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음식기행] 그 가을볕 황금빛 호박이 어여뻐라

보명 스님과 함께 늙은 호박 찾아 떠난 여행길

2016-10-05     박찬일

그 가을볕 황금빛 호박이 어여뻐라 

 
보명 스님과 함께
늙은 호박 찾아떠난 여행길
 
불광 취재 차량을 어언 2년 얻어 타고 다녔다. 팔도에 안 가본 데가 드물다. 그 공덕이 여간 아니다. 비록 사람이 몰아야 동력에 힘을 내는 기계일 뿐이지만 다만 그게 전부는 아닐 거라는 마음이 피어나는 것이다. 사진 찍는 최배문 작가에게도 송구한 일이다. 매번 옆자리에 앉아 안전띠나 여미고 나면 달리 할 일이 없어지고 마는 것이니까. 오늘도 신경주역으로 마중 나온 우리 취재 차량을 얼른 알아본 건 마치 멀리서 식구 뒤통수만 봐도 아는 것과 흡사했다. 묵묵히 바퀴를 굴려 몰아가는 곳으로 향하는 이 차량에게 잠시 감사의 마음을 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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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가
내비게이터를 켜고 스님 계신 보광사로 향하는데, 점점 공기가 짙어진달까, 그래 그것이다. 바로 산중 냄새다. 화면은 그저 파란 산속으로 난, 한 줄기 끊어질 듯한 소롯길 한 자락만을 보여주고 있다. 깊이 계시는구나. 송구하게도 공양 시간 딱 맞춰 들이닥친 우리다. 절 올릴 틈도 없이 상을 받는다. 여담인데 이 상을 마음속에 단단히 찍어두었다. 너무도 조촐했고, 참으로 덕 있는 상이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분칠한 듯한 음식에 시달린 혀가 깨어났다. 다녀와서 아내에게 차린 상을 그대로 읊었다. 어디 가서 비싼 밥 아니 얻어먹어 본 일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한 번도 그걸 되새겨본 적도 없는 나였다. 그러나 보광사 보명 스님의 상은 내 각막에 그대로 상像으로 맺혔다. 아내에게 했던 호들갑을 옮겨 본다. 
“글쎄, 절밥다운 공양을 했어. 고추나물에 깻잎장아찌, 콩잎절임에 매실장아찌, 김치와 묵은지가 하나였어. 밥이란 뭔지 한 소식을 보여주시더군. 아아, 정말 잘 먹은 밥이었어. 오래도록 그런 밥을 언제 또 먹겠어.”
국을 빼놓았다. 늙은 호박을 썬 듯 만 듯, 요리한 듯 아닌 듯, 고수인 듯 하수인 듯 국에 들어가 있는데 그 깊고 그윽한 단맛과 소금 맛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호박이라면, 나는 본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쪽이다. 어려서 인분 거름 준 호박 구덩이에 한 발 푹 빠진 이후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디 한구석 표나게 잘난 맛이 없는 호박의 본성이 그다지 다가오지 않았던 까닭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이건 스님의 공양 정신을 슬며시 보여주는 그림자 같기도 한 상이었다.
“호박이 말이오, 이봐요, 거사님. 이거, 이걸 봐요. 호박이 저절로 자라는 줄 알지요? 나도 그랬어요. 호박 따위야 제힘으로 자라건 말건 그랬어요.(웃음) 보세요, 여기 잔뿌리, 아이고 이 가을에, 서리가 머지않은 때 저 살겠다고 실뿌리를 내잖아요.”
공양 후 스님이 일군 밭에서 나눈 대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이기도 했다. 무심한 듯 보이는 모든 존재가 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 악착같이 제 몫을 다하는 일, 스님은 그것을 초발심이라고 했다. 
“이 하얀 민들레, 보세요, 여린 잎을 피웠어요. 가을인데….”
가을인데, 다 저무는 가을인데, 저 일체중생은 왜 살겠다고 뿌리를 내고 싹을 돋우는지. 다시 밥상으로 생각이 저대로 돌아가 쌉쌀한 여운을 남긴다. 스님의 늙은 호박국에 딱 한 점 들어 있던 작고 매운 풋고추 조각 때문이었다. 점을 찍듯이, 덤덤한 국과 건더기 위에 조촐하던 풋고추의 매운맛이 다시 혀에서 돋았다. 우리는 그저 살아내는 것인가. 삶으로써 다시 무엇을 이루려는 것인가. 작은 고추 조각 한 점이 그 느른한 마음을 찌른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공양 상 받아 놓고 외던 스님의 또박또박한 오관게五觀偈가 예사롭지 않았던 건 내 마음 때문이었겠지만, 다시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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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은 호박의 참된 맛을 그렇게 안 거지
스님의 밭은 경사진 언덕에 차분하게 치맛자락을 펼쳤다. 군데군데 호박이 늙어 수확을 기다린다. 모종과 어린잎, 늙어서 쇠한 작물의 마지막 흔적 같은 것이 혼재되어 있다.
“고추 농사를 올해 잘 지었어요. 이월에 씨 뿌리고 사월에 모종 내고 할 일이 참 많은 작물이지.”
스러져 가는 고추밭에서 스님의 말씀이다. 스님의 손이 거칠다. 농사짓는 손이라 그렇단다. 외람되지만, “비구니 손이 이렇게 크고 거칠어서 원.” 하고 농담도 하신다. 고추 얘기 좀 더 해주세요. 
