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인터뷰] ‘붓다 빅 퀘스천 BUDDHA BIG QUESTION’

하룻낮에 다섯 스승을 만나다 - 깨달음의 축제, 지혜의 컨퍼런스

2016-07-13     조혜영

 
 
깨달음의 축제, 지혜의 컨퍼런스 ‘붓다 빅 퀘스천’이 지난 6월 11일(토) 12시부터 17시 40분까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내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3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습니다. 교계에서는 처음으로 다섯 분을 강연자로 해 한 분이 50분 강연과 10분 질의응답으로 진행했습니다. 총 5시간 40분간 이어진 긴 시간이지만, 참석자들이 대부분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함께 했습니다. 그만큼 강연자들의 강연 내용은 차마 자리를 뜰 수 없을 정도로 적지 않은 감동과 영감을 던져주었습니다. 모든 이들이 작은 지혜를 하나씩 가지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현장의 감흥은 그대로 전달할 수 없겠지만 금강 스님, 조성택 교수님, 원영 스님, 전현수 원장님, 미산 스님의 강연 주요 내용을 요약해 싣습니다. 
- 편집자 주. 
 
| 평화롭고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 : 금강 스님(해남 미황사 주지)
반갑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미황사는 달마산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산이 좋아 27년째 살고 있는데요. 제가 좋아하는 그 산에 가끔 안개가 낄 때가 있어요.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에는 안개로 가득 싸여 있어서 산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안개가 끼었다고 해서 산이 없는 건 아니잖아요. 어느 날 또 바람이 불어 안개가 걷히면 있는 산 그대로 다시 드러나죠. 임제 스님의 게송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白雲斷處有靑山백운단처유청산  
흰 구름 걷히니 청산이라네.
 
어제는 해남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 40여 명이 템플스테이를 왔습니다. 그 학생들을 만나보니까 저의 그 시절이 생각났어요. 저는 고등학교 1학년, 17살에 출가를 했어요. 그때 저는 굉장히 방황을 많이 했죠. 늘 자유를 원했어요. 시골을 벗어나고 싶다는 자유, 또 좁은 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자유, 그리고 일상적인 삶으로부터의 자유…. 지금 생각해보니까 일생 동안 저는 참 자유를 원했고 그런 삶을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교무실에 갔는데, 선생님 한 분이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가만히 좌선을 하고 계신 거예요. 처음엔 왜 저러고 계시나 몰랐죠. 네 번쯤 갔더니 선생님이 눈을 뜨고 계시기에 물었어요. 도대체 눈을 감고 뭘 하셨냐고. 그랬더니 참선을 하신다고 그래요. 참선을 배울 수 없겠냐고 물으니 『육조단경』이라는 책을 건네면서 먼저 이 책을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날 저녁에 책을 읽는데 가슴이 막 뛰었어요.
 
應無所住 以生起心응무소주 이생기심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가장 좋았던 대목은 육조 혜능 스님이 『금강경』의 이 구절을 읽고 마음이 열렸다는 내용이었어요. 그 부분에서 자유로움을 느꼈어요. 우리는 무슨 일을 하고 ‘내가 했다’고 생각을 하죠. 그러다 보면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나는 이만큼 해줬는데 상대방이 기대만큼 못 해주면 실망하고 후회하죠.
 
『육조단경』을 자세히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 먼저 무념無念은 ‘우리의 본래 마음에는 원래 번뇌와 망상이 없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질 때마다 그것과 연관된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차별작용을 하죠. 또 좋아하는 것에 대해 욕심을 부립니다. 뇌 과학자들이 말하길, 일반적인 사람이 하루 동안 4만7천 가지의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육조단경』에는 무념, 즉 번뇌와 망상이 없다고 했어요. 바로 번뇌가 일어나기 전의 마음이 있다는 것이죠. 바로 이 무념한 마음이 지극히 평화로운 마음입니다. 우리는 평화로운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말투와 행동이라든지 아니면 학벌이나 재산, 나의 공간을 갖는 것 등으로 무기를 개발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을 잃게 되고 방어기제만 발달하게 됩니다. 자신이 평화로운 마음의 주인이 되어서 언제 어디서나 그 마음을 잘 쓸 수 있어야 합니다.
 
