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를 생각하며 절하지 말고, 중생을 위하여 행동하세요

달라이 라마 일본 법회 법문

2016-09-01     불광출판사

한국의 불자들이 달라이 라마를 만나는 방법 중 하나는 달라이 라마께서 일본을 방문할 때입니다. 달라이 라마가 한국은 오지 못하지만, 일본은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5월 10일부터 13일까지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달라이 라마 성하 일본법회’에서 달라이 라마 존자가 법문한 『입보살행론(입보리행론)』 내용의 일부를 요약해 소개합니다. 달라이 라마는 이타의 정신을 증장시켜, 자기 자신도 타인도 행복해질 수 있는 보살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불자의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인도, 티베트에서는 오래 전부터 친숙한 인도의 불교학자 샨티데바(7세기~8세기경)의 『입보살행론』은 시적 서정성이 넘치며, 대승불교문학의 걸작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편집자 주. 


『입보살행론』의 「불방일품」에서 중요한 부분은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발심을 한 후, 언제나 정념正念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념을 일으키고 정지正知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잘 관찰해야 합니다. 우리 몸에 병이 있거나 아플 때 우리는 음식이나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됩니다. 불방일不放逸해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보리심을 바라고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걸림이 되는 마음이나 행동에 불방일해야 합니다. 보살행에 어긋나는 것들을 막고, 취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지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는지 아닌지 기억하고 살펴보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몸가짐과 마음가짐 모두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초심자는 내가 하고자 하는 부분에서 제대로 기억하는 정념, 즉 방일하지 않음이 언제나 필요합니다. 이러한 것에 습習이 들게 되면 선정을 닦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고, 지관止觀 수행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것을 기억하고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보시를 베풀어서 가난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을 보시바라밀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혜를 바탕으로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극대화되었을 때 그것을 보시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만약 중생을 가난에서 구제하는 것을 보시바라밀이라고 한다면, 아직도 이 세상에는 가난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과거의 부처님들이 어떻게 피안으로 건너갔겠어요? 내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을 모두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지금 현재 나의 마음, 분노의 마음을 해결한다면, 그것만 해결한다면 그 모든 적을 제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마음속 미움을 없애야 합니다. 공空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세상의 대지로부터 내 발을 보호하기 위해 온 세상을 가죽으로 덮을 수 있을까요? 그저 자신 발에 신발 하나 신으면 됩니다. 이처럼 외부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단속하고 보리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이나 혹은 다른 생명에 해를 가하거나 옳지 못한 행동을 하는지 스스로 잘 살펴야 합니다.

정념과 정지를 수행의 스승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음을 지키는 법입니다. 스승에 의지하듯이 정념과 정지에 의지하여 마음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정념과 정지를 갖춘 훌륭한 스승이 있으면 학생들의 학업성취도가 올라갑니다. 스승의 애정과 사랑의 마음은 제자들에게 중요합니다. 스승의 마음이 제자에게 중요한 겁니다. 이처럼 정념과 정지를 스승으로 생각해, 바르게 자기 스스로를 살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잘못된 수행으로 장애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수행을 하므로 스스로 깨달음의 길로 가는 것처럼 보이나, 그 길에서 장애를 만나고, 결국은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잘 살펴야 합니다. 

한번은 인도의 델리에서 회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 회의에서 힌두의 지도자와 함께 자리를 했습니다. 힌두의 지도자께서 앉아 계신 자리는 굉장히 크고 높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자리를 더 높게 하려고 밑에 벽돌을 쌓아 올렸습니다. 그 자리가 마치 큰 폼을 잡아 놓은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장난기가 생겨 ‘혹시나 저 벽돌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습니다. ‘벽돌이 무너지면 힌두의 지도자가 일반 사람들처럼 허둥지둥하겠지.’ 생각하며 즐거웠던 적이 있습니다. 

다른 이야기를 하면 예전에 큰 스승이 있었습니다. 그 스승께서는 특별히 당신을 도와줄 사람을 옆에 두거나 하지 않았고, 당신이 생활하면서 필요한 물건 또한 스스로 가지고 다닙니다. 옷차림 또한 특별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스승께서 어느 날 한 집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 집의 아주머니는 그 스승의 행색만 보고 별 볼일 없는 떠돌이라 생각하며 청소도 시키고 이것저것 시켰습니다. 그 스승은 제자가 많은 큰 스승이었는데, 그 제자 중 한 명이 스승께서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집으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아주머니께 큰 스승께서 여기 계시냐고 물으니 궁색한 노인이 한 명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제자가 그 스승께 인사를 하는 것을 본 아주머니는 자신이 큰 스승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부끄러워 도망을 갔다는 이야깁니다. 

