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만나다] 유식唯識 (2)

개개인의 세계가 형성되는 구조

2016-09-07     김사업

개개인의 세계가 형성되는 구조

 
유식唯識 (2)
 
 
김사업
쓰레기 치우다가, 버린 사람 욕하면
 
CCTV에는 그 앞에서 일어나는 광경이 하나도 빠트려지지 않고 다 기록된다. 이와 유사하게 내가 행하는 몸짓 하나, 말 한마디, 생각 한 자락은 반드시 자신의 영향력을 남기고, 이것은 나의 아뢰야식에 모두 다 저장된다. 선한 행위는 선한 종자를, 악한 행위는 악한 종자를 나의 아뢰야식에 남기는 것이다. 그 종자는 없어지지 않고 아뢰야식에 남아 있다가 조건이 갖추어지면 그에 맞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상이 지난 호에서 언급한 요점이다.
 
10여 년 전의 일이다. 지인들과 함께 설악산 봉정암을 참배하고 하산하고 있었다. 모두 지친 몸들이었지만 길가의 쓰레기를 주워 빈 봉지에 담아 가며 내려왔다. 등산로의 쓰레기를 주워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것이다. 길가의 쓰레기는 그래도 줍기가 수월하다. 그런데 길에서 멀리 떨어진 저 아래 개울 가까이 버린 쓰레기는 길가 쓰레기보다 줍기가 몇 배나 힘들다.
 
버린 사람은 눈에 덜 띄게 멀리 버리는 것이 그래도 양심적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이왕 버릴 수밖에 없다면 길가에 버리는 것이 그래도 낫다. 개울까지 내려가서 쓰레기를 줍던 모 씨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버리려면 가까이에나 버리지. 어떤 녀석이.” 
 
여기까지 말하다가 놀란 듯 그는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말했다. “아뿔싸! 쓰레기 줍는 좋은 일 하면서 이렇게 욕을 해 버리면 욕 종자까지 심고 말지.” 그렇다. 쓰레기 줍는 선행 종자만 심으면 좋을 걸 괜스레 욕 한마디 하면 욕 종자까지 심고 만다.
 
종교 단체나 자선 단체는 평소에 행하기 힘든 선행을 쌓거나 맑고 청정한 마음을 함양하기에 좋은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그래서 나는 사찰을 ‘복 짓는 독서실’이라고 부른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나는 독서실을 많이 이용했다. 집에 공부방이 있었지만 집중도가 독서실을 따라가지 못했다. 욕망과 경쟁의 거센 바람이 부는 사회 속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와 온정을 상실해 가는 우리들이 맑은 덕목과 심성을 회복하기에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는 곳이 사찰이다. 
 
적어도 사찰에서만큼은 말 한마디도 부드럽게 하려 하고, 몸가짐도 정갈하게 하려 한다. 법당에서 부처님 전에 정성을 다해 삼배를 올린 뒤 고요히 앉아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공부하기에 좋은 곳이 독서실이라면, 사찰은 이렇게 복 짓기에 좋은 곳이다.
 
그런데 사찰에도 익숙하게 되어 타성이 붙게 되면, 사회에서 행하던 좋지 않은 행동들이 사찰에서도 불쑥 튀어나오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남이 먼저 꽂아 놓은, 기도처의 멀쩡한 양초를 뽑아내고는 자신이 가져온 양초를 꼽는 사람도 있다. 새치기하다가 싸움을 벌이는가 하면 좋은 자리, 좋은 방석을 자신의 전유물인 양 확보해 놓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있다. 
 
사찰에서 남에 대한 배려 없이 자신만 편하려 한다거나 본인의 좁은 생각만 고집한다면, 독서실에 공부하러 와서 공부는 않고 흐트러진 자세로 잡생각만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복 지으러 온 사찰에서 복 짓고 있다가 아차 하는 사이에 이런 누를 범한다면 등산로에서 쓰레기 치우다가 욕하는 꼴이 아닐까?
 
 
|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한 번뇌의 종식은 없다 
 
불나비는 스스로 불 속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잃고 만다. 활활 타는 불 속으로 빨려 들 듯 질주하는 불나비. 이 불나비를 숭고한 일에 목숨 걸고 매진하는 사람에 대한 비유로 사용할 수도 있겠으나, 파멸의 길로 치닫는 사람의 비유로도 사용 가능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후자의 비유로 사용하고 싶다. 
 