무상無相은 ‘고정된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육조단경』에 적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볼 때 과거의 경험과 지식에 의해 판단합니다. 현재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또 다른 상相을 만들어서 보는 거예요. 그것은 자신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자신감이 없어서 과거의 지식과 경험으로 현재를 파악하려고 하는 거죠. 그렇게 되면 현재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가령 마당에 큰 소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여기 계신 분들이 그 소나무를 본다면 똑같이 볼까요? 다 다르게 보겠죠. 자기가 경험한 대로만 보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수많은 가능성은 보지 못하고 나의 관점만 고집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이것은 비단 소나무만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 좋았던 모습, 내가 기대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상相을 만들어 대입시키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깜깜한 하늘에서 해가 떠오르면 환해지고, 오늘 새로운 하루를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하고 벅찬 일인지 모릅니다. 사과 한 쪽을 먹어도 정말 신기하고 고마운 일이죠. 아침에 먹는 사과를 과거에 먹었던 사과와 비교하며 먹는다면 맛이 있겠어요? 맛이 없겠죠. 추운 겨울을 잘 견뎌내고 온 정성을 들여야 사과 꽃이 핍니다. 겨우 열매를 맺어도 태풍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내 앞에 오게 되는 이 사과 하나가 얼마나 귀한 사과인지 몰라요. 그 사과를 볼 때는 과거와 현재의 연기적 관계성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지혜에요. 그렇게 신비하게 사과 한 쪽을 먹었을 때는 정말 맛있어요. 그때 과거에 먹었던 사과를 떠올리면 행복이 사라집니다. 그게 바로 상相이에요. 우리는 비교하는 상相 때문에 행복보다 불행을 더 많이 느낍니다. 『육조단경』에서 말하는 무상無相은 바로 상相이 일어나기 이전, 모든 순간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지극히 행복한 마음입니다. 
 
무주無住는 ‘머무름이 없는 마음’을 말합니다. ‘내가 했다’고 하는 마음이 없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모든 순간에 머물러 있으면 집착하게 되고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숭산 스님께서는 ‘오직 할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빈 그릇이 쓸모가 있어요. 가득 채워 놓고 담으려고 하면 담을 수가 없습니다. 머무르지 않는 마음이 바로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소요 스님(1562~1649)의 시를 한 편 소개해드리겠습니다.
 
箇箇面前明月白개개면전명월백  
개개의 얼굴이 밝은 달처럼 환하고
人人脚下淸風吹인인각하청풍취  
사람마다 발아래 맑은 바람 불고 있네. 
打破鏡來無影跡타파경래무영적  
거울마저 깨뜨리니 흔적조차 없구나. 
一聲啼鳥上花枝일성제조상화지  
새 한 울음에 가지 위에 꽃이 피네. 
 
수행을 하다 무아無我를 체득하면 연기적 관계성을 알게 되고, 연기적 관계성으로 바라보는 것이 바로 중도이자 지혜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 사람마다 단점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환하고 밝은 달처럼 그 사람의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 사람마다 꽃이 피게 할 수 있겠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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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이 진리가 아니라 진리가 신이다. : 조성택 교수(고려대 철학과)
이곳에 오면서 ‘붓다 빅 퀘스천’이 무슨 뜻인지 생각을 많이 해봤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붓다 빅 퀘스천’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라는 큰 질문, ‘부처란 누구인가, 깨달음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일 것입니다. 부처님을 이해하는 5가지 키워드가 있습니다. H.Y.I.H.T입니다.
 
