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정신치료]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 1

2016-09-07     전현수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

오늘은 제가 나름대로 세워본 불교정신치료의 체계에서 두 번째 원리인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원리는 괴로움을 줄이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이 제멋대로 끼어듭니다. 예를 들면 ‘희망’ 등 이런 것들이 끼어들면서 그것대로 안 될 때 재수가 없다,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등의 여러 가지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를 정확히 알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전혀 원망이 없습니다. 요즘 음모론이 많지 않습니까? 제가 볼 때는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를 모르니까 그 모르는 틈을 타고 그런 것들이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저는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를 처음 들었을 때 ‘아, 불교가 진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확 열리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저의 생활에 이렇게 적용을 했죠. 나한테 뭔가 괴로움이 오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맞지 않는 뭔가를 내가 바라는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내가 옳든 그르든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나.’ 하는 것을 보고 그것에 부합하려고 노력을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이 원리를 저한테 적용하니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교라는 게 내 생활에 바로 영향을 줄 수 있는 거구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구나, 정말 대단한 진리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것을 계속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정신적인 문제를 가진 환자들이 이해하고 자기 생활에 적용해서 실천한다면 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본질적으로 살아가는 게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하나인데 무수하게 많은 다른 존재가 있고, 또 자연의 영향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덜 괴롭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무엇으로 구성돼 있고, 또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를 봐야 합니다. 그래서 그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그 원리에 맞지 않게 살게 되면 괴로움뿐입니다. 나와 세상이 충돌하면 괴로움이 있어요.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를 알려면, 먼저 세상이 무엇으로 구성돼 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무엇이 존재하고, 그것은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 봐야 합니다. 세상에는 많은 것들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을 속성에 따라서 나누면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생명 없는 것과 생명 있는 존재로 나눌 수 있습니다.

생명 없는 것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고, 눈에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하지만, 자연법칙 또는 물리법칙에 따라 움직입니다. 주어진 조건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에 비해서 생명 있는 존재는 생명 활동을 하고 반응합니다. 자기한테 뭐가 닥치면 반응하는 속성이 있어요. 그런데 생명 있는 존재는 종류가 굉장히 많죠. 이것을 또 속성에 따라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존재들의 공통의 속성은 자기 자신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와 남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누면 생명 있는 존재는 나 아니면 남에 모두 다 들어갑니다.

그래서 세상은 굉장히 복잡한 거 같아도 하나도 안 복잡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가 생명 없는 것과 생명이 있는 남에 의해서 둘러싸여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나’입니다. 저를 중심으로 하면 제가 가장 소중해요. 여러분들은 제 주위를 위성처럼 돌고 있는 존재입니다. 여기에 있는 아메바가 ‘나’가 되면 우리는 이 주위를 도는 위성에 불과하지요. 그러니까 세상에는 무수한 중심들이 있겠죠. 우리는 자꾸 내가 최고다 생각하는데, 내가 중심일 때만 내가 최곱니다. 그렇지만 그 중심이 다른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이 최고입니다. 그걸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나와 이 생명 없는 것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겠습니다. 생명 없는 것은 나에게 영향을 주고, 그 영향에 반응하여 내가 생명 없는 것에게 뭔가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이 상호작용에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가장 기본적인 게 숨 쉬는 겁니다. 내 주변에 있는 무엇인가를 안으로 훅 빨아들이고, 내 안에서 뭔가 생명 활동을 한 후 밖으로 내보냅니다. 이게 나와 생명 없는 것 사이에 일어나는 기본적인 상호작용입니다. 나와 남 사이에도 상호작용이 있습니다. 내가 남에게 뭔가를 하고 그것에 대해서 반응해서 남이 나에게 뭔가를 합니다. 이런 상호작용은 엄마와 아기 사이에도 나타납니다. 아기가 배가 고파 울면 엄마는 젖을 주는 것입니다.

나와 생명 없는 것 사이에 그리고 나와 남 사이에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있습니다. 이게 없으면 죽습니다. 숨을 안 쉬면 죽고, 또 엄마 젖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죽지 않기 위해서 계속 상호작용하는 겁니다. 그걸 게을리하게 되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죽지 않고, 괴롭지 않기 위해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합니다. 우리는 혼자서 자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말하자면 남과 생명 없는 것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동반자예요. 같이 가야 합니다.

