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구병의 평화모니] ‘없는 놈’이 되는 공부

2016-09-07     윤구병

 
마음 하나 잘 먹으면 개돼지가 부처가 되기도 하고, 마음 한 번 잘 못 쓰면 부처가 개돼지 되기도 한다. 마음으로 곱씹고, 마음에 담아둔 것은 밖으로 드러내도 속으로 감추어도 맛으로 치면 한 맛이다. 원효가 말한 한 마음, 한 맛(一心一味)이다. 몰록 깨치고(돈오), 후딱 닦음(돈수)도 마음이 서둘러서 하는 짓이고, 차츰 깨닫고(점오), 찬찬이 닦음(점수)도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말머리(화두)를 드는 놈도 마음이고, 입 다물고 들여다보는 것(묵조)도 마음이다. 마음자리가 어떤지, 그놈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는 저마다 다르다. 석가 마음 다르고 달마 마음 다르고 사복과 원효의 마음 다르다. 말도 다르고 뜻도 다르고 먹고 씀도 다르다. 그러니 중놈 셋이 한자리에 모여 ‘기동’(旗動-깃발이 움직인다), ‘풍동’(風動-바람이 움직인다), ‘심동’(心動-마음이 움직인다) 떠들어댄 것을 귀동냥 삼아 듣고 이뭣고(시심마) 하고 파고들어도, 그것을 말머리로 붙들고 늘어져도 공부 물 건너간다. 우리 마음이 입을 거쳐 밖으로 드러날 때는 부처(석가)나 육조(혜능)가 제 나라 말로 내뱉은 말과 생판 다른 소리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마음의 창이라고 부르는 우리네 눈이 보는 깃발은 움직이지 않는다. ‘나부낀다.’ 바람도 움직이지 않는다. ‘분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가끔 동動하기는 하지만 어쩌다 그럴 뿐이고, 그 움직임은 깃발이나 바람의 움직임과는 생판 다르다. 굳이 깃발이나 바람 비슷하게 움직인다고 끌어다 붙일 때 그냥 ‘흔들린다.’고 한다. 중국말 ‘동’은 쓰임새가 여럿이어서 여기에 갖다 붙여도 저기에 갖다 붙여도 그때마다 글자는 하나이되 뜻과 느낌이 달라진다. 그러니까 동이라는 말은 그때그때 나부낀다, 분다, 흔들리다는 뜻으로 바뀐다. 마음 심心 자도 마찬가지다. 원효가 ‘일심一心’, ‘일념一念’이라고 한 말을 한자漢字에만 매달려 들여다보면 그것을 말로 파고들든(간화), 입 닥치고 들여다보든(묵조) 거기서 거기고 도긴개긴이다.
 
         우리 말 마음(心, 念)이 어떻게 쓰이는지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이 자리에 옮겨보기로 하자. 
 
마음을 쓴다. 마음이 쓰인다. 마음을 놓는다. 마음이 놓인다. 마음이 들뜬다. 마음이 갈앉는다. 마음이 내킨다. 마음이 안 내킨다.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풀린다. 마음이 좋다. 마음씨가 나쁘다. 마음이 착하다. 마음에 든다. 마음 밖에 난다. 마음을 어루만진다. 마음을 다친다. 마음이 밝아진다. 어두워진다. (할) 마음이 있다, 없다. 마음이 떠난다. 마음이 돌아선다. (할) 마음이 솟구친다, 사라진다. 마음이 곱다. 마음이 꼬부라졌다, 뒤틀린다. 마음 차려라. 마음이 어지럽다. 마음이 흩어진다. 마음 모아 한 마음으로. 마음이 바뀐다. 마음이 움츠러든다. 마음껏. 마음 가는 대로. 마음이 상한다. 마음에 걸린다. 마음이 차가워진다, 따뜻해진다. 마음에 가깝다. 마음에서 멀어진다. 마음에서 지운다. 마음에 둔다. 마음이 넓다, 길다. 마음이 좁쌀 같다. 마음이 모질다, 여리다. 내 마음 나도 몰라.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 마음 둘 데가 없다. 마음을 비웠다. 마음이 벅차다. 마음에 구멍이 났다, 구멍이 숭숭 뚫렸다. 마음에 앙금이 생겼다. 마음 한 켠에는. 마음을 낸다. (할) 마음이 난다, 생긴다. 마음을 억누른다. 마음이 찢어진다. 마음이 고달프다. 마음이 꼬였다, 틀어졌다. 몸 따로 마음 따로. 마음에 걸린다. 마음을 쏟는다. 마음 붙인다. 마음속에 담아둔다. 마음을 드러낸다. 마음에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마음이 거칠어진다, 단단해진다. 마음이 푸근하다, 메말랐다. 마음이 마음 같지 않다. 어제 마음 다르고 오늘 마음 다르다.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그렇다. 마음의 갈피를 잡는 것이 마음 닦음이고 마음 공부다. 마음의 갈피를 ‘알음알이’로 보고, 어떤 마음을 밑으로 내려놓기도 하고, 어떤 마음은 위로 올려놓기도 하고, 어떤 마음은 옆자리에 나란히 늘어놓기도 하고, 흩어진 마음을 묶기도 하고, 엉킨 마음을 풀기도 하고…. 어수선한 마음을 추스르는 일을 꼼꼼히 챙기는 것을 ‘유식론’이라고도 하고, 6식, 7식, 8식, 9식으로 사다리 오르기 놀이에 넋을 잃기도 한다.
 