먼저 부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시대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부처님이 태어날 당시(B.C. 5~6세기)의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가, 또 하나는 그때 인도는 어떤 상황에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당시는 공자, 노자, 예수 등 여러 선지자들이 태어난, 인류의 지적 지식이 폭발한 ‘인류의 축의 시대’입니다. 그 시기의 정점에 부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부처님 당시 인도 사회가 가난했을 거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 시대는 철기가 농기구로 사용되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였습니다. 인간의 지식이 정점에 이르고 경제적으로 활발한 시대였음을 염두에 두고 부처님이 어떤 분이었는가 하는 첫 번째 키워드가 바로 휴머니스트Humanist, 인문주의자, 인본주의자입니다. 신의 질서가 아니라 인간의 질서에 관심을 가졌던 서양 르네상스 시대의 사상가들보다 부처님이 2천년 앞선 인문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은 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행위가 나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생명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을 최초로 말씀하신 분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두 번째, 부처님은 젊은(Young) 분입니다. 부처님이 출가하셨을 때가 29세, 성도하셨을 때가 35세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들도 대부분 2,30대였습니다. 이 젊은이들이 세상을 바꿔 놓았습니다. 부처님의 상호가 동아시아 지역으로 넘어오면서 5,60대의 나이든 얼굴로 바뀐 것은 문화적인 변용의 과정이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젊은 지혜’라고 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이제 우리 심상에 있는 부처님을 더욱더 젊게 바꾸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삶을 보면 늘 움직이며 다니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처님을 늘 앉혀 놓고 있어요. 부처님은 젊은 행동가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을 이해하는 두 번째 키워드입니다.
 
세 번째, 부처님은 이노베이터Innovator, 혁신주의자입니다. 새롭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 당시 출가자들은 명상수행 혹은 고행을 선택했습니다. 부처님도 출가 후 인간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의 명상을 체득하셨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명상에서 깨어나면 여전히 고통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처님은 고행의 길을 다시 선택해 고행의 극점까지 갔습니다. 부처님이 가장 위대했던 순간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가 아니라 고행을 그만두셨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고행을 그만두었을 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길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의 여러 향로를 선택할 때 늘 거기에는 기존에 그 길을 걸어갔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베다전통과 왕족의 길을 거부하고 사문의 길을 갔습니다. 사문의 길 가운데 두 가지 길인 명상과 고행을 모두 그만두었습니다. 이제 그 앞에 길은 없었습니다. 그 길이 없는 길임을 알고 그만 두십니다. 그것은 용기일 뿐만 아니라 고행의 극점까지 가본 사람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왔던 길을 미련하게 가는 이유는 인내심이 강해서가 아니라 그 길을 끝까지 갔다는 확신이 없어서입니다. 고행의 극점까지, 마지막까지 갔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 길이 잘못됐다고 과감히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을 불교전통에서는 중도라고 하는데, 저는 그것을 ‘없던 길, 제3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번째, 부처님은 홈리스Homeless입니다. 부처님은 거지, 탁발승입니다. 집이 없는 사람이고, 재산이 없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문명은 자아를 찾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문명의 구조와 집을 떠나는 문명의 구조, 이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양의 다른 문명과 달리 부처님은 자아를 찾으러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세기경世紀經』은 가정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개인의 욕망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정착의 문화가 빚어내는 부작용들을 철저히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출가를 제도화하신 겁니다.
 
마지막으로, 부처님은 교사(Teacher)입니다. 부처님은 인류 최초로 종교인으로서 교사로 나선 분입니다. 불교는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대중들에게 아무 차별 없이 알려준 최초의 종교입니다. 부처님은 누구도 차별한 적이 없습니다.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비밀리에 전수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교사의 다른 역할은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제자들과 똑같이 살았습니다. 깨달은 자, 부처님은 매력적인 분이십니다. 요즘 말로 완전체입니다. 
 
깨달음은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답이 없다는 것을, 혹은 모든 것이 다 정답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분이 부처님입니다. 정답을 말하는 순간 우리는 오답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하나의 진리가 아니라 모든 것이 진리임을 말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방황하는 이유는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방황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단 하나 기준이 있다면 나의 행복과 안녕, 나아가 모든 생명의 행복과 안녕입니다. 우리에게 이로운 것은 세계에도 이로워야 합니다. 이 가치관이야말로 출가의 기본 정신이자 출가가 보여주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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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과 제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원영 스님(불교방송 ‘좋은 아침 원영입니다.’ 진행자)
오늘 제가 여러분들과 함께 나눌 이야기는 ‘부처님과 제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입니다. 좀 더 쉽게 전달해드리기 위해 의·식·주로 나누어 준비를 해봤습니다. 
 