불나비를 죽음과 파멸로 이끄는 불 속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엄청난 충동적 에너지 때문이다. 활활 타는 불을 보는 순간, 불나비는 어찌할 수 없는 그 충동적 에너지로 인해 불 속으로 질주하여 생을 마감하고 만다.
 
우리도 불나비가 아닐까? 분노의 불길 속에 뛰어들어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조차 재로 만들어 버리는 불나비. 우리를 충동질하는 불꽃은 분노만이 아니다. 욕망·증오·이기려는 충동·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이라는 불이 붙으면 우리는 모든 것과 단절한 채 눈먼 장님처럼 맹목적으로 된다. 예를 들어 증오의 불꽃이 일면 사람들은 독설과 무시, 지능적인 가해 등 다양한 폭력을 구사하여 상대의 가슴에 아물기 힘든 상처를 준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가 가져오는 최후의, 최대의 피해자는 바로 본인이다. 상대의 상처로 본인은 잠시 후련할지 모르나 본인 내면의 증오의 장치(프로그램)가 붕괴된 것은 아니다. 컴퓨터를 켜고 키보드의 A키를 누르면 화면에는 A자가 뜬다. 이것은 특정 키를 눌렀을 때 정해진 어떤 글자가 화면에 뜨도록 하는 장치(프로그램)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각자의 내면에는 어떤 것을 증오의 대상으로 삼는 복잡한 장치가 있다.
 
 우리는 그냥 “밉다!” 하고는 거기서 끝내지 않는다. “상대가 이러하니 이런저런 이유로 미워할 수밖에 없다.” 하면서 상당한 시간에 걸쳐 미운 대상을 떠올리며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신 또는 타인에게 정교하게 설명한다. 이런 설명의 과정을 통해 증오는 정당화된다. 설명이 정교하여 확고하게 정당화될수록 증오의 장치는 견고해지며 증오는 더 깊어져 장기화된다. 
 
이번 증오의 대상에 대한 보복이 끝나면 증오의 장치는 또 다른 대상을 찾아 동일한 폭력 과정을 반복하려 한다. 증오의 장치가 온전히 남아 있는 한, 그리고 이 장치가 견고하고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을수록 증오는 본인에서 떠날 줄 모른다. 수시로 찾아오는 증오 때문에 본인은 마음이 편치 않으며 잠 못 이루는 밤도 많다. 그 여파로 본인의 생활은 괴로움에 부대낀다. 
 
내면의 증오의 장치가 와해되지 않는 한 증오의 종식은 없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한, 증오를 비롯한 번뇌 장치들의 와해는 없다. ‘있는 그대로’는 설명이라는 포장을 걷어 내야 보인다. 상대가 이러하니 증오할 수밖에 없다고 아무리 정교하게 설명해도 ‘있는 그대로’의 증오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가려질 뿐이다. 
 
선사들은 화두 참구를 통해 ‘있는 그대로’를 보았고 모든 번뇌 장치들이 와해되는 경지에 들었다. ‘있는 그대로’를 보려면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 그 열정이 나의 모든 것이 될 정도로 그것은 강렬해야 한다. 석가모니가 전생에 설산동자였을 때 진리 한 구절을 듣는 대가로 나찰에게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주려 했던 그런 열정이 있어야 한다. 
 
번뇌 장치들을 만들어 내고 견고하게 유지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하여 번뇌의 불꽃을 보는 순간, 불나비처럼 주체할 수 없는 충동에 의해 그 불 속으로 질주하여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치닫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그것은 시시각각으로 내가 행하고 있는 몸짓 하나, 말 한마디, 생각 한 자락과 그것들이 남기는 종자들이다. 
 
순간순간의 행위와 그 종자들을 일종의 에너지로 보면 이해는 쉬워진다. 일상생활 순간순간 우리는 몸과 말과 생각으로 온갖 종류의 에너지를 쌓고 있다. 본인이 하루 종일 쌓고 있는 에너지가 어떤 성질의 것인지 살펴본 적이 있는가. 선하고 맑은 에너지인가? 아니면 분노와 증오, 짜증과 탐욕 등의 탁한 에너지인가? 번뇌의 에너지가 쌓이면 쌓일수록 번뇌 장치들은 견고해지고 급기야 주체할 수 없는 번뇌의 충동으로 불 속으로 질주하는 불나방이 되고 만다. 
 
 
| 아뢰야식 연기설
 
순간순간의 나의 행위들이 어떤 식으로 아뢰야식에 종자로 남겨지고, 종자는 아뢰야식에서 어떻게 지속되며, 언제 종자에서 그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여기서 언급되는 ① 현행훈종자 → ② 종자생종자 → ③ 종자생현행…의 순환이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개개인의 세계가 형성되며 일체가 생겨난다고 유식은 본다. 이것을 아뢰야식 연기설이라고 한다.
 