나와 생명이 없는 것 사이의 상호작용은 자연법칙이나 물리법칙에 따라 일어납니다. 이 자연법칙이 엄청난 지혜입니다. 지금은 자연법칙이 상식이지만, 자연법칙이 세상에 처음 밝혀지면서 엄청난 변화들이 왔습니다. 자연법칙을 모를 때는, 인간이 무지하다 보니까, 인간보다 강한 생명 없는 것들에 ‘정신’이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자연신이 생긴 겁니다. 그런데 자연법칙이 밝혀지면서 이게 없어졌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자연신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끼어들 틈이 없어요. 이제 남은 건 인격신입니다. 인격신이 지금은 있습니다. 인격신이 왜 있냐면,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를 잘 알고,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죽는지 그걸 잘 알게 되면 인격신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이 생명 있는 것들 사이에 상호작용이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를 보겠습니다. 일단 나와 남 사이에 어떤 상호작용이 어떤 원리로 일어나는지 관찰해봅니다. 내가 남을 향해서 뭔가를 합니다. 왜 하겠습니까? 죽지 않고, 괴롭지 않기 위해서 합니다. 내가 남을 향해서 하는 행동을 보면 나를 위해서 합니다. 이것은 불변의 출발점입니다. 이 상호작용에는 두 가지 행동이 있습니다. 첫째는 남이 나의 행동을 보고 남이 ‘좋다’고 판단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내가 나를 위해서 뭔가를 했는데, 남이 ‘싫다’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이 둘밖에 없습니다.

남이 나의 행동을 보고 남이 ‘좋다’고 판단하는 행동은 순조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나에게 뭔가 순조로운 것이 옵니다. 반면에 내가 나를 위해서 뭔가를 했는데, 남이 ‘싫다’ 하는 행동은 어떤 저항을 불러옵니다. 이것이 생명 있는 것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법칙입니다. 여기에서 나도 좋고 남도 좋은 걸 ‘선善’이라고 하고, 나는 좋지만 남이 싫어하는 것을 ‘악惡’이라고 부릅니다. 선악善惡에 대한 정의는 많지만 본질적으로 볼 때 이렇게 봐도 무리가 없습니다. 선과 악에는 스펙트럼이 있습니다. 작은 선에서 아주 큰 선까지. 악도 마찬가지지요.

순조롭다는 것은 ‘낙樂’이라고 보면 됩니다. 결과는 ‘과果’죠. 그래서 선인낙과 악인고과善人樂果 惡人苦果가 됩니다. 생명 있는 것이 이루고 사는 것을 사회라고 한다면 이것을 우리는 사회법칙이라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윤리적인 성격을 띠니까 윤리법칙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당위적으로 그래야 된다는 게 아니라, 이 법칙이 윤리적인 성격을 자연적으로 띤다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모든 것은 법대로 돌아갑니다. 법칙대로 다 돌아가요. 우리가 이것을 못 보기 때문에, 무지하기 때문에, 그 다음의 프로세스가 일어나는 겁니다. 무지를 바탕으로 욕심이 일어납니다. 욕심은 세상의 이치를 근거로 해서 낸 게 아니라, 무지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욕심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아, 내가 세상에 맞지 않는 뭘 바랬구나.’ 하고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를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보통은 그렇게 안 합니다. 화를 내요. 화를 팍 내면서,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요. 화를 내면서 또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새로운 시도가 새로운 무지가 됩니다. 이렇게 탐진치貪瞋癡가 뱅뱅 도는 겁니다.

이제 선인낙과 악인고과 이것을 좀 더 실감나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한 개인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잠깐이라도 만났던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요? 매우 많을 겁니다. 얼굴 보면 금방 아는 사람들도 있고, 나이가 들어서 얼굴은 잊었지만, 기억을 더듬어서 말하면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마음속에 ‘내’가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어떤 ‘내’가 있냐면, 그 사람들이 판단한 ‘내’가 있습니다.

그 ‘내’가 사람들 마음속에 좋게 들어 있으면 나한테 좋게 와요. 나쁘게 들어 있으면 나쁘게 옵니다. 항상 우리는 우리가 남 속에 어떻게 들어가 있는가, 이것을 보셔야 됩니다. 다른 사람 마음속에 좋게 들어가 있으면 어디 가도 안전합니다. 그런데 나쁘게 들어가 있으면 저는 그걸 지뢰밭이라고 그래요. 확 터지는 거예요. 실제로 그렇지요.