첫 번째, 의생활입니다. 부처님은 어떤 옷을 입으셨을까요? 현재 남방불교 국가 스님들의 복장이 가장 유사한 형태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원래 부처님 당시에는 분소의糞掃衣라고 하는 것을 입었습니다. 분소의란 버려진 옷, 시체를 쌌던 천으로 만든 옷을 말하는데요. 왜 그런 옷을 입으셨을까요? 그 당시 스님들은 생산 활동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남이 버린 옷을 가져다 꿰매 입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분소의로 만든 낡고 더러운 가사를 온몸에 칭칭 감은 채 걸식을 온 스님을 보고 임신한 여인이 놀라 유산이 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사람들이 비난을 하자 부처님께서 분소의로 온몸을 칭칭 감지 말며, 옷을 입을 때는 반드시 깨끗하고 단정하게 입도록 하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부처님의 이런 말씀들이 계율이 되고, 그것이 정리된 것이 율장입니다. 제가 오늘 전해드리는 내용들은 율장에 근거를 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분소의로 된 가사는 누가 만들었을까요? 부처님과 제자 아난 존자가 만드셨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과 아난 존자가 길을 가는데 길옆에 정리가 잘 되어 있는 논이 있는 거예요. 그 농지를 보고 부처님께서 “이렇게 단정한 농지가 있구나. 아난아, 이 농지를 보고 옷을 만들면 어떻겠느냐? 네가 한번 구상을 해와 봐라.” 하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난 존자는 농지처럼 천 조각을 이어 붙인 옷을 만들어 부처님께 보여드렸고, 그렇게 해서 가사가 만들어졌습니다. 불교가 점차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해지면서 각국의 고유의상에 가사를 수하는 형태로 변형되어 왔는데요. 보통 가사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있죠. 인도에서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것이 스승에 대한 공경, 존경심을 표현하는 의미라고 합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편단우견偏袒右肩’이 바로 이러한 뜻입니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비구에게는 옷이 세 벌만 있으면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발우 하나와 함께 삼의일발三衣一鉢 원칙을 세우셨습니다. 비구니스님들은 옷이 조금 더 많이 필요해 오의일발五衣一鉢이 생겨났다고 해요. 이처럼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은 의생활에 있어서 반드시 깨끗하게 빨아 입고, 적게 소유하고 만족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두 번째,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은 무엇을, 어떻게 먹었을까요? 하루에 딱 한 번, 걸식을 통해 발우 안에 들어온 음식은 주는 대로 모두 드셨습니다. 현재는 목발우를 쓰는데, 부처님 당시에는 나무가 너무 비싸고 구하기가 힘들어 흙을 구워 만든 와발우나 철발우를 썼다고 합니다. 아침이면 스님들이 발우를 들고 모여 가까운 마을로 줄을 서서 탁발을 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어미 사자가 새끼 사자들을 데리고 가는 것처럼 위엄이 있었다고 합니다. 『금강경』에 보면 ‘차제걸이 환지본처(次第乞已 還至本處)’란 말이 나오죠. 그렇게 차례대로 걸식을 한 다음에는 본래의 장소로 돌아옵니다. 오다가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큰 나무 아래에 앉아 공양을 하기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음식을 먹는 것과 관련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음식을 얻을 때에는 항상 면도날의 비유를 생각하라. 면도날의 비유란, 면도날에 묻은 꿀을 핥을 때 혀를 베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처럼 시주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제가 출가했을 때 어른스님들께 ‘일미칠근一米七斤’이란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쌀 한 톨에 농부의 땀 일곱 근이 배어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귀중한 쌀이겠어요. 또 부처님은 늘 깨어 있는 상태로 적게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부처님과 제자들은 어디에서 사셨을까요? 나무 아래나 동굴에서도 살다가 정사精舍에서도 사셨죠. 처음에 스님들은 숲속의 나무 아래 앉아 생활하셨는데, 이것을 수하좌樹下座, 수하주樹下住라고 합니다. 그런데 밤이 되면 춥기도 하고 비가 오면 생활이 불편하잖아요. 존경하는 스님들이 그렇게 생활하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풀이나 흙으로 움막을 지어주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머무는 공간에서 스님들이 수행을 합니다. 다양한 수행 가운데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계율을 암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승가의 공동체 생활에는 포살이라든가 법문 같은 여러 가지 모임이 있는데, 다 같이 모이려면 정사精舍가 필요하겠죠. 나중에는 기원정사祇園精舍처럼 정사를 기부 받게 됩니다. 부처님 당시 스님들이 정사의 벽에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데요. 산이나 강 같은 자연은 그릴 수 있지만 남녀의 자태는 절대로 그려선 안 된다고 하는 규칙이 있었다고 합니다.
 
