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한 마음을 낸다는 것

2016-09-01     김성동

지극한 마음으로 / 온 세계 스승이며 모든 중생 어버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 절하옵니다 / 지극한 마음으로 / 온 세계 항상 계신 거룩하신 부처님께 / 절하옵니다 / 지극한 마음으로 / 온 세계 항상 계신 거룩하신 가르침에 / 절하옵니다

  ●예불문 칠정례의 일부다. 그 첫 구절이 바로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다. 자주 반복해 나오기에 절을 찾는 불자들은 익숙한 단어다. 조계종 표준 우리말 칠정례는 운율을 고려해 “지극한 마음으로”라고 쓰고 있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보살, 아라한, 역대조사, 선지식께 예를 올리는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가 삼보에 예를 올릴 때의 그 마음은 어떤 것일까. 말로 할 수 없지만, ‘지심귀명례’로 말했다. 한국불교에서 오랫동안 전해오던 까닭도 그렇다. ‘지심귀명례’ 외에는 이를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것이다. 지심귀명례는 삼보 전에 귀의하는 불자들의 가장 수승한 마음의 상태를 전해준다. 지극한 마음,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달라이 라마 존자의 일본 법회에서도 이 지극한 마음이 등장한다. 달라이 라마는 『입보리행론』 법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보시를 베풀어서 가난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을 보시바라밀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혜를 바탕으로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극대화되었을 때 그것을 보시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만약 중생을 가난에서 구제하는 것이 보시바라밀이라고 한다면, 아직도 이 세상에는 가난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과거의 부처님들이 어떻게 피안을 건너갔겠어요?” 샨티데바의 입을 빌려 이야기했지만, 보시를 베풀어서 가난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보다,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극대화되었을 때 그것을 보시바라밀이라고 말할 정도다. 지극한 마음을 낸다는 것은 직접적인 보시와 베풂을 넘어설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극한 마음,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극대화되었다고 했을 때, 그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을 것이다. 경전에는 수많은 단어로 이를 드러내고, 마음의 작용을 설명하였지만, 내가 몸으로 읽어내지 않으면 그것은 여전히 관찰자의 시선일 수밖에 없다. 자동차가 세상이고 진리라 생각해보자. 마치 운전하는 사람이 아닌 옆 좌석에 앉은 사람과 같다. 자동차는 움직이지만 내가 운전하지 않는다. 운전석에서 보는 길과 풍경은 옆 좌석에서 보는 것과 전혀 다르다. 지극한 마음을 갖는 자는 세상과 진리를 직접 운전하려고 한다. 아나율이 정진 중에 눈이 멀거나, 혜가가 스스로 팔을 잘라 버린 일, 선재동자의 지극한 물음들, 효봉 스님의 금강산 장좌불와 수행, 근대 선승들의 봉암사 결사 등 불교사의 수많은 수행자들이 세상과 진리 속으로 들어간 동력은 이 지극한 마음일 것이다. 

●경계해야 한다. 지극한 마음이 사라진 곳에 어떤 모습이 남아 있는가. 감추어진 탐욕이다. 외로움과 두려움이다. 탐욕을 감추기 위해 손톱만큼의 보시와 베풂을 행한다. 베푸는 행위에 집착해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애써 웃지만, 속일 수 없다. 가짜다. 세상과 진리와 거리가 떨어질수록 외로울 뿐이다. 남몰래 쌓아온 재물과 권력으로는 탐욕과 두려움과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극한 마음 없이 남을 위해 베푼다는 것은 도리어 자신의 마음을 옥죌 것이다. 지심귀명례하고 있는 자신의 두 손을 볼 일이다. 지극한 마음으로 가는 길, 두려움이 없다. 지극한 마음으로 삼보 전에 절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