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비나이다, 비나이다

2007-06-29     관리자

 '굿'하면 그 말과 동시에 우리의 상념을 비끌어 매는 것은 떵더꿍 가락에 맞추어 하늘이 낮은 듯 뛰어오르며 춤추는 무당의 모습일 것이다.

 예전에는 어디에서 굿판이 벌어진다는 소문만 나면 어린 아이, 어른을 가릴 것 없이 굿구경을 빙자해서 온동네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곳이 그 굿판이었고 종당에는 또한 모두가 하나로 어울려 홍풀이에 뛰어드는 공동체적 놀이판이기도 하였다.

 굿은 무당이 주관하여 이끄는 의례행사로서 그 굿을 청한 사람의 소원을 신들에게 전하고 또 그 허락을 받는 것이 목적이다. 곧 여러 종류의 신들을 모셔서는 정성껏 차린 음식과 음악과 춤으로 대접하여 그 신들이 흔쾌하게 그 소원을 들어주도록 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정성이 부족하여 호박떡이 설었구나'라고 하는 농담도 실은 그 무당의   말이 아니라 굿판에 모셔진 신들의 뜻이 무당의 입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 말로서 차린 음식에 대한 정성이 부족함을 탓하는 꾸중인 것이다.

 누구나 이러한 굿이 우리 민족과 함께 한 유산이라는 데에는 동감하지만 역사적으로 언제부터 이러한 굿이 시작되었는지는 누구도 단정하지 못한다. 다만 이 굿과 무당이 불교를 포함한 다른 종교들이 이 땅에 들어오기 전부터 있어 왔다는 사실은 단군신화나 중국의 역사서를 통하여 가늠해 볼 수 있겠다.

 무당의 '무(巫)"자에 대한 해석을 찾아보면 工는 하늘과 땅을 연결한다는 뜻이요, 그 양편에 있는 인(人)은 춤추는 사람을 표시한 것이라 한다. 곧 춤과 노래로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을 하나로 연결케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제사와 정치는 분리되지 않았고, 그러기에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춘이가 또한 정치도 함께 행하였으므로 지금의 무당들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단군과도 연관이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단군이라는 호칭도 아득한 저때에 우리 민족이 쓰던 제사장의 고유명칭이며 무당의 한글 호징인 '당골'이라는 말의 뿌리라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무당이 굿판을 벌이는 목적이 그 굿을 청하는 이의 소원을 이루려 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무당은 그 굿판에 따라 그 자리에 맞는 신을 모셔오게 된다. 따라서 굿의 종류도 다양하며 지역에 따라 그 명칭도 다르다.

 예를 들어 죽은 사람의 넋을 저승으로 보내기 위하여 흔히 벌이는 넋굿의 경우, 경기도 지역에서는 진오기굿이라고 부르는데 평안도에서는 다리굿, 함경도에서는 망묵굿, 전라도에서는 씻김굿, 경상도에서는 오구굿, 제주도에서는 시와맞이굿이라고 달리 부른다.

 옛날로 올라갈수록 굿판의 규모도컸다. 고구려의 '동맹'에 대하여 '10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데 이때가 되면 나라 안 사람들이 모두 모인다'고 중국의 역사서인 <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의 굿판 규모는 나라굿이라고 부를 만 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나라굿은 점점 축소되어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마을굿의 규모를 넘지 못하였다. 그래도 이나마 명맥을 유지해 오던 굿이 더욱 모질게 탄압받은때는 일제시대였다.

 그들은 이 땅에 들어오자  마자 수많은 자금과 학자들을 동원하여 우리의 민족적 특성을 연구하였고 그결과 굿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문화적 모태이며 그 굿판이 신들과 함께 어울려 춤추면서 이 민족을 하나로 묶는 끈임을 파악하였다.

 곧 그들은 문화정책이라는 이름아래 '굿은 곧 미신'이라고 규정하고 우리에게 교육시키는 한편, 굿판을 벌이는 무당이 있으면 가차없이 잡아가두어 그 맥락을 끊으려 하였다.

 지금도 우리는 '미신'하면 곧 굿을 연상하는 것도 이 때문인데 미신이라는 말도 우리에게는 없었던 말이거니와 굿 자체를 종교로서의 옳고 그름으로 자르기보다는 오랫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 살아오면서 우리의 가락과 노래와 정서를 담고 있는 민족문화의 한가닥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기도 하다.

 앞서도 이야기하였지만 굿은 종류도 많고 지역마다 그 내용도 다르다. 그러나 굿의 기본구조는 어느 곳이나 똑같다.

 첫번째는 굿판을 깨끗이 하고 신을 청해들이는 청신이고 두번째는 그 모신 신들을 대접하고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대답도 들으며 함께 어울려 노는 오신이며 마지막은 그 모신신을 다시 돌려보내는 송신이다.

 현재까지 행해지는 굿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굿은 강릉단오굿인데 대관령에 있는 국사서낭당에서 범일국사의 신을 신목에 받아서 강릉시내로 들어오면 이때부터 강릉단오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범일국사는 신라말의 스님으로 구산선문의 하나인 굴산사파의 개조인데 이처럼 무속에서는 역사적인 실존인물도 곧 신으로 모셔지는 특징이 있다.

 이렇게 신을 모셔들인 다음에는 온갖 음식으로 대접하고 노는데 그 음식이 부족하다 싶으면 곧 대감신이 타박을 한다.

 먹고 남고 쓰고 남게 도와주었건만 어허, 괘씸하고 괘씸하다. 갈비로 양치질하던 내 대감인데 요것이 무어란 말이냐.

 이런 사설이 무당의 입에서 터지기만 하면 굿판에 모인 사람들은 잘못했다고 두 손으로 싹싹 빌기도 하고 정성을 보탠다고 돈을 무당의 옷깃에 붙이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이 끝나면 무당은 신이 내려온 신목과 그밖의 기물들을 불에 태워 그 신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한다. 곧 불길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신이 제 거처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굿을 주관하는 무당에도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이름 모를 신병을 앓고 무당이 되는 강신무이고 또 하나는 집안에서 대대로 이어가는 세습무이다.

 그러나 모든 무당은 스스로 원해서 무당이 되지는 않는다. 특히 치료 할 수도 없고 병명도 알 수 없는 신병을 앓고 내림굿을 통하여 무당이 되는 경우, 무당이라는 직업을 버리면 다시 몸이 아프고 괴로워 그 직업을 떠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 것이다.

 이처럼 신이 내린 강신무는 굿하는 도중에 스스로 신이 들어 신격화되면 그때부터는 신으로서의 위엄을 갖추어 굿판에 모인 사람들에게 예언을 하기도 하고 날이 선 작두날 위에 맨발로 올라가 춤을 추기도 한다.

 또한 신이 들어 무당이 되기는 하였으나 정식으로 굿하는 법을 익히지 않은 무당을 선무당이라고 하는데 이런 무당이 어설프게 굿판을 벌이면 오히려 사람을 해치게 한다고 하여 '선무당 사람잡는다'는 속담이 생기기도 하였다.

 어쨌거나 이제 굿은 우리 곁에서 꽤나 멀리 떠나 있다. 마을굿도 거의 명맥이 끊겼고 요즈음은 한 사람의 개인을 위하여 벌리는 개인굿이 굿판의 명맥을 잇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도 우리의 문화, 단군을 비롯한 불교, 유교 등의 문화가 용해되어 있음을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 하겠다.

                                                       지안    노승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