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정신치료] 지혜로 살아가기 1

2016-11-07     전현수

지혜로 살아가기 1

불교정신치료는 정확하게 보는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가 정의하는 지혜는 ‘있는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보는 게 왜 필요하냐면 내 생각과 실제가 차이 난 만큼 괴로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 괴로움을 잘못 해결하는 과정에서 정신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정신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불교를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제 경우에는 ‘실제를 보고자 하는 노력’으로 봅니다. 실제를 보고 난 뒤에 그에 따라서 자기한테 가장 도움이 되게 사는 것입니다. 불교는 궁극적인 과학, 궁극적인 철학, 궁극적인 심리학인데 그것은 실제를 그대로 봤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실제를 보려고 노력하느냐? 실제를 보는 데 가장 장애는 ‘나’입니다. ‘나’가 어떤 생각이나 감정을 가지고 있고,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제가 왜곡됩니다. 그걸 내려놓고 실제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게 되면 점점 실제에 근접해지는 겁니다.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실제를 보려고 하는 마음을 먹는 게 세상을 새롭게 보는 큰 전환점이 됩니다. 실제를 정확히 봐야 되는데 그걸 정확히 보지 못하게 하는 장막이 세 가지 있어요. 그 장막을 제거하고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을 정확하게 봐야 됩니다.

첫 번째 장막이 개인이 살아온 역사입니다. 개인적인 장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경험하고 살아온 것이 우리가 보는 대상을 왜곡시킬 수 있습니다.

두 번째가 문화적인 장막입니다. 사람에게는 각각의 성격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듯 각 지역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각 지역에 맞는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환경의 영향, 또는 그 전에 살았던 사람의 영향 등에 의해서 생깁니다.

세 번째는 인간 존재 자체가 가진 한계입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을 가졌어요. 이것을 통해서만 뭘 보고 느끼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한계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즐거움을 원하지 괴로움을 원치 않습니다. 살기를 원하지 죽기를 원하지 않아요. 그런 게 또 왜곡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장막을 통과하기가 아주 어려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 장막이 작용하는 것도 결국은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 작용은 어떤 느낌이나 생각과 같은 정신작용으로 탁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정신작용을 관찰하는 훈련이 잘 되어 있으면 우리가 뭘 볼 때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걸 스톱하고 보려고 자꾸 노력하면 비교적 실제에 근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 걸 마구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축적됩니다. 축적되는 그 순간은 힘이 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하루 이틀이 아니고 몇 달 몇 년 축적되면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워요.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순간순간 그게 올라올 때마다 다스리면, 힘도 약하고 다스리기도 쉽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을 지키고 자기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게 하려면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가 없으면 자기한테 손해 보는 걸 계속 하게 됩니다. 탐진치를 일으키는 건 다 손해 보는 겁니다. 정신인식과정에서 업이라는 게 결국은 탐진치입니다. 서양의 정신분석은 불교에서 말하는 정신인식과정을 보지 못했어요. 그렇게 때문에 화가 일어났을 때, 그것이 우리 정신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정확하게 보지 못한 겁니다. 그래서 서양의 정신분석에서는 화가 억압되면 나중에 크게 폭발할 수 있으니까 적절하게 표현하라고 하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도 좋은데 사실은 모든 화는 우리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제가 볼 때도 화를 계속 가지고 있는 것보다, 화를 한번 내고 없는 게 훨씬 나아요. 그런데 우리가 화를 내게 되면 잠깐 화내도 정신인식과정의 하나인 ‘속행’에서 거의 천만 번 이상 화가 일어납니다. 일어나면서 그 하나하나의 속행들이 다 과보하고 연결돼요. 그런 미세한 걸 보게 되면 화의 위험성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은 소리 지르는 것만 화라고 생각하는데 그것만 화가 아닙니다. 참고 있는 것도 화내고 있는 겁니다. 진정으로 이해해서 내 마음이 온화하지 않으면 다 화내는 거예요. 탐진치貪瞋癡 중에 치癡라는 것은 인과의 법칙과 업의 법칙을 모르는 거예요. 업의 원리를 정확하게 보고, 인과의 법칙을 정확하게 보면 치가 없는 겁니다. 그것을 못 보기 때문에 그 치가 원인이 되어 탐貪과 진瞋이 일어나는 겁니다. 탐은 당기는 거고, 진은 밀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정확하게 보면 그냥 그대로 다 모든 일이 일어날 만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는 탐진치를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탐진치, 이것이 축적돼서 정신불건강의 토대가 되고, 거기서 정신적인 문제가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은 강박적인 형태, 어떤 사람은 불안의 형태로 터져 나옵니다. 그래서 진정한 치료, 근본적인 치료는 무탐無貪・무진無瞋・무치無癡가 작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무탐・무진・무치, 이게 우리에게 무슨 엄청난 지혜가 있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현재에 집중하면 그 순간이 ‘무탐・무진・무치’입니다. 하루 종일 현재에 집중하면 마음에 아주 유익한, 마음의 좋은 속행이 계속 일어납니다.

