 이 일이 희귀한 일이 아닌가” 하셨다.

 “아이구 마, 스님 그럼 내가 본 것을 봤구만요” 했더니 “아니다”고 냅다 호령을 하셨다. 그 날 아침 글을 쓰다가 벼루와 먹이 좋길래 그냥 생각이 나서 이 글을 쓰셨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스님께서는 보살님께 선공부를 시키려고 부단히도 애를 쓰셨지만 스님 말씀 대로 도인이 못되고 아깝게 되어버렸다며 웃으신다. 가끔식 스님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리고 “스님, 이 옷 참 좋네요”해도 “망상 말라”며 두들겨 패서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 결국은 그것이 내내 공부에 몰입해 있으라는 말씀이셨는데 그러지를 못한 것이다.

 정월 보름 스님을 뵙고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스님께서 “뭐는 못보지”해서 분명 “뭐는 못본다”고 했는데 그 ‘못본다는 것’ 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흘만에 또 스님을 찾아갔다.

 “스님, 제가 뭘 못본다고 했는데 그 못본다는 것이 뭡니까. 제가 뭘 못 본다고 했습니까”했더니 “니가 모르는걸 내가 어찌 아노”하시고는 두 말도 하시지 않았다.

 “공부를 해보면 공부가 되었는지 되지 않았는지 아는 법이지. 그 이후 경봉스님께서는 부산에 나오실 적마다 내가 사는 아파트(부산시 중구 창선동 소재)에 들러 내가 없어도 이 게송 앞에서 껄껄 웃으시다 가시곤 했지. 간절한 신심만 있으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신심자체가 스승이 되고, 공부가 수승해지면 지혜가 밝아지는 법이야.”

 보살님이 기도를 하면서 가장 철저하게 여기는 것은 부처님과의 시간약속이다. ‘힘닿는 대로 하지’하는 안일한 생각은 해본 적도 없으시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100일간 기도하겠다고 마음 먹으면 그 시간을 꼭 지켰다. 그것을 못 지키면 곧 원하는 바를 절대로 얻지도 못하며, 얻기를 바래서도 안된다고 딱 잘라 말씀하신다. 누구에게보다도 자기자신에게 엄격해야 하며, 자신이 노력한 만큼만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실지로 보살님은 기도를 하므로써 많은 공덕을 받아 썼다며 그 구체적인 사례를 한가지 들려주셨다. 그것은 기도로써 병마를 물리친 액기다.

 한 번은 미국에서 보름을 함께 지낸 친구 둘이가 서울에 왔다고 전화가 왔다. 그런데 그 때 보살님이 얼마나 아팠던지 물 한방울 못먹고, 숨도 못 쉴 정도였다. 친구들이 실망할까봐 아프다는 애기도 못하고 내일 오라고 전화를 끊었지만 걱정이 태산 같았다. 자신이 아파 누워 있으면 친구들이 얼마나 걱정을 하고 실망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하도 걱정이 돼서 “아야, 어짜꼬. 아야, 어짜꼬”하며 하루종일 소리를 질렀더니 보살님 아픈 것은 뒷전이 되었고, 허공이 바로 부처님의 세계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나서 그 날밤 꿈을 꾸었는데 왠 여자아이가 보살님의 이부자리로 기어 들며 자고 간다고 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오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뜯어내면서 반야심경을 3편을 외우다가 꿈을 깼다. 꿈속에서 깨어나 하던 반야심경을 마저 외우고 12시쯤 다시 또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씨름하는 장사처럼 어마어마하게 큰 사내가 숨도 못 쉴 정도로 보살님을 힘껏 껴안았다. 온몸이 으스러질 정도였다. 그런데 그 때 보살님은 그 사람의 등을 잡아 떼어내면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웠다. 세 번째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면서 잠이 깼다.

 그 씨름장사를 떼어내려고 얼마나 용을 썻던지 머리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온몸에서 땀이 비오 듯 했다. 그리고 났더니 몸이 가쁜해지고 나를 것처럼 되었다. 새벽 4시까지 독성님 앞에서 염불하고 정근하고 나가서 씻고 나니 친구들이 와서 열흘간 잘 놀고 돌아갔다.

 그런데 또 신기한 것은 친구들을 보내고 막 현관을 들어오는데 등뒤에서 누가 ‘툭’치는 것이었다. 훔찔 놀라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고 다시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하도 마음을 쓰니까 도와주셨구나. 정업은 불멸이구나. 내가 좀 아파주어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가 1987년이었는데 그 때 이후 항상 찌뿌둥하고 아파서 꼭 필요한 곳은 갈만하고 항상 고단해서 무슨 병인가 싶어 병원에 가 보려고도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가까이 지내는 한 스님이 “보살님의 마음에 검은 구름이 낀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내가 왜 그것을 몰랐을까’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줄기찬 정진생활을 할 때면 단 한마디에도 깨닫는 법이듯 ‘신묘장구대다라니로 그 큰 씨름장사도 뜯어냈는데 내가 왜 병원갈 생각을 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내 눈으로 보아 놓고도 왜 몰랐을까 하는 한심스러운 생각도 들엇다.

 집에 돌아온 보살님은 꿈속에서 그 씨름장사를 떼어내던 순간을 똑바로 관하며 하루에 30번씩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웠다. 이렇게 며칠을 하고 나니 몸이 씻은 듯이 나았다.