마음이 바쁘니, 참선하는 사람들이 깨우침에 가장 큰 도움을 준다고 너도 나도 붙들고 늘어지는 ‘무자화두無字話頭’에 대해서 수박 겉핥기로 몇 마디 하자. ‘무’가 반찬거리인 배추처럼 생겼으면 너도 나도 한눈에 보고 알 수 있으련만 아쉽게도 이 놈은 크기도 없고 꼴도 없고, 어떤 모습도 갖추지 않았다. ‘없는 것’이기도 하고, ‘무엇이 아닌 것’이기도 하다. ‘무’가, ‘없는 것’이 정말 없는가, 마음에도 없고 온뉘(우주) 구석구석 뒤져도 없는가. 아예 없으면, 그걸 붙들고 늘어져 보아야 깜깜이 놀이일 터이니, 밤낮 없이 붙들고 늘어져 봐야 말짱 헛것일 터.
 
그런데 ‘없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붙들고 늘어질 수도 있는 거지. ‘없는 것이 없다’(무무)는 말은 뒤집기 한판으로 ‘다 있다’는 말로 둔갑한다. ‘없는 것’이 머릿속을 헤집고, 입 밖으로 내뱉어지면 그에 덩달아 마치 놀부가 톱질한 박에서 온갖 빛, 소리, 냄새, 맛, 살갗에 달라붙고 머릿속에서 움돋는 것들이 꾸역꾸역 몰려나오고 삐져나오듯이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우고 마음속에 가득히 펼쳐진다. 앞뒤 다투어 나타나고 여기저기서 고개를 디민다.
 
‘없는 것’을 바로 보아라.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을 버러지 눈으로 보지 말고 카메라 렌즈로 보지 말고 사람 눈으로, 있는 그대로, 더도 덜도 말고 눈앞에 펼쳐지는 대로 보아라. 사람 사는 세상에서 있는 것들이 어떻게 살고, 없는 것들이 어떻게 죽어 가는지 똑바로 보아라(정견). 없는 것이 있다. 빠진 것이 있다. 먹어야 사는데, 입어야 하는데, 잠자리가 있어야 하는데 없다. 그러면 채워야지. 있게 만들어야지. 왜냐하면 ‘있을 것’인데, 있어야 마땅한 것인데, 없으면 살아갈 수도 살아남을 수도 없는데, 누군가 가로채서 한 곳에 쌓아 놓고 헐벗게 하고 주리게 하고 뜬눈으로 새게 한다면, 그거 바로잡아야지(정행).
 
없는 것이 있는 한 켠에는 반드시 없을 것, 없어야 하는 것, 남아도는 것, 군더더기, 쓰레기더미가 쌓여 있기 마련이다. 있을 것이 없고, 없을 것이 있는 세상은 나쁜 세상이다. 불국토가 아니다. 아수라장이다. 마음 공부는 이런 세상을 바로잡아 ‘있을 것만 있고, 없을 것은 없는 세상’, 미륵세상으로 바꾸자는 뜻에서 하는 게 아니던가.
 
아내인 메리 램과 함께 『셰익스피어 이야기』를 아이들 눈에 맞추어 쓴 찰스 램은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인종만 있다고 쓴 적이 있다. ‘있는 놈’과 ‘없는 놈’. 그 밖의 여러 살갗 가름과 인종주의는 겉보기일 뿐이고, 진짜 무서운 인종주의는 있는 놈이 없는 놈을 없인여김하는 데서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 벽을 바라보고 또아리를 틀고 있는 무자화두를 든 납자들이여, 그대들 뜻 갸륵하다. 그 화두 정말 잘 들었다. 끝까지 밀어붙여라. 있는 놈이 왜 있는 놈인지, 어떻게 있는 놈이 되었는지, 그놈이 쌓아두고, 가로채고, 숨겨둔 그 많은 것들 가운데 없어도 되는 것, 없애야 하는 것, 없을 것이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없는 놈이 왜 없는 놈인지, 무엇이 없는지, 빠져 있는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무’자를 ‘없는 놈’으로 여기고 가슴에서 불길이 치솟아 온 세상 쓰레기들을 죄다 불사를 힘이 생길 때까지 용맹정진하라.
 
부처 만나면 부처 패죽이고, 조사 만나면 조사 때려죽이라는 말 거저 나온 게 아니다. 부처 한 마리 세상에 얼굴 디밀면 그 부처 그늘에서 그 썩은 얼과 넋을 팔아 거룩한 얼굴 꾸미고 뭇산이들 얼빠지고 넋 나가게 만들어 있는 놈으로 둔갑하는 무리들이 떼지어 나타나고, 조사 한 녀석 어느 문중에 자리 잡으면 그 허수아비 내세우고, 그 밑에서 구더기 끓듯이 짓지 않고 놀고먹는 건달들이 무리를 짓기 때문이다.
 
머리 깎은 사람들은 헐벗고 굶주리는 없인여김받는 없는 사람들 쪽에 서서, 빌어먹으면서 이 집 저 집, 윗마을 아랫마을 떠도는 것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주머니가 비지 않으면 마음도 비지 않는다.
 
더는 빼앗길 것 없는 사람들이, 얻을 것만 있는 막바지에서 성큼 돌아설 때 그 곁에 있지 않는 부처, 조사 어디에 쓰랴. 때가 가까워지고 있다. 무! 나 아무것도 지닌 것 없어. 나 없는 놈이야. 그 소리, 중이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어.                                                                                        
 
 
윤구병
서울대학교 철학과와 대학원을 나오고 월간 「뿌리깊은나무」 편집장을 거쳐 충북대학교에서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 1995년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전북 부안으로 낙향, 농사를 지으면서 대안교육을 하는 ‘변산교육공동체’를 설립해 20여 가구가 함께 생활하고 있으며, 어린이 전문 출판사인 보리출판사를 설립해 많은 어린이 책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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