이처럼 우리는 외부의 모습을 보고 판단하고 내부의 모습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제자들도 스승을 볼 때 스승의 자격이 있는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내부의 자질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율장』에서도 스승의 자격요건을 이야기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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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경전에서 10가지로 스승의 조건을 이야기합니다. 스승은 삼학三學을 가지고 있고, 제자보다 나은 지식수행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법을 제대로 알아야 하고 어떤 부분에 대해서도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하는 등 지식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렇듯 여러 자격을 갖춰야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자격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잘 알아보아야 합니다. 중립적이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진실인지 아닌지 살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정념으로 살피고 정지로 점검하여 잘 수행하여야 합니다. 스스로 바른 스승(정념과 정지)을 알아보고, 또 의심하며 그 스승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이 가지고 있는 고통의 뿌리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에서 온다고 합니다. 삼계의 모든 고통은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죠. 청정하지 않는 우리의 육신은 업과 번뇌로 인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친 육신뿐만 아니라 외부 세상 역시 업과 번뇌로 인해 생성된 것입니다. 번뇌라는 것은 의식입니다. 「호계정지품」에서는 정지로서 번뇌와 업으로 물든 의식의 마음을 점검하라 합니다. 

인간사회에서 우리들은 어떤 물질적인 부분들만 추구하고 찾고 있습니다. 오로지 물질적인 것들에 초점 맞춰져 있어 고뇌합니다. 어렸을 적 교육에서부터 생활까지 모두 그렇기에 번뇌가 생길 수밖에 없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번뇌에 의해서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상처를 내고 또 받습니다. 그러한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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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와 의사의 관계에서 환자가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면 의사는 그 환자가 힘들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이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의사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를 아는 이는 화를 내는 사람을 봐도 그들의 고통이 그 화를 만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의사의 비유에서 보듯이 우리는 화를 내고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성과 생각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잘못과 내 자신을 분리하고, 행위와 행위 주체를 구별하여 그 행위를 한 사람에게 자비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정지正知를 통해서 말입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 몸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 대한 집착이 정지의 마음을 가리게 됩니다. 우리의 몸은 번뇌의 근원이고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 빠지게 되는 근본입니다. 우리 몸이 아름답게 보이나요? 우리 몸은 그저 더러움을 쌓는 기계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아주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입에 넣고 몇 번 씹고 다시 꺼내보면 어떨까요? 보기 싫을 겁니다. 또 그걸 먹고 뱃속을 거치면 어떻게 되죠? 이내 우리가 버려야 할 찌꺼기가 되어 나옵니다. 이처럼 우리의 몸을 더러움을 쌓는 기계라고 생각한다면 집착을 줄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아름다워 보이지만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피부, 살, 근육, 뼈, 그 속의 골수까지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 실체는 없습니다. 집착해야 할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몸이 필요한 이유가 뭘까요? 바로 정지正知를 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이성으로 정지의 수행을 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보살행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동물도 몸이 있긴 하지만 인간처럼 이성과 사고, 그리고 지혜의 조화를 통하여 정지의 수행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래 자비의 씨앗이 인간의 몸에 심어져 나타나기에 우리의 몸은 더러움을 쌓는 기계인 동시에 보리심을 구현할 수 있는 귀한 존재입니다. 더러운 기계에 집착하지 말고 보리심을 쌓는 귀한 존재라고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스스로 경계하고 바른 앎을 바탕으로 보살도를 이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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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면서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어렵다고만 생각하면 악조건은 더욱 커집니다. 우리는 그 어려움을 기회로 생각해야 합니다. 어려움을 다양한 각도로 생각해보면 분명히 기회가 되지요. 그래야 마음의 어려움 또한 줄일 수 있습니다. 저는 망명한 사람입니다. 형편없는 상태이지요. 하지만 망명을 통해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고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좋은 말씀을 소개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만약 망명하지 않고 라싸의 포탈라 궁에 갇혀 있었다면 속 좁은 스님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망명을 하고 나서 많은 점에서 행복합니다. 어려움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처럼 좋은 조건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어려움만 계속 생각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기에 누구를 만나든 행복하게 미소 지을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만날 때 항상 아만我慢을 줄이고 남들이 좋아할 만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겸손한 가운데 나에게 정말 이익이 되는 게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항상 그와 같이 행하셨습니다. 의기소침한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주고 남을 격려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타인에게 잘 대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남들을 온전히 자애롭게 바라보며 선업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한 선업은 남이 대신해줄 수 없습니다. 의탁하지 않고 스스로 선업을 쌓아야 합니다. 육바라밀을 점차 증장시키고 작은 이익을 위해 큰 뜻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타인을 위하여 행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선근이 사라지는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뿌리는 화(분노)입니다. 공성(보리심)에 습을 들이게 되면 화가 약화되거나 없어지기도 합니다. 그와 반대로 공성(보리심)을 없애는 가장 큰 업이 화입니다. 「인욕수행품」에서는 인욕忍辱을 통하여 보리심의 공덕을 쌓게 합니다. 자신을 망치는 가장 큰 것이 화와 같은 미움과 분노입니다. 화가 날 때는 마음의 평화가 깨지고, 잠이 들지 못하며 이리저리 뒤척이게 됩니다. 평소 얌전하던 사람도 화가 나면 얼굴이 붉어지고 가만있지 못하게 되죠. 또한 너무 화가 난다면 자기 머리를 때리기도 하고요. 

