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법을 전하는 몸짓, 동희스님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

2016-11-07     최배문

부처님 법을 전하는 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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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희 스님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 전수교육조교 
박송암 스님에게 영산재 사사
1945년 충북 청주 출생
1950년 서울 청량사 출가
1978년 범패 연수소 자인사 설립
1989년 영산재 시연
1995년 국립극장에서 영산대작법을 처음으로 무대에 올림
1995년 비구니로 첫 영산재 이수자 지정(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
2000년 미국 뉴욕 공연, 미국 케네디홀의 가장 보고 싶은 공연으로 선정
2004년 미국 캘리포니아, 유욕, 매사추세츠 등 7개 주 순회 공연
2007년 미국 뉴욕, 샌프란시스코 등 5개 도시 순회 공연
현재 동국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등 출강하고 있으며, (사)동희법음회 이사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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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       “스님은 다겁생에 염불을 하셨군요.” 돌아가신 청화 스님께서 오래전 염불하는 젊은 동희 스님을 지그시 보면서 하신 말씀이다. 적절한 통찰이다. 아홉 살에 서울 청량사 뒷산에 올라 남몰래 흙을 쌓아 작은 법당을 만들었다. 청량사 쌀독에서 한 움큼 쌀을 갖고 와 마지를 올렸다. 그리곤 돌아가신 할머니와 엄마를 목 놓아 울면서 부르며, 회심곡과 염불을 했다. 아홉 살 목소리는 법당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소녀의 아픈 기억들을 보듬었다. 절에서 몰래 갖고 온 냄비 뚜껑에 칡넝쿨을 묶고 혼자 바라춤을 추고, 냄비로 태징을 만들어 솔방울로 치곤 했다. 그렇게 한바탕 소녀만의 범패를 하면 온 세상이 환희로웠다. 소녀의 나이 아홉 살이었다. 3년 후 스님은 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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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       열세 살. 청량사로 영산재 강습을 온 송암 스님(1913~2000)과 필연으로 만났다. 스승은 자상하면서 엄하셨다. 혼나는 일은 일상이었지만, 수십 년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스승은 제자를 칭찬한 일이 거의 없다. 늘 경책했다. 동희 스님이 47세 때다. 이제 스님은 제자도 있었다. 어느 날 대중 앞에서 스승은 동희 스님을 거침없이 꾸짖었다. 스승이 야속했다. 스승과 독대하며 여쭸다. 야단맞을 각오였다. “스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야.” “스님, 저는 몇 살쯤 되면 안 혼나요?” 이 말을 듣고 한동안 스승은 말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 “지금도 야단 안 쳐도 된다.” 스승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그러고 또 가만히 계셨다. 그러곤 조용히 말씀했다. “지금도 잘해. 그런데 지금 잘한다고 하면, 네가 자만할까봐 그래.” 동희 스님은 눈물을 왈칵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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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      비구니스님은 오랫동안 영산재 계보에 오르지 못했다. 비구니스님이기에 주변의 시선은 더 차가웠다. 염불하는 비구니스님들은 염불하는 것을 감췄다. 이를 깨보고 싶었다. 스무 살이 넘어서 범패의 맛을 보았다. 어느 날 소리가 몸을 감고 온 세상에 퍼져 나갔다. 몸에 전율이 오며, 눈물이 났다. 그때 몸의 기억이 오늘까지 이어진다. 범패는 법을 전하는 몸짓이다. 모든 법계에 전하는 것이다. 모양이 없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소리의 파장을 느껴야 한다. “아~~어~~~아~~” 소리가 저 위에 올라가서 목을 감싸고 내려온다. 도량 전체가 소리로 감싸인다. 범패를 할 때의 마음을 묻자 이렇게 답한다. “모든 생각을 비우고 오로지 부처님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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