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정신치료] 불교로 살펴본 몸과 마음 3

2016-09-01     전현수

의지. 이것을 정확히 안다는 게 참 중요합니다. 의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아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또 문제 해결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의지는 불교 용어로 말하면 행行입니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온五蘊의 행은 뭔가 일으키는 것인데, 의지가 바로 이 행이라고 보면 됩니다. 남의 강요에 의하지 않고 내 안에서 어떤 의지가 일어나 행동하는 것을 ‘자유의지’라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부인할 수 없지요. 그런데, 그 ‘자유의지’란 것이 어떤 조건에도 관계없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저는 그런 ‘자유의지’는 없다고 봅니다. 조건을 무시한 ‘자유의지’, 이런 것은 없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불교는 인과의 법칙입니다. 어떤 현상이 있을 때는 반드시 그 조건이 있다는 겁니다. 뭔가 조건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서 어떤 결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저는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조건을 무시한 자유의지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또 선정을 닦은 후 12연기 수행을 해보니까 어떤 정신현상이 일어날 때는 그에 관계된 조건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조건이 하나라도 없으면 정신현상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조건들은 내가 통제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명확히 보고 난 뒤에 “정말 ‘자유의지’가 없구나.” 하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것은 관찰에서 나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관찰하지 않은 입장에서는 이해하기가 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의지를 관찰해보면 의지도 순간적으로 떠오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순간에 의지가 자신의 내부적 상태의 영향을 받아 일어납니다.

여러분들 지금 눈을 감고 의지를 한 번 내보세요. 제가 관찰해보니까 우리 자신이 의지를 낸 것이 아니라 의지가 떠오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디에 강하게 집중하면 의지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의지를 내면서 살아보자.’ 생각하면서 이 의지 내고 저 의지 내려고 해도 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세히 관찰하면 의지가 먼저 탁 떠오르고, 그 다음에 그 의지에 따라 내가 행동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관찰력이 약해서 자신이 의지를 냈다고 착각합니다.

우리는 보통 ‘내가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야 그것을 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거 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어. 하고 싶을 때 해야지’ 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는 ‘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 것도 그럴 만한 조건이 있기 때문에 일어난 겁니다. 그래서 그 조건이 바뀌지 않으면 마음이 안 드는 상황이 계속되고, 점점 더 악화될 수 있습니다. 의지의 속성을 잘 알면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굉장히 수동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보다는 조건을 바꾸는 게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공부가 하기 싫다.’ 그러면,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공부해야지.’ 하기보다는, 조건을 바꾸어 보세요. 만약에 집에서 공부가 안 되면 다른 데 가서 공부하고, 공부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을 찾아보십시오. 조건을 바꾸는 것,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는 정신치료를 하는 입장에서 이런 의지의 속성을 알게 됐을 때 환자 치료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하고 싶은 의지가 있으면 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관찰을 통해서 보니까, 의지도 그냥 떠오르는 것에 불과해요. 나의 의지는 어떤 조건에 따라 떠오른 것이고, 그것이 계속 지속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보통 내가 의지를 내면 그 의지에 따라서 우리는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의지를 일으켜야 하는가에 초점을 많이 둡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의지를 냈다고 하면 안 낸 것보다는 나아요. 그렇지만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의지가 어떤 조건 안에서 일어났고, 그 의지를 계속 이어갈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실제로 어떤 일을 하려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됩니다. 예를 들면 의사는 환자 스스로 그 시스템 구축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환자 스스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도록 가능한 방법을 제시하고, 또 시간이 지나면서 환자 스스로 어느 정도 시스템을 구축했는지 지켜봐야 합니다. 또 의사는 환자가 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환자 스스로 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면 옆에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시스템을 만드는 과정 없이, 그냥 마음 내서 하라고 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환자가 폭식증이 있다면 폭식을 하지 않는, 그런 상태가 될 수 있는 길을 환자에게 제시해야 합니다. 그랬을 때 폭식을 고칠 수 있고, 뭔가 효과가 있다는 것을 환자 스스로 알게 해야 합니다.