우리에게는 살아가는 데 힘이 필요합니다. 『자타카(Ja -taka, 본생경)』에 다섯 가지의 힘이 나옵니다. 제일 하급의 힘이 주먹이에요. 그 다음 힘이 돈의 힘입니다. 돈보다 더 강력한 힘은 권력입니다. 그 위가 가문의 힘입니다. 제일 강력한 힘이 지혜의 힘입니다. 앞에 것들은 다 한계가 있는데 지혜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 순간에 자기한테 가장 최선인 걸 항상 택할 수 있기 때문에 지혜의 힘이 가장 강력합니다.

우리는 뭔가를 정확하게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걸 정확하게 봐서 그것이 나에게 정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좋으면 환영하고, 나쁘면 싫어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주식투자를 안 하는 사람은 주식 떨어지면 좋아해요. 그런데 주식 떨어지면 경제가 안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사는 데 영향이 옵니다.

우리가 “힘들다.” 하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는 겁니다. “돈이 없어서 힘들다.” 그러면 돈 없는 걸 감당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몸이 아파서 힘들다.” 몸이 아픈 걸 감당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는 겁니다. 내가 ‘이것’ 때문에 힘들다 하면 ‘이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초점을 힘들게 하는 것에 둡니다. 초점을 ‘마음’에 두세요. 마음을 강하게 하면 어떤 것도 우리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제가 10여 년 전에 봤던 환자인데, 친구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엄청 걱정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동창들을 만나면 자기한테 무얼 하냐고 물어볼 것이고, 자기가 지금 놀고 있다는 거 말하기가 참 괴롭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일단 가서 동창들이 오면 빨리 돌아오라.”고 조언을 했습니다. 그 환자가 장례식에 갔는데, 정작 친구가 한 명도 안 왔대요. 이런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실제는 다를 수 있어요. 진정한 치료의 시작은 내 생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실제를 보는 가장 좋은 훈련은, 아침에 눈떠서부터 잘 때까지 자기가 하는 일에서 일어나는 것을 정확하게 보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분명한 앎이 생겨요. 우리는 밥이 그냥 넘어가는 줄 압니다. 밥 먹는 것은 일련의 과정이에요. 숟가락을 우선 들어야 되고 밥을 퍼야 되고 입에 넣어야 되고 씹어야 되고, 씹을 때 침이 가득 고여요. 그리고 그것이 위로 넘어가고…. 그런 걸 분명하게 알게 되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섞여 있어요. 인간은 아주 복잡한 현실을 효과적으로 처리해야 되기 때문에 실제를 볼 여유가 없어요. 시간도 없고. 그래서 자동적으로 처리해요. 그러다 보니까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막 뒤섞여 있습니다. 현재에 집중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 그러냐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아는 기능’이 있어요. 아는 기능이 있는데 마음이 온전히 작동을 할 수 없게끔 머릿속에 뭐가 너무 많이 들어 있어요. 생각, 감정, 선입견, 이런 것들 때문에 마음이 아는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어요. 오로지 현재에 집중하면 마음이 다른 것의 방해 없이 아는 기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존재나 사물을 100% 보면 그 사물이나 존재와 온전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과를 지켜보는 노력을 하는 게 좋습니다. 항상 결과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십시오. 어떻게 되나, 하고 항상 결과를 지켜보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면 실제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자타카(Ja -taka, 본생경)』를 보면 보살은 자기한테 손해 보는 거 절대로 안 합니다. 어떤 경우도 안 해요. 그게 가장 놀라웠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해롭게 하는 감정, 생각, 가치관, 자존심을 우리의 적으로 봐야 됩니다. 우리가 믿을 수 있을 땐 우리를 믿으면 됩니다.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우리를 믿으면 안 됩니다. 내가 정확하게 판단하고 믿을 수 있는 상태가 되면 나를 믿어야 됩니다. 그런데 내가 잘 판단 못하거나, 판단이 흐리거나, 또 나에게 손해가 올 땐 나를 믿으면 안 됩니다.