정사에 모여 포살布薩을 하는데, 스님들의 포살과 재가자들의 포살에 차이가 있습니다. 스님들의 포살은 다 같이 모여 율장을 암송합니다. 율장 낭송회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반면에 재가자들의 포살은 정사에서 스님들과 똑같이 수행 생활을 한다는 각오로 하루나 하룻밤을 지냅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집으로 돌아와 스님들께 올릴 공양을 챙겨 다시 정사로 갑니다. 공양이 끝나면 재가포살이 끝이 납니다. 반복적으로 포살을 함으로써 재가자들이 자신의 수행과 일상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승가의 기본 생활 원칙은 언제라도 떠날 수 있게 간소하고 검소하게 사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은 단정하고 깨끗하게 사셨습니다. ‘출가’라는 자유로운 삶 속에서 단순하게 사는 것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 같아요. 2,600년 전 부처님과 제자들의 삶이 현재의 나와 무슨 관계인가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통해 나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내가 가진 소유물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가진 기본 생활의 원칙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생각해보고 좀 더 정갈하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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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수행은 어떻게 정신을 치료하는가. : 전현수 원장(정신과 전문의)
반갑습니다. 어쩌다 보니까 저는 두 길을 걸어왔습니다. 한 길은 제 본업인 정신치료를 하는 정신과 의사의 길이고, 또 다른 한 길은 불교수행의 길입니다. 1985년 전공의 2년차에 불교를 만났는데, 그때 만난 첫 번째 스승님께서 ‘불교가 인간의 괴로움을 해결하는 완벽한 시스템’이라고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전에 저는 불교에 대해 잘 몰랐는데, 그 말씀을 듣고 많이 놀랐죠. 그렇게 불교공부를 시작하면서 불교가 진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괴로움이 생길 때마다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를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환자분들도 이것을 안다면 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두 길을 30년 걷다보니까 ‘불교정신치료자’로 두 길이 하나로 만나게 됐습니다. 불교와 정신의학은 연결될 수 있는 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행도 마음을 통해 이루어지고, 정신적인 문제도 결국은 마음에서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돈이 없어서 힘들다고 한다면, ‘돈 없는 상태를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있는 겁니다. 또 몸이 아파 힘들다면, ‘몸 아픈 상태를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돈이 없다는 것,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에 초점을 둡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초점을 전환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노력만 한다면 정신적인 문제가 수행으로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습니다. 정신이 건강해지면 어떤 것도 우리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몸과 마음이 있습니다. 수행을 통해 잘 관찰하면 몸과 마음의 속성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몸은 두 가지 속성을 갖고 있어요. 하나는 인과의 법칙에 따라 왕성한 생명활동(중립적)을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루처럼 그냥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몸의 속성에 대해 마음이 작용합니다. 마음의 속성은 첫 번째, 왕성한 생명활동에 대해 반응을 합니다. 심장이 심하게 뛸 때 어떤 사람은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걱정으로 반응을 하고, 어떤 사람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며 의사를 찾아가봐야겠다고 반응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반응에 따라 중립적이던 몸이 부정적 혹은 긍정적 상태로 변하게 됩니다. 주변에 배만 고파도 짜증을 내는 사람이 있죠. 당사자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언젠가부터 배고플 때 짜증 내는 반응이 생겨났다는 것이죠. 그 마음을 바꾸면 다른 반응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마음의 두 번째 속성은 가만히 있는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2003년도에 미얀마 양곤에서 수행을 할 때, 지도스님이 “손을 들려고 하는 마음을 내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손을 들려고 마음을 내니까 손이 움직여지더라고요. 그때 마음이 몸을 움직인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어떤 원리로 움직일까요? 