최근 제가 성 문제가 있는 남자 환자를 치료하고 있습니다. 환자의 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 문제가 일어난 여러 상황에 대해 환자와 충분히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때 의지 부분만 다뤄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아직 결혼을 안 했는데 성욕을 제어할 수 없다면,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자위행위도 하도록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기의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여자를 봐야 한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직접 여성을 보고 자위행위를 한다면 법적인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이런 경우 상황을 설명하면서 성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여러 가지 원인을 다루어야 합니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성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면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요인도 다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쉽게 생각합니다. 자기가 무엇인가 은밀히 하면 사람들이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알 수도 있죠. 예를 들면, 그 환자의 경우 직접 여성을 보고 자위행위를 했는데 아무도 못 본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어떤 사람이 2층에서 빨래를 널다가 그 장면을 보고 신고해서 문제가 되었어요. 성 문제뿐 아니라 어떤 문제라도 그 문제와 관계된 것은 하나하나 정확히 다루어서 그에 대한 대책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드러난 문제와 관계된 것을 충분히 다루고, 그 다루는 가운데 실제로 그 사람에게 어떤 시스템의 변화가 일어나야 됩니다.

저는 요즘은 시스템 변화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우리는 알파고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알파고와는 차원이 다르죠. 그래도 기본적으로 그 순간에는 조건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조건이 끝없이 계속됩니다. 어쨌든 순간적으로는 인과의 법칙을 따르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뭔가 달라지려면 조건을 바꿔야 됩니다. 바로 그 조건 바꾸는 것을 치료자가 도와줘야 합니다. 길을 제시했지만 안 가는 거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가면 훌륭한 치료 효과가 나올 수 있는 길을 우리는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의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게 되면 그 의지에 많이 의존하지 않아도 됩니다. 의지도 하나의 떠오르는 현상일 뿐입니다.

치료실에서 이야기할 땐 환자에게 좋은 의지가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밖에 나가서 다니면 어떤 것이 머리에 떠오를지 모릅니다. 그 사람 머리에 하루 종일 뭐가 떠오르냐, 그게 그 사람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이런 걸 알게 되면 어떤 의지가 있을 때 그걸 실천할 수 있는 조건을 가졌는지 안 가졌는지를 면밀히 봐야 합니다. 환자가 구체적으로 지금 어떤 상태 속에 있나, 순간순간 어떤 것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나, 그래서 어떤 영향을 받고 있나, 또 그 사람이 누구를 만나고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떤 영향들을 받았나, 하는 것을 면밀히 봐야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환자가 원하는 변화가 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은 다릅니다. 이걸 구별해야 됩니다. 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야 됩니다.

보통 “의지나 자유의지, 이것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첫 번째가 “숙명론이냐? 조건에 따라 우린 살아야 되냐?” 하는 것입니다. 조건이 고정된 게 숙명론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것은 조건이 계속 바뀌는 겁니다. 알 수 없을 만큼 그 어떤 원인 - 결과 - 원인 - 결과가 굉장히 복잡하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걸 업業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행동과 결과, 이것을 정확히 알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불교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따르며, 숙명론은 절대로 아닙니다. 숙명론은 하나의 고정된 과거 조건이 계속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때문에 불교는 숙명론이 아니고 인과의 법칙입니다.

이것을 잘 모르니까 “자유의지가 없으면 어떻게 잘 살 수도 없고, 노력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합니다. 역설적이겠지만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에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스님들이 “자! 선한 일을 하세요. 수행 열심히 하세요.”라고 말했는데, 자유의지가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그 말을 할 수 있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자유의지가 있으면 그 말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의지를 내서 착한 일하고 수행 잘하면 되는 거지요. 좋은 의지를 내야 되는데, 그게 안 되기 때문에 스님이 앞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말하는 것이 새로운 조건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잘 아셔야 돼요.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은 어떤 조건이 영향을 주는가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좋은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노력해야 된다는 겁니다.

