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인터뷰] 전남 장흥 곡인무영 스님

“사람 만나는 일이 탁발托鉢이며, 수행”

2016-09-07     김성동

전남 장흥 곡인무영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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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흥으로 간다. 곡인무영 스님이 있는 곳이다. 불교계에서는 낯선 인물이다. 주요 종단에 적을 두고 있지도 않고, 불자들이 익숙하게 본 출가자의 그것과 다르다. 법상에 앉아 법을 설하지도 않고, 사찰에서 신도를 맞이하지 않는다. 스님은 길에서 사람을 만나고, 사람이 모인 곳을 찾아간다. 배우며, 어울린다. 그뿐이다. 스님의 페이스북facebook에는 이런 활동이 드러난다. 찾아간 날에도 스님은 2층짜리 오래된 상가 안에서 장흥 지역 청년들 몇 명과 GMO(유전자재조합식품) 독서토론을 하고 있다. 상가 사무실이지만, 마을 공부방이며, 만화방이다. 옆에서는 20년도 넘은 오래된 선풍기가 돌고 있다. 20여 분이 지나자 토론은 끝났다. 스님은 “GMO 공부를 하고 싶어 불청객처럼 끼어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그래도 어울려 공부하니까 좋다.”며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었다. 
 
- 여기서 주로 계신가요?
 
“아뇨. 여기는 독서토론 때문에 왔습니다. 제가 자주 가는 곳은 ‘지구별 여행’입니다.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 절은 어디신가요?
 
“가깝지만, 절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습니다. 혼자 머무는 곳이라, 대접해드릴 게 없어요.”
 
많은 시간을 밖에서 보내고,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외부에서 손님이 와도 대부분 밖에서 만난다. 장흥 밖으로 여러 지역을 다니기도 한다. 인터뷰 전날에도 대안학교인 홍천 해밀학교 행사로 올라갔다 왔다. 우리 일행을 안내한 곳은 다섯 평 정도의 카페다. 간판에는 ‘지구별 여행’이 적혀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세월호 리본이 한가득 놓여 있고, 기타, 책, 낙서 등 장흥 지역 문화인들이 제법 들락거린 흔적이 배어 있다. 스님은 세월호 이야기를 하자, 그 화통한 웃음기가 사라졌다. 
 
“세월호는 제가 한평생 살아오면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이곳에서 가깝고, 개인적으로 그날 이후 한 번도 세월호 문제를 놓아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곳에 자주 가고, 그 아픔을 사람들과 나누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야기했죠.” 이야기를 나눌 때 마침 오후 4시 16분이 되자, 스님의 스마트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4월 16일, 그날을 매일 잊지 말자는 스스로의 약속이다.  
 
스님이 출가한 것은 1985년 고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신 아버지를 절에 모시고 불법(스님은 불교보다 불법이라는 말을 좋아한다고 했다.)을 공부하면서 불가에 귀의했다. 특히 스승과 제자가 묻고 답하는 『금강경』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불법을 공부하면서 관심을 둔 새로운 영역은 유럽 철학이었다. 특히 프랑스 사회학자인 피에르 브루디외(1930~2002)의 저작들을 많이 읽었다. 출가한 이후세속에서 일을 했다. 수년간 버스 운전기사를 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더 많이 만났다. 경전과 사람들. 적지 않은 기간 동안 화두였다. 이곳 장흥에는 2007년에 내려왔다.
 
- 『금강경』의 어느 문구가 스님에게 영향을 주었나요?.
 
“텍스트를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금강경』이라는 텍스트가 아닌, 『금강경』이 보여준 컨텍스트가 중요합니다. 저는 늘 컨텍스트를 봅니다. 『금강경』은 대화와 소통을 알려줍니다. 고타마 붓다도 저는 그분의 지향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삶을 따라갑니다. 붓다를 봐도 그분이 살아오신 삶의 맥락을 봐야 합니다.”
 
- 보통 스님들은 지역에서 사회복지 등을 하는데요. 
 
“하하, 그렇죠. 저는 오지랖이 넓습니다. 특히 지역의 문화와 교육 쪽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대개 사람들의 생각들은 개인의 습관에서 나옵니다. 습관은 관습이고, 이것은 하나의 문화입니다. 이 문화를 바꾸면 개인들의 생각도 많이 바뀝니다. 만나는 사람들도 문화와 교육 쪽에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 페이스북을 보면, 늘 사람들과 어울립니다. 
 
“제가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가 사람들을 만나면서 하는 이야기는 ‘이렇게 삽시다.’라고 하지 않고, ‘이렇게 살아왔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의미냐면, 제가 지금 살아온, 살아가고 있는 삶이 결국은 제가 살아가고 싶은 삶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늘 만나고 교류합니다. 지역에서 모임이 끝나면 항상 뒤풀이는 참석합니다. 제가 오신채와 육식을 하지 않습니다. 오랜 습관이어서 체질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과 만나고 어울리면 그런 걸 피할 수 없죠. 그때 우스갯소리로 ‘편식장애’라고 합니다. 그러면 분위기도 좋아지고, 소통도 잘 됩니다. 그렇게 어울립니다. 하하.” 
 
- 왜 절에 안 계시고, 이렇게 나와서 계시죠?
 