마음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정신적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음은 두 가지 원리에 따라 움직입니다. 첫째, 마음은 언제나 어딘가에 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난 아무 데도 안 가 있는데.”라고 하시는데, ‘아무 데도 안 가 있는 바로 거기’에 가 있는 겁니다. 마음이 갈 때는 한 번에 한 곳을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영향을 받습니다. 정신적 문제가 있는 분들은 마음이 안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곳에 많이 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마음이 어느 쪽으로 자꾸 가다보면 그 방향으로 길이 납니다. 길이 난다는 것은 가만히 있어도 자꾸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살기 위해서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데, 그것이 결과를 가져옵니다. 모든 것이 인과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죠. 결론적으로 말하면 마음이 향해야 할 건전한 대상은 ‘현재’입니다. 불건전한 대상은 과거와 미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생각은 다 불건전하다고 보면 됩니다. 정신적인 문제를 겪는 분들을 보면 미래를 향해 불안한 생각을 하기도 하고, 과거를 생각하며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렇게 몇 달, 몇 년을 살아가다보면 뇌의 화학물질에 변화가 생겨 자기 마음대로 조절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수행을 통해 치유할 수 있는데요. 어떤 수행이든지 그 본질은 현재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몰론 지혜로운 주의(sati)를 통해 집중하는 것이겠죠. 다시 말해, 수행은 건전한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불건전한 데로 가는 길이 폐쇄되는 것입니다. 
22세에 불교가 진리임을 깨달았던 존 카밧진Jon Kabat-Zinn 박사가 30대에 마음챙김을 기반으로는 하는 스트레스 감소 프로그램인 MBSR(Mindfulness-Based-Stress Reduction)을 만들었습니다. 불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사띠(sati, 현재 집중) 하나로 이 프로그램을 만든 것입니다. 현재 집중이 수행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현재에 집중하게 되면 괴로움이 없어집니다. 구체적으로 현재에 집중하는 방법을 말씀드리면, 일단 생각을 안 하시면 됩니다. 생각이 적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밤에 잠들기 전까지 뭘 하든지 거기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는 밥 먹는 것에 집중하고, 양치질할 때는 양치질에 집중하십시오. 처음에는 몸을 관찰하는 것이 좋습니다. 몸에 집중하다 생각이 일어나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멈추고 돌아오세요. 생각을 따라가지 마세요. 길거리를 가다가 어떤 사람이 시비를 걸면 반응하기보다 그냥 가는 게 좋죠.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에 보물이 있습니다. 반면, 생각은 달콤한 꿀물인데 그 밑에 독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현재에 집중하면 무슨 재미로 삽니까?”라고 묻는 환자들이 있는데, 과거와 미래로 가는 생각의 쓴맛을 아직 못 봐서 그런 겁니다. 현재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과거와 미래로 안 가게 됩니다. 두 번째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것 중에 무엇이든 한번 들었다 놓아 보세요. 이번에는 소리 안 나게 들었다가 소리 안 나게 내려놓아 보세요. 차이가 뭡니까? 소리를 안 나게 하려면 현재에 집중하게 되죠. 그리고 내 눈 앞에 없는 사람을 생각하지 마세요. 누군가와 통화할 때를 빼고는 그 사람을 머리에 담지 마세요. 누군가를 보고 얘기를 나눌 때는 그 사람의 마음을 보고 서로 좋은 것을 하세요. 일어나지 않은 상황을 미리 마음에 담지 마세요. 현재에 집중하면 우리에게 언제나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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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요하지 않는 담담한 마음 갖는 법  : 미산 스님(상도선원 선원장) 
우리가 살고 있는 디지털 문명 시대에 부처님이 오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모두가 행복한 삶을 원하는데, 부처님께서는 행복에 대해 어떤 말씀을 해주실까 한번쯤 생각해보신 적 없으신가요? 오늘 제가 여러분들과 이야기 나눌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제가 최근에 함께 나누고 있는 ‘하트 스마일 행복명상’을 여러분들께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낮 12시부터 오랜 시간 열정을 가지고 강연을 듣느라 힘드셨을 텐데 여러분들의 눈은 여전히 생기가 돕니다. 오늘 제 강연의 제목은 ‘동요하지 않는 담담한 마음 갖는 법’입니다. 여러분, 담담한 마음 갖는 것이 쉬우십니까? 정말 어렵습니다. 어떤 때 마음이 가장 동요되나요? 비난받거나 칭찬받을 때, 큰 이익을 보거나 큰 손해를 볼 때 우리의 마음이 쉽게 동요되죠. 어떤 때 마음이 굉장히 흥분되나요? 