 또 한가지 복이라면 복이겠지만 보살님은 자신이 돈을 벌려고 노력한 적도 없고, 돈을 지키려고 한 적도 없음에도 평생 살만큼 재산이 항상 쌓여 있었고, 시주도 하고 공부도 할 만큼 풍족했다. 원래 다방면에 안목이 있어 돈을 벌려면 더 못벌것도 아니었지만 ‘돈 벌어서 뭐 할라꼬’하며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보살님의 나이 32살, 자유당 시절에도 남들이 극장을 지으면 돈을 번다고 해도 보살님의 판단 대로(우리나라 에서는 최초로) 4층짜리 아파트를 지었고, 그 아파트는 지금 부산에서 땅값이 제일 비싼 신창동에 위치한다.

 그리고 보살님은 절대로 남을 의심하지 않고 그러므로써 오히려 더 큰 자유를 누린다. 집에 공양주보살도 꼬박 33년을 함께 살았고, 아파트 지배인도 30년째 한가족으로 일하고 있다. 현재의 농장장에게도 모든 것을 일임하고 있다. 돈의 노예가 되어 자유를 잃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그래서 몇 달간 집을 비우고 절에 가서 공부를 하고 와도 모든 일이 제대로 돌아간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있는 사람부터 부처님의 품안에서 기도하며 정진할수 있도록 스스로 그 모범을 보인다. 하물며 무학무식의 사람에게는 녹음테프를 통해 반야경과 천수경을 외우게 하고, 집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도 기도의 시간만큼은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도록 배려해주는 세심함을 베풀고 있다.

 도명화 보살님은 적지 않은 재산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개인의 생활은 출가승처럼 검약하다. 그리고 무한정 돈이 나올 수도 없는 처지이고 보니 보시도 꼭 필요한데를 찾아 꼭 필요한 만큼 하고 계시다. 보살님이 매일 아침 ‘남의 피가 되고 약이 되어지도록 쓰여지이다’라고 발원하듯 살이 될 데보다 피와 약이 될 데를 찾아 보시한다.

 “동래구에 있는 관음포교당 보명스님은 참말로 희귀한 보배다. 강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포교한다고 원을 세우고 나왔는데 포교당 운영이 어려워 1년도 못되어 짐을 챙기려 안하나. 가서 보니 너무 똑똑코 야무진데 내가 보기에 너무나 가슴이 아픈기라. 요즈음 그런 스님이 어디 흔한기가. 그 스님이 그러고 다시 절로 들어가면 자신은 물론이려니와 주위에 있는 도반들의 사기가 얼마나 떨어지겠노. 내가 월세를 대줄테니 한번 해봐라 했더니 다시 힘을 얻어 시작한 것이 3년이 되었다. 이제는 내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라. 그리고 지금은 학생 법회만 하더라도 4부제로 본다카더라. 어디 요즈음처럼 바쁜 세상에 산속절 찾아가겠나. 이런 절이 자꾸 서야지.”

 차가운 아스팔트길이라고 할지라도 3년을 앉아 있다 보면 따스한 기운이 배이듯, 뜻을 세우고 불사를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자리가 잡힐 때까지 여유있는 사람이 도와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곁에서 용기를 북돋아 주고 격려해 주는데에서 더욱 힘을 얻을 수 있는 가닭이기도 하다.

 스스로도 그렇게 말씀하시듯 이제 죽어도 원도 한도 없다시는 보살님께 남은 여생을 어떻게 보내고 싶으시냐고 여쭈엇다. 그랬더니 아련한 눈매로 창문 밖 농장을 바라보시며


  통도사 선방에서 선을 하노라니

  밤은 깊어 달은 밝고 눈은 하얀데

  신명을 밝혀 밖에 나와

  자박자박 뽀드득 뽀드득

  눈위를 밟다 보면

  오직 달 하나 나 하나.

  세상은 고요히 잠들고

  달과 나만이 벗을 하는구나.

  옛적 자장율사가 딸 아들에게 통도사를 대물림했으면

  지금도 이 절이겠는가.

  공유의 것으로 했으매 지금도 그절이 이 절이구나.

  도인의 마음이 머물었다 가도 그 모습 그대로구나.


 한 수의 시를 읊듯 옛적을 회고하시더니

 “내가 깔고 있는 이 터전은 통도사가 앉은 평지의 두배는 넘는다. 내 마지막 꿈은 이 터전에 ‘미타마을’을 세울끼라. 롯데호텔만큼 큰 빌딩을 세워 온갖 편리시설을 갖추고, 스님은 이곳에서 수도하고 일반 불자들은 자기의 업대로 좋아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도량으로 가꾸고 싶다. 선방에서는 선을 하고 염불당에서는 하루종일 염불소리가 끊이지 않고... 지금이라도 당장 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그린밸트지역으로 묶여 있어 아직은 어렵다. 그러나 때가 되면 곧 될기라. 매일 아침 한번씩 축원 하는 좋은 일인데 왜 안될끼고.”

 도명화보살님은 자식이 있어도 울 수 있고 자식이 없어도 웃을 수 있고, 평생을 웃고 살지, 울지는 않겠다며 50까지 남편과 함께 살면서도 자식을 낳지 않았다.

 보살님의 원은 ‘미타마을’건설에 있다. 살아생전에 시작도 못할 지도 모르나 죽어서도 그 원은 결실을 맺으리라 꼭 믿으신다.

 5시간 여분 보살님의 말씀을 듣고 나오는 기자의 마음은 무엇인가 그동안의 삶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곳잡아 세우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다짐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믿음과 행으로 일관한 불자의 삶은 이렇게 하여 이 땅을 지키고 역사를 가꾸어 가는 것을 다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