생명 없는 것을 만날 때는, 항상 자연법칙을 보면서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오지 않도록 하는 게 좋아요. 또 내가 생명 있는 존재를 앞에 두고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나도 좋고 그 존재도 좋은 것이 무엇인지 자꾸 찾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부부夫婦라면 남편도 좋고 아내도 좋은 게 무엇인가, 아들이나 딸이 있다면 나도 좋고 아들과 딸도 좋은 게 무엇인지, 이것을 언제 어디서든 찾아야 합니다.

언젠가부터 우리들은 나 좋으면 남이 안 좋고, 남이 좋으면 내가 좋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나도 좋고 상대방도 좋은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을 찾을 때 내가 좋아하는 것은 이미 알지 않습니까? 이제부터는 ‘정말 상대방이 뭐를 좋아하나?’ 이걸 찾아야 합니다. 서로 좋아하는 것이 부딪힐 때는 연구가 필요합니다. 나에게는 내가 가장 소중한 존재고, 저 사람한테는 저 사람이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때는 ‘원하는 것이 서로 충돌할 때 그것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 하고 고민하는 마음의 전환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남의 마음을 정확하게 보는 겁니다. 우리는 타심통他心通이 없기 때문에 오랜 기간에 걸쳐서 상대방의 마음에 가까이 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근접해지는 노력을 하는 겁니다. 나에게 좀 껄끄러운 사람이 있으면, 그때 조용히 나만의 시간을 내세요. 그리고 내가 보았던 그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가만히 보도록 하세요. 그러면 내 속에서 어떤 감정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럼 그 감정에 빠져들지 말고 멈추세요. 또 어떤 생각이 일어날 때 그 생각을 멈추고 그 사람을 계속 보세요. 내 속에 어떤 반응이나 판단이 일어나면 무조건 멈춥니다. 오로지 그 사람을 보는 노력을 계속 하게 되면 내가 그 사람에게 좀 근접해집니다.

우리가 남을 보는 데 가장 큰 장애는 ‘나’입니다. 우리는 오랜 습성상 내 생각으로 남을 판단해왔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 마음속에, 추측이 아니라, 뭐가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고 노력해보면 ‘아! 다른 사람 마음은 알기 어렵다’ 하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이란 ‘내가 들어가기 어려운 거대한 세계다.’라는 것을 알게 돼요. 섣부르게 판단하는 것을 멈추게 됩니다. 사람을 진실로 유심히 보기 시작하고, 어떻게 보면 좀 겸손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것도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남을 대상으로 할 때는 신중해야 합니다. 남이 대상이 되면 신중해야 합니다. 남이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할 때는 굉장히 신중해야 합니다. 나도 원하는 걸 얻고, 상대방도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같이 공존하도록 해야 합니다. 때문에 남이 정말 뭘 좋아하는지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남이 좋은 것도 그 정도 차이가 많이 납니다.

좋아하는 만큼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런 거 자체가 너무 좀 타산적이지 않나 이렇게 생각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세상의 이치가 그런 겁니다. 내가 남이 싫어하는 것을 할 때도 마찬가집니다. 남이 싫어하는 정도가 커지면 나를 미워하는 게 커집니다.

이제 우리는 남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남에 대해 뭔가 모르고 확실히 파악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좀 짚어볼 문제는, 전에도 제가 이야기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건 당연히 내가 잘 알지만, 그것이 나중에 바뀔 수가 있습니다. 생각이 바뀌면 나중에 그만큼 괴로움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생각을 바꾸지 않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내가 정확하게 본다면 생각은 잘 안 바뀝니다. 그러나 잘못 봤다면 나중에 생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보는 것을 훈련하는 것이 괴로움을 없애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나도 좋고 남도 좋도록 하려면 일시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볼 때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일시적인 것은 나중에 바뀔 수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도움을 줄 때 진정한 용기가 생깁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꿀릴 게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뭘 하는 게 아니니까, 나도 좋고 남도 좋은 겁니다. 남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내가 내 입장만 아니라, 당신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생각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되어야 진정한 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신만을 위해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오로지 공존의 마음만 있는 겁니다. 마음 자체가 이제 바뀐 겁니다. 진정으로 서로 좋은 일을 모색하고 찾아가려는 상태가 됩니다.

 

전현수
1956년 부산에서 태어나 한양대학교 의대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3년 미얀마에서의 위빠사나 수행을 비롯한 수개월의 집중수행을 통해 몸과 마음의 작동 원리를 탐구하고 그 결과를 치료에 적용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생각 사용 설명서』, 『마음 치료 이야기』, 『울고 싶을 때 울어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