① 신체적 행동·말·생각이 일어남과 동시에 그것과 선악의 성질이 동일한 종자가 아뢰야식에 심어진다 -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
 
선업이 행해짐과 동시에 선善종자가 아뢰야식에 심어지고, 악업과 무기업이 행해지는 순간 악惡종자와 무기無記종자가 아뢰야식에 각각 심어진다. 여기서 ‘심어진다’에 해당하는 유식의 전문 용어는 ‘훈습熏習된다’이다. 훈습은 향이 향내를 옷에 배게 하여 남기듯이 행위가 그 영향력, 즉 종자를 아뢰야식에 남기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현재 행해지고 있는 행위가 아뢰야식에 종자를 훈습하는 과정을 전문 용어로는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 즉 ‘현행이 종자를 훈습한다.’라고 표현한다. 
 
엄밀히 말하면 유식에서 ‘현행現行’이란 종자로부터 현재에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안식에서 말나식까지의 7가지 식을 가리킨다. 이 7가지 식을 ‘현행식現行識’이라 부르는데 이 식들은 모두 종자에서 생한 것이다. 이 점은 뒷부분에서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현재 행해지고 있는 신체적 행동·말·생각은 결국 현행식의 작용이다. ‘현행식’이나 ‘현재의 행위’나 여기서는 같은 것을 지칭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현행’을 편의상 ‘현재의 행위’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② 훈습된 종자는 선·악·무기의 성질을 바꾸지 않으면서 아뢰야식 내에서 찰나찰나 생멸을 반복하면서 상속되어 간다 -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
 
최대한 단순화시켜 언급하겠다. 악행을 한 번 하여 악종자 하나를 심은 사람이 그 후에 선행을 열 번 하여 선종자 열 개를 심었다고 하자. 이때 선종자와 악종자는 아뢰야식 안에서 서로 상쇄되어 소멸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선종자와 악종자가 합당한 비율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둘 다 소멸한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에 불과하다.
 
유식에 따르면, 기존의 악종자 하나는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선종자만 열 개 불어날 뿐이다. 이런 이유로, 나쁜 일은 일체 하지 않아 마냥 착하게만 보이던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악행을 저지르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오래 전에 심어져 남아 있던 악종자가 조건이 갖추어져 실제의 행동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악종자 등 깨달음에 방해가 되는 번뇌 종자는 통달위通達位라 불리는 굉장히 높은 수준의 수행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는 소멸하는 일이 없다. 그때까지 아뢰야식 내에서 자신의 성질을 바꾸지 않으면서 보존되어 간다. 그 이전까지는 몇 생을 거듭해도 이 종자들은 없어지지 않는다. 
 
종자가 아뢰야식 내에서 보존되어 가는 방식을 ‘찰나찰나 생멸을 반복하면서 상속된다.’고 표현하는데 무슨 뜻일까?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 수는 100조 개에 달하고, 이 세포들은 약 3개월이 지나면 모두 새로운 세포들로 대체된다고 한다. 매 순간 어마어마한 수의 오래된 세포들이 죽고 그 자리에 새로운 세포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3개월 후 나의 간세포가 완전히 새로운 세포로 바뀌었다 해서, 이 세포가 콩팥 기능을 하거나 나와 건강 상태가 다른 타인의 간세포로 변한 것은 아니다. 3개월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나만의 독특한 간세포 기능을 한다. 오래된 세포가 죽는 대신 그 세포를 원인으로 하여 성질이 동일한 새로운 세포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직전에 죽은 세포가 없었다면 지금 이 순간의 새 세포도 있을 수 없다. 양자는 동일하지는 않지만 둘 사이에는 원인과 결과라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밀접한 인과관계에 있기 때문에 둘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만약 둘이 완전히 다른 것이라면 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야 하므로, 지금의 이 세포는 직전의 그것 없이도 있을 수 있다는 오류를 범하고 만다. 결론적으로 이전의 세포와 현재의 그것은 ‘같다고도 할 수 없고 다르다고도 할 수 없는’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에 있다. 용수를 비롯한 중관학파의 주장대로, 양자가 ‘불일불이’의 관계에 있다면 그것은 양자가 모두 무자성無自性·공空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종자도 이와 같은 인과관계에 의해 찰나찰나 생하고 멸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이어져 간다. 이 과정을 유식은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 즉 ‘종자가 종자를 생한다.’라고 표현한다. A라는 종자가 변함없이 계속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A1 → A2 → A3…’와 같은 식으로 상속되는 것이다. A1이 멸하는 순간 A1을 원인으로 해서 A2가 생한다. A1과 A2는 A라는 성질은 변함없지만 서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A2와 A3을 비롯한 나머지 인접 항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만약 A라는 종자가 A종자로서 변함없이 지속된다면 그것은 ‘아뜨만(ātman, 我)’이요, ‘자성自性’에 해당된다. 무아無我와 무자성無自性을 표방하는 불교의 기본에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아뢰야식은 윤회의 주체이다. 그 때문인지 아뢰야식을 영혼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 오해도 종자의 상속 방식을 이해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이생의 나의 영혼과 다음 생의 나의 영혼이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풀벌레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갔어도 같은 풀벌레이듯이 영혼도 그러하다고 믿는다. 그런 영혼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아뜨만’이요, ‘자성’이다. 
 