“고추 농사 어려운 건 다 알지요. 기후 영향이 많아서. 그래도 돈 되니까 농민들이 짓느라 고생들 많아요.”
스님이 고추 하나를 들고 배를 가른다. 노란 씨가 가득하다.
“고추 하나 얻어서 씨 심으면 백 개 이상 모종이 나오겠지요. 산술적으로. 허나 그게 다 고추가 되지는 않아요. 우리가 죽어서 다시 사람 몸을 받는다는 건 보통 인연이 아닌 것이지. 내 몸을 안다는 건 그래서 비상한 일이야, 정말 대단해요.” 영원한 것은 없어요, 라고 말씀을 닫는데 나는 그것을 무진無盡으로 들었다. 유한한 것과 무진의 이율배반, 우리가 살아가는 건 어쩌면 이 불가해의 늪에서 뚜렷하게 무언가를 보는 일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지, 그래서 우리가 고추씨처럼 덕을 주는 존재가 되어야겠다, 그런 마음이 있어요.”
농사의 어려움, 삶의 진력. 콩 심으면 처음엔 노루가 싹을 뜯고 알이 익으면 새가 와서 쪼고, 다시 노루가 와서 콩밭을 밟고. 그게 농사라고 하며 웃으신다.
마침 호박을 딸 때가 되어서 울력하듯 하나둘 커다란 호박을 꺾었다. 호박 줄기에서 뚝, 하고 꺾어야 호박이 떨어진다. 묵직한 놈과 가벼운 놈, 잘 생긴 놈과 못난 놈, 골이 깊은 놈과 얕은 놈 다 제각각이다. “출가해서 어느 날 사숙스님이 호박 중탕 해주시는 거예요. 속을 파내고 대추와 꿀을 넣어서 가마솥에 이렇게 걸쳐서, 천천히 중탕을 해서요. 물을 걸러내요. 맑으면서도 진해요. 그걸 먹고 지친 몸에 기운을 차렸지요. 늙은 호박의 참된 맛을 그렇게 안 거지. 따로 산모한테 좋다던 말도 흔한 민가의 얘기이고. 약 안 치고 잘 기른 호박은 병을 고쳐요.”
호박을 원래 큰마음이 있어서 심은 것도 아니었다. 넝쿨을 지어 놓으면 잡풀들을 좀 제압해주려니 하고 기르신 거란다. 그런데 막상 풀어 놓고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손길 안 닿는 작물이 없다는 말씀. 
“잡초라고 부르는 풀이 정말 대단해요. 호박이 꼼짝을 못해요. 저 들판에 던져진 삶이니 얼마나 악착같겠어요. 우리 삶도 좀 그런 맛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거칠게 필사적으로 기도를 해보지 않고서 덕을 얻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겠나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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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도 꾸밈도 없는 맑은 요리
손맛은 타고난다는데, 스님도 그러셨던 모양이다. 출가해서 공부할 때 채공으로 공양간 바닥 일도 많이 했다. 원주스님께 별자로 임명되어 밥도 좋이 지어 바쳤다. 그것이 그 시절의 소임이었다. 
“한번은 동학사에서 소임 하는데, 별자가 됐어요. 돌아가면서 공양 노력을 바치는 거지. 내 차례가 되어서 뭘 해보려는데 먹을 게 뭐 있나, 그때. 원주스님한테 가서 그랬어. 기름이랑 밀가루 좀 달라고. 그때 봄이라 쑥이 지천이었거든. 쑥 뜯어서 밀가루로 반죽해서 기름에 지졌어. 쑥 전 같은 거였어요. 스님네들이 다들 맛있다 하고. 칭찬도 들었어요. 뭐, 그렇게 지금도 공양간 들여다보게 된 건가(웃음).”
늙은 호박으로 무얼 할까, 생각하시더니 “범벅 어때?” 하신다. 마침 마을에서 보살 한 분이 마실 오셨다가 거든다. 경상도식 범벅이다. 나도 손을 보탠다. 잘 삶은 팥, 찹쌀가루, 강낭콩 삶은 것, 그리고 호박과 설탕에 소금. 그게 전부다. 문자 그대로 범벅을 하면 되는 요리다. 
“그러니 재료가 중요해요. 맛 낼 방도가 없는 요리일수록 재료, 재료의 힘이야.”
거짓도 꾸밈도 없는 맑은 요리, 덕행과 참됨이 있는 세상에 맞는 요리. 
스님은 맛도 잘 내는데, 말씀도 맛있다. 호박오가리를 오려 말려서 멥쌀로 떡 만드는 장면, 나물처럼 말려서 무치는 장면까지 실감나게(?) 묘사한다. 아아, 다시 배가 고파진다. 
스님께 뒤늦은 절을 올린다. 손수 길러서 따고 덖은 헛개잎차가 달다. 스님은 인도에 학교를 열어 아이들을 건사하고 기르고 있다. 파담파니관세음학교다. 중등과정인데, 흙바닥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시고, 측은지심이 발동한 것이 결국 학교를 짓는 데까지 이르렀다.
“인도가 석가모니를 배출한 나라 아니에요? 우리가 갚아야 할 것이 있다, 그렇게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몸이 인도의 석가모니불에서 비롯한 작은 고추씨인 것, 갚는 일은 당연하다는 부연 설명도 이어진다. 
호박밭에서 말씀이 있었다. 
“이 밭에 음식쓰레기를 버립니다. 그것이 썩어 퇴비가 되어 호박을 기르는 것이지요. 우리가 덕행을 하는 건 그것과 같은 일이에요. 작고 소박한 것을 주어도 쓸모가 있게 주면 꽃을 피운다는 세상의 이치 같은 걸 들여다보게 돼요. 왜 아니겠어요.”
범벅이 다 되었다. 숟갈을 들자 아까 보살이 무심한 듯 한마디 하시는데, “식어야 맛있니더.”란다. 쓸모는 때가 있는 법. 다시 호박밭으로 눈이 갔다. 스님은 마당의 모과나무에 뽀로롱, 날아든 산새에게 먹이를 주신다. 잣 한 톨을 먹기 위해 새는 스님의 손으로 날아온다. 
“제 목소리를 알아요. 부르면 날아와요. 이렇게 쪼아서 가져간 잣은 새끼들 주는 거지. 나무관세음보살.”
푸른 하늘로 잣을 문 곤줄박이가 솟구쳤다가 숲으로 내리꽂혔다.                                    
                      
