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체험의 건강학

현대인의 정신건강/불교의 건강원리

2007-07-01     관리자
 

    불교가 석존이래 2500년을 발전해오는 동안에 불교계 내부에서는 수행법(修行法)으로서의 명상법이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개발이 되어서 시행이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소멸이 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가장 보편적으로 시행이 되고 있는 명상법은 물론 선종(禪宗)의 좌선명상법인데 좌선명상법은 복잡한 기법(테크닉)을 요하지 않아 누구나 쉽게 해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선종의 좌선명상법이 일반사회에도 가장 널리 보급되었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 보면 좌선명상법은 의외로 아무나 유효적절하게 하기가 어려운 면도 가지고 있다. 화두(話頭)를 드는 요령을 제대로 터득하고 실천하기가 쉽지 않으며 또 제대로 화두를 들고 규칙적으로 수행을 한다고 해도 일반인들은 수행력의 향상을 스스로 감지할 수 있는 가늠자가 없어서 재미를 못 느끼니까 중도에서 열을 잃고 그만두는 사람이 절대다수로 많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명상인(혹은 불자)들이 일상적으로 좌선명상을 규칙적으로 하는 것은 시행하면서도 간간히 명상에 대한 새로운 재미도 맛볼 수 있게 이미지체험의 명상법을 섞어서 했으면 어떨까 하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미지체험의 명상법의 유력한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의 하나로 나는 ‘정중견불(定中見佛=명상 속에서 부처님을 본다)’을 마음속으로 꼽는다. ‘정중견불’에 관한 천태지의의 ‘마하지관(摩詞止觀)’에서는 "명상중에 시방세계에 지금도 살고 계시는 부처님들이 눈앞에 출현하여 우뚝 선 모습을 본다. 그 모양은 눈이 좋은 사람이 맑게 개인 밤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
    원래 고대인도에서는 진정한 부처와 천인(天人)등은 감각의 눈을 가지고는 볼수 없는 천상계에 산다고 믿어지고 있었다. 그와 같은 보이지 않는 천상의 신들의 세계를 말하자면 지상에서 눈으로 볼 수 있게 본뜬 것이 불상과 만다라였다. 오늘날에도 국내외의 밀교사원이나 통불교적인 우리나라 사원에는 많은 부처와 보살과 천인 등을 극채색으로 그린 만다라가 장식되어 있고 불상도 눈부시게 빛나는 금색으로 칠해진 것을 볼 수가 있다.
    이와 같은 만다라나 불상은 원래는 그 절의 스님들이 명상을 하고 수행을 하기 위한 도구(얀트라)로 사용되던 것이었다. ‘얀트라’는 수행을 하기 위한 도구라는 말이다. 만다라와 얀트라는 모두 응시.관상(觀想)의 대상으로서 사용되는 것이었지만 만다라는 주로 불교에서 사용되는 것을 지칭했고 얀트라는 힌두교에서 사용되는 것을 지칭했다.
    그리고 불상이나 만다라를 이용하는 명상법은 이와 같은 불상과 만다라를 예배ㆍ 응시하기도 하고 찬미하는 말을 입으로 외우면서 마음을 부처의 이미지에 집중하여 깊은 엑스터시(황홀경)의 상태로 들어가 실제로 깨어 있는 상태에서 천상계에 살고 있는 부처들의 광경을 경험하게끔 훈련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부처들을 본다는 일은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환각(幻覺), 환시(幻視)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환각, 환시는 정신질환자들이 겪는 병적인 환각, 환시와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한 때는 그와 같은 건강한 환각, 환시와 병적인 환각, 환시를 구별할 분명한 기준이 설정되어 있지를 않아서 그를 혼동했기 때문에 ‘정중견불’ 같은 이미지체험수행을 금한 일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환각은 분열병 환자 등에게 일어나기 쉬운 증상인데 그와 같은 병적인 환각은 보통은 뜻하지 아니하게 불수의적(不隨意的)으로 엄습해 와서 환자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러나 병적인 환각이 아닌 ‘정중견불’같은 수행중의 환각은 보통 명상중에나 경험될 뿐이지 명상을 중지하면 환각도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정중견불’의 명상수행은 그 정도가 깊어짐에 따라서 그와 같은 환각이 점차로 사실성을 띠게 되면서 강렬한 감동과 엑스터시(황홀감)을 유발하여가게 되는것이다. 