저는 이 의지에 관해 관찰한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2008년에 제가 주관해 서울 상도선원에서 파욱 사야도와 심리학자, 정신과의사가 만나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제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관찰해본 바에 따르면, 의지 이것도 어떤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 의지를 우리가 마음대로 낼 수 없다면 우리가 우리 삶을 어떻게 잘 살아가게 할 수 있나?” 하고 질문하니까 파욱 사야도가 “부처님 만나는 게 제일 좋다.”고 말씀합니다. 파욱 사야도께서는 불교만 철저히 하신 분이기 때문에 과학적인 설명을 잘 안 하세요. 어쨌든 가장 좋은 조건은 “우리가 부처님 만나는 거예요.”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좋은 의지 내라.” 이런 말씀 안 하세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에게 어떤 정신적, 신체적 현상이 있으면, 그것이 다 있을 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것에서 벗어나려면 벗어날 만한 충분한 조건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저는 몇 년 전 서울대에서 소규모로 열린 ‘자유의지’에 관해서 그간의 연구 업적을 살펴보고 토론하는 데 참석했었습니다. 그때 들어 보니 철학계에서는 본질적으로는 자유의지가 없지만, 자유의지가 없다고 분명히 못 박기에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주장도 꽤 효용성이 있다고 보는 것 같았어요.

불교 경전에 보면 “행은 남으로부터(parato) 온다. 나로부터(attana) 오지 않는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상윳따 니까야』에 있는 「아난다 경」에 나오는데 왕기사라는 비구가 아난다의 시자로 탁발을 나갔다가 여자를 보고 감각적 욕망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 비구는 아난다한테 도움을 요청하면서 거기서 벗어나게 도와 달라 하니까 그때 아난다가 “행을 남이라 보고 괴로움이라고 보고 자아가 아니라고 봐라.”라고 해요. 그 말은 “그런 욕망을 내가 일으킨 것으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자신의 마음을 잘 단속하라는 거예요.

서양에서도 ‘자유의지’에 대해서 논의가 있었어요. 서양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말할 때 항상 언급하는 실험이 벤자민 리베트(Benjamin Libet, 1916-2007)가 1986년에 한 실험입니다. 실험 참가자한테, ‘당신이 뭘 하려고 생각하는 순간에 신호를 보내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표현하면 그 시간을 체크합니다. 그와 동시에 머리에 전극을 붙여서 그것과 관계된 스파크가 일어난 시간을 측정해요. 그 차이가 1초입니다. 결국 먼저 우리 생각 속에서 뭐가 일어나고, 그 다음에 그걸 표현하게 되는 겁니다.

신경생리학자 샘 해리스(Sam Harris)가 2012년에 『free will』 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국내에는 『자유의지는 없다』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는데, 거기서 샘 해리스(Sam Harris)가 어떤 말을 하냐면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 고 말하려면 우리의 사고나 행동을 결정하는 모든 요인을 알아야 되고 그걸 다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관찰해보면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없다는 겁니다. 또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사람을 실험실에 넣고 관찰을 합니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물도 있고, 잡지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 장치를 실험실에 있는 사람에게 해놓으면 그 사람의 뇌에 어떤 활동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물을 마시려고 하면 그것에 해당되는 부위에 활동이 있고, 그것이 감지됩니다. 물론 시간도 알 수 있습니다. 실험자가 앉아서 실험실에 있는 사람의 fMRI 활동을 보면 그 사람이 앞으로 뭘 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물을 먹으려고 한다면 뇌의 어느 부위가 자극되고 그 다음 물을 먹습니다. 우리가 자유의지가 정말 있다면 실험실에 있는 사람이 자기 뇌에서 처음으로 드는 자극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자유의지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뇌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디크 스왑(Dick Swaab)이라는 네덜란드의 세계적인 학자가 뇌 과학에 대해 쓴 책입니다. 이 사람 책에 보면 자유의지는 아름다운 환상이라고 합니다. 자유의지는 없다는 겁니다. 이 책에서 아주 재밌는 게 있는데, 암스테르담의 심리학자 빅토르 라머라는 사람이 “왜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 설명했어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뇌에서 자극이 일어나 먼저 행동을 합니다. 그 후에 그 정보가 대뇌피질로 보내집니다. 바로 그때 그것에 의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자신이 했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자신이 그런 마음을 일으켰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계속)

 

전현수
1956년 부산에서 태어나 한양대학교 의대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3년 미얀마에서의 위빠사나 수행을 비롯한 수개월의 집중수행을 통해 몸과 마음의 작동 원리를 탐구하고 그 결과를 치료에 적용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생각 사용 설명서』, 『마음 치료 이야기』, 『울고 싶을 때 울어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