제가 볼 때는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 결정을 못하는 것도 정신이 불건강한 것입니다. 내가 모르면서 좋은 거 선택하려고 하면 선택 못해요. 너무 효율적인 것을 추구해도 정신이 불건강한 경우가 많습니다. 자세히 보면 자기가 원하는 효율로 인해 희생되는 게 무지하게 많아요. 손해 안 보려 하는 것도 정신이 불건강한 것입니다. 손해 안 보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손해 보는 것에 초점이 모여 있습니다. 예를 들면 누구를 만나서 돈을 자신이 내고 난 뒤 돈을 손해 봤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만나는 과정과 이후의 결과까지 전체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같이 있었던 사람들 속에 있는 고마움이거든요. 여러 가지를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손해 봤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돈 없는 사람은 아예 안 만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면 엄청난 손해예요. 돈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정신건강을 알 수 있습니다. 돈은 우리한테 영향을 많이 줍니다. 돈을 정확하게 보는 사람은 굉장히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에 대해서 환상을 갖고 있어요. 돈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또 돈이 뺏어가는 것도 굉장히 많아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건 시간입니다. 돈을 얻기 위해서 시간을 막 쓰는 사람들 있어요. 전혀 지혜롭지 않습니다.

늘 경전을 통해 부처님의 지혜에 접속하다보면, 조건적인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자유와 행복을 추구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저는 많은 경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느꼈지만, 이 중 두 개의 경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상윳따 니까야』의 「탁발 음식의 경」과 『앙굿따라 니까야』의 「알라와까 경」입니다. 이 두 개의 경을 계기로 무조건적인 자유와 행복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무조건적인 자유와 행복을 얻으면 어떤 조건에서도 우리는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보통 조건적인 자유와 행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조건이 없어지면 그냥 자유와 행복은 없어져요. 어찌 보면 조건적인 자유와 행복은 뭐 그냥 그대로 오는 겁니다. 소극적이고 누구나 쉽게 얻는 겁니다. 그런데, 무조건적인 자유와 행복은 좀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면 항상 편안하게 살 수 있어요.

무조건적인 자유는 그냥 주어지진 않습니다. 조건적인 자유와 행복은 그냥 주어집니다. 무조건적인 자유와 행복은 우리가 노력을 해서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됩니다. 이런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거기에 가까이 다가가는 겁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시간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전현수
1956년 부산에서 태어나 한양대학교 의대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3년 미얀마에서의 위빠사나 수행을 비롯한 수개월의 집중수행을 통해 몸과 마음의 작동 원리를 탐구하고 그 결과를 치료에 적용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생각 사용 설명서』, 『마음 치료 이야기』, 『울고 싶을 때 울어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