“저에게는 마을이 도량입니다. 저에게 스마트폰도 도량입니다. 손바닥 도량. 늘 생각합니다. 내가 이 승복을 입고 살아가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고타마 붓다가 갔던 길을 어떻게 하면 따라갈까? 제가 내릴 결론은 ‘잘 씀’입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출가한 것은 괴로움 때문이고, 그가 깨달은 것은 ‘고苦는 연기緣起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붓다는 이 연기를 ‘잘 쓰면서’ 살아가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제가 그의 삶에서 배운 것은 연기입니다. 저도 그렇게 ‘잘 쓰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 잘 쓰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요?
 
“심우尋牛라고 하죠. 출발한 곳과 되돌아온 곳은 같은 자리입니다. 0˚와 360˚는 같은 자리죠. 굳이 마을에서 산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출발은 마을이고 되돌아올 곳도 마을입니다. 이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잘 비우는 것입니다. 잘 쓰기 위해서는 잘 비워야 합니다. 무아無我지만, 그 무아가 잘 쓰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 스님에게는 그 ‘잘 씀’이 지역과 사회성으로 나타나는데요. 
 
“연못에 돌을 던지면, 수직으로 내려가는 동안 수평의 동심원이 생깁니다. 수직의 운동성이 멈추지 않는 한 계속 동심원이 생깁니다. 늘 마을에 있지만, 동심원을 그리듯이 사회성으로 나타납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중심은 있습니다. 다만, 내가 나온 자리, 시작한 자리에서 어긋나지 않았는지 살핍니다.”
 
- 대부분 스님들은 절을 중심으로 활동합니다.
 
“예, 저는 ‘저를’ 중심으로 활동하죠.(웃음) 절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도 고정된 틀입니다. 기존의 패턴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절과 불사는 만인불사萬人佛事입니다. 모든 사람이 부처입니다. 제가 만들려는 사찰은 ‘게스트 템플guest temple’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하고, 쉬고, 자다 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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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과 함께 “대접해드릴 게 없다.”는 절을 찾았다. 절 이름이 없다. 무명사無名寺. 110여 평의 터에 이동식 한 칸짜리 방이 전부다. 불사 중이다. 터를 정비 중이어서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사람들이 찾아오고 싶어 해도 드릴 게 없어 초대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 한 잔 드리는 것이 전부입니다.” 불사를 빨리 해야 하지 않느냐, 하고 묻자, 치아를 활짝 드러내며 웃는다. “해야죠. 지금 계획을 하고 있는데, 아직 밖의 일이 많아서 집중하지 못합니다. 제가 밖으로 움직이는 노마드 성향이 강하고, 또 노숙도 많이 해봐서 이렇게 사는 것도 익숙합니다.” 말하자면, 절은 거의 잠만 자는 곳이다. 그것도 잠깐씩. 절 입구에는 스님이 몰고 다녔던 마티즈 차량 한 대가 있다. 10여 년간 55만Km를 달리고, 폐차를 앞두고 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지역과 사람들을 만났는지 상징적으로 알 수 있다. 이 차로 전국 방방곡곡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제가 마티즈로 55만km를 달렸는데요. 저는 그것을 탁발로 표현합니다. 저희 표현으로는 ‘문화탁발’입니다. 또 이것을 만인불사라고도 합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탁발입니다. 사람 만나는 일은 마중물을 만나는 일입니다. 문화를 탁발하면서 움직이는 것이죠.”
 
- 절에 신도님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생활 경비는 어디에서 충당하시나요?
 
“예.(웃음) 제가 자주 일용직 일을 합니다. 아, 오늘 입금되었어요. 건물에 전기 보조 일을 했는데 일당이 입금되었네요.(웃음) 고맙죠. 전에는 산판 일도 하고, 뭐 다하죠.”
- 재정이 늘 부족하겠습니다.
 
“제가 시주하라는 말을 잘 못합니다. 몇몇 분들이 복을 빌어달라고 하는데, 그것은 제가 받지 않습니다. 다만, 활동하면서 재정 지원을 해주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고맙게 받고 있습니다. 그래도 모자라면 제가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서 일당을 벌고 그렇게 합니다.” 
 
- 절을 중심으로 스님께서 지향하는 일을 할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보통 단체를 만들고, 조직을 만들면서 일을 시작합니다. 그러면 일이 틀어집니다. 오히려 자유로운 주체들이 어우러져 뜻이 있으면 일이 됩니다. 느슨한 연대죠. 그럴 때 관계가 만들어지고, 조직이 짜이게 됩니다. 물론 근거지는 필요합니다. 현재는 조직적인 지향보다도 활동에 많은 중심을 갖고 있습니다. 만인불사를 목표로 하고 있는데, 아직 조건이 안 되고 있으니까요. 지금은 주변의 다양한 사람들과 뜻을 나누는 것입니다.” 
- 앞으로도 계속 장흥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시나요?
 
“예, 그렇죠. 장흥은 제 표현으로는 아궁이골입니다. 아궁이는 게이트고, 사람이 장작입니다. 여기가 중심입니다.”
 
스님은 스스로를 ‘삼판’ 수행자라고 한다. 불법의 이치를 탐구하는 이판理判도 아니고, 절집에서 승단을 외호하며 종무를 보는 사판事判도 아닌 것이다. 때문에 스님의 걸음은 불교 수행자로는 낯설다. 이판도 아니고, 사판도 아닌 불교 수행자가 가는 길은 어딘가? 오늘은 또 누구와 만나며, 어느 곳에서 몸을 의지할까, 궁금해졌지만,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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