아뢰야식은 이러한 영혼이 아니다. 아뢰야식 또한 종자와 마찬가지로 같은 성격을 유지한 채 찰나찰나 생멸을 반복하면서 상속되어 가기 때문이다. 아뜨만이 아닌 아뢰야식을 아뜨만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 
 
③ 종자는 여러 조건(衆緣)이 갖추어졌을 때만 선악의 성질이 동일한 신체적 행동·말·생각이나 과보로 나타난다 -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
 
악행이 남긴 종자는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새로운 악행이고, 또 하나는 악행으로 인한 괴로운 과보이다. 마찬가지로 선행이 남긴 종자는 새로운 선행을 낳고 좋은 과보를 가져온다. 이와 같이 우리의 모든 행위와 과보는 전부 과거에 심어 놓은 종자에서 나온다. 이것을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 즉 ‘종자가 현행을 생한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종자는 아무 때나 행위나 과보로 나오지 않는다. 봄이 와야 꽃이 피고 시어머니가 사돈의 흉을 보아야 며느리 입에서 욕이 새어 나오듯이, 나타날 수 있는 여러 조건들이 갖추어졌을 때 종자는 행위나 과보로 나온다. 이때의 여러 조건들을 ‘중연衆緣’이라 한다. 
 
④ 종자에서 신체적 행동·말·생각이 생하는 순간 그것과 선악의 성질이 같은 새로운 종자가 하나 더 심어진다 -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이 있다. 바늘을 훔치는 행위는 과거에 심어 놓은 악종자가 바늘을 훔칠 만한 중연을 만나 일어난 행위이다. 바늘을 훔치는 순간 새로운 악종자가 하나 더 추가되었고, 이렇게 악종자는 세력이 커짐으로써 소를 훔칠 만한 중연을 만나면 소를 훔치는 행위로도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소를 훔치는 순간 세기가 그만큼인 악종자가 또 하나 더 심어진다. 
 
이와 같이 종자에서 선·악·무기의 행위가 나올 때 그 행위는 같은 성질이면서 같은 세기의 새로운 종자를 아뢰야식에 하나 더 심는다. 하지만 좋거나 괴로운 과보가 종자에서 생했을 때 그 과보는 새로운 종자를 더 이상 심지 않는다. 과보로서 얻는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심정은 1회로서 끝날 뿐 동일한 느낌이나 심정을 또 경험할 수 있는 종자를 심지는 않는 것이다.
 
여기 ④ 번의 현행훈종자는 앞의 ① 번의 그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식으로 ‘① 현행훈종자 → ② 종자생종자 → ③ 종자생현행’의 세트가 순환적으로 반복됨으로써 개개인의 세계가 형성되고 일체가 생겨난다는 것이 아뢰야식 연기설이다.                                                                              
 
 
김사업
오곡도 수련원 부원장.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ㆍ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불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유식설에서의 연기 해석」, 「선과 위빠사나의 수행법 비교」 등이 있다. 김사업 부원장은 장휘옥 원장과 함께 전문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대학 강단을 떠나 남해안의 오곡도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했으며, 2003년부터는 간화선 수행에만 전념하여 일본 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 지도로 900여 회에 이르는 독참을 통해 피나는 선문답을 나누며 수행해 왔다.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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