예전에 라싸에 한 운전사가 있었습니다. 그 운전사는 화를 잘 내고 신경질적이었습니다. 하루는 차 밑에서 차를 고치고 일어나다가 보닛에 머리를 찧었습니다. 그것이 화가 나서는 자신의 머리를 보닛에 한 번 더 찧는 것을 보았습니다. 스스로의 분노가 스스로를 더 좋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화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외부의 적은 나를 해하는 역할도 하지만, 다른 이에게 이로운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나를 골탕 먹이려고 함정을 팠다가 그곳에 내가 아니라 도둑이 잡힐 수도 있죠. 그러나 내부의 적인 화는 오로지 자신을 해칩니다. 뿐만 아니라 남도 해치죠. 그렇기에 화는 폭력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화가 나는 것을 인내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화가 난다 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화가 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이유를 생각하다보면 그 시작은 별것이 아닙니다. 작은 이유를 계속해서 곱씹으며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기에 큰 화가 되는 겁니다. 오롯이 자신의 상태를 바라보고 마음을 잘 다스리면 화가 났다가도 금방 사라질 겁니다. 물론 화를 다스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싸우는 것이지요. 오랜 시간 습을 들여야 하는 과정입니다. 다양한 방편으로 이기심을 줄이고 이타심을 키워야 합니다. 그렇기에 인욕수행이 큰 공덕인 것입니다.

화에 대해서 한 가지 더 말하면, 화는 대부분 우리 외부에서 옵니다. 다른 이(중생)의 번뇌에서 화가 번지는 것이죠. 다른 이의 번뇌가 나의 집착에 화火를 지른 것입니다. 인간세계에 사는 우리에게 이러한 상황은 여지없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원인과 결과로 화가 생겨나고 우리는 인욕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화가 없다면 인욕도 없겠죠. 허나 그것은 인간세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내게 화를 나게 한 적은 인욕수행을 하게 도와준 은인입니다. 우리는 그런 적(중생)에게 고마워해야 합니다. 적을 미워하는 것은 스스로 번뇌에 빠지는 것입니다. 적이 불행해도 나에게 좋은 일은 없습니다. 업의 사슬에 더욱 엮일 뿐이고, 나를 망치는 길입니다. 스스로 집착에 빠져 더욱 화를 키우는 것이죠. 그렇기에 미움의 마음을 내지 말고 차분히 원인을 알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화를 줄이고 인욕의 공덕을 쌓는 것입니다.

방일하지 않게 언제나 정념을 가져야 합니다. 정지의 마음으로 스스로를 다스려야 합니다. 인욕 수행을 통하여 번뇌를 쌓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입보살행론』의 일부에서 보셨다시피 우리의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한 지혜의 마음을 가지고 보시바라밀의 마음을 낼 때 진정으로 중생을 구할 수 있습니다. 

부처를 생각하며 절하지 말고, 중생을 위하여 행동하세요. 중생과 부처는 다르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잘 살피고 보시바라밀의 진정한 마음을 깨달아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원력을 내야 합니다. 중생을 위한 삶이 진정 수행의 기쁨이고 불도를 향한 길임을 아시어 그들이 곧 부처이고 자신임을 아셔야 합니다. 중생을 위한 이타심, 보리심이야 말로 진정 큰 공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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