 
박찬일
‘문학과지성사’가 운영하는 ‘로칸다 몽로夢路’의 헤드셰프이자 작가. 어머니 치맛자락 앞에서 콩나물과 마늘을 다듬으며 요리를 시작했다. 서울에서 몇몇 히트식당을 열었으며, 한국 식재료를 이용한 이탈리아 요리는 그가 최초이다. ‘글쓰는 요리사’로 『뜨거운 한 입』, 『백년식당』,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보통날의 파스타』 등 그만의 따뜻한 시선과 감성어린 문장이 돋보이는 책들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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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
늙은 호박 1/2개, 넝쿨콩 1/2컵, 팥 1컵, 찹쌀가루 3컵, 소금 1큰술, 설탕 1큰술, 물

 

 

 
 
 
만드는 법
1. 늙은 호박은 껍질을 제거한 후 씻고 작게 썰어 호박이 무르도록 푹 삶아 준다. 넝쿨콩과 팥도 각각 냄비에 넣고 푹 삶아 둔다.
 
 
 
2. 무르도록 삶은 늙은 호박을 믹서로 곱게 갈아서 냄비에 다시 끓인다.
 
 
 
 
3. 간 호박이 끓으면 삶은 넝쿨콩과 팥을 넣고 골고루 섞으며 끓여 준다.
 
 
 
 
 4. 찹쌀가루를 흩뿌려 넣고 바닥이 눌어붙지 않게 주걱으로 계속 저어 준다. 걸쭉한 농도가 되면 소금과 설탕을 넣어 기호에 맞게 간을 맞춘다. 한소끔 끓인 후 완성한다.

 

 

 

 

 

 

 

Tip_
늙은 호박은 숙성된 기간만큼 성숙하고 더 많은 영양소와 효능을 가진다. 또한 잘 익을수록 당분이 증가한다. 늙은 호박의 당분은 소화 흡수가 잘 되는 당질이며 비타민 A의 함량이 높아 위장이 약한 사람이나 회복기의 환자에게 특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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