사실은 감동과 엑스터시는 사람의 생활 속에서의 윤활유와 같은 것이다. 인생살이의 따분함을 제거하기 위해서도 강한 감동과 엑스터시는 더러 경험할 필요가 있는것이다. 연애중인 남녀에게는 환한 생기가 도는 것도 연애에는 일종의 가벼운 감동과 엑스터시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현대의 심리요법 가운데에는 ‘정중견불’같은 이미지체험의 기법을 닮은 것이 더러 있다. 슐츠의 ‘자율훈련법’이 그렇고 어떤 종류의 ‘자기최면술’이 그렇다. ‘자율훈련법’의 심상시훈련(이미지체험)에서도 열명 가운데에서 한 두 사람쯤은 마음속으로 그리는 색채가 실제로 보이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쉽게 되지는 않는 이야기이다.
    어느 훈련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정중견불’같은 훈련을 한 두 번쯤 했다고 해서 깨어 있는 상태로 간단하게 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생생한 광경이나 천상계의 신불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은 심리요법이나 명상법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심리요법과 명상법은 이렇게 공통되는 점도 많이 있는 한편으로는 기본적인 출발점이 크게 다르다. 심리요법은 원래 심신질환의 치료법으로서 고안된 것이기 때문에 마음 가운데에 생긴 의식과 무의식의 갈등, 분열을 원상으로 되돌려 정상상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마음 속에 뭉쳐 있는 컴플렉스라는 ‘감정의 응어리’를 해소시키고 녹여 가는 것이 심리요법이다. 다만 정상인일지라도 컴플렉스가 아주 없는 사람은 없지만 정상인의 경우에는 심리요법가의 신세를 져야할 병적인 이상상태로 까지 이르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컴플렉스는 각자에게 고유한 마음의 운영패턴, 말하자면 성격이라든가 기질같은 것과도 관계가 되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심리요법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환자의 마음의 병적 이상상태이며 그 목적은 그와 같은 이상성을 고쳐서 정상적인 마음의 건강을 되찾자는데에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하여 ‘정중견불’같은 수행법으로서의 이미지체험의 경우는 병적 이상상태를 치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출발점은 사람의 일상생활에서의 정상적인 마음의 상태에서 부터이다. 거기에서 출발하여 더욱 높게 변용(變容)된 의식상태에 이르는 것이 그 목적이다. ‘정중견불’같은 이미지체험을 거듭하여서 감동과 엑스터시를 많이 느끼게 되면 마음도 순화되고 신심도 두터워지고 자비심도 함양되고 생활에서 더욱 활기를 느끼게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심신의학이나 정신의학 같은데에서는 변용된 의식상태를 ‘변성의식상태(약칭ASC)’라는 말로 지칭하는 일이 있는데 이것은 최면, 환각, 명상, 기도 같은 행위에 수반되는 감동ㆍ황홀의 상태 등, 일상 보통의 의식상태와는 다른 심리상태를 총칭하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삼매’도 변성의식상태에 속한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줄여 말한다면 우리가 명상을 하는 목적은 이런 변성의식상태를 많이 체험하자는 데에 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중견불’, 좌선명상 같은 명상과 심리요법은 심리학적으로 본다면 같은 무의식의 메카니즘을 취급하는 것이지만 출발점과 목표는 이렇게 다른 것이다. 심리요법은 병적 이상상태에 있는 사람을 정상적인 수준까지 회복시키려는데에 목적을 둔 방법이지만 ‘정중견불’, 좌선 같은 명상에 의한 수행은 마음의 활동능력을 현재 보다 더욱 강화시키고 더욱 향상시켜 가기 위한 훈련법이라고 할 수가 있다. 쉬운 예를 든다면 가령 불끈 화를 잘 낸다든가 소심해서 언제나 뒷전으로 도는 마음의 버릇을 가진 사람이 항상 평온하고 애정을 가지고 남을 접할수 있게 되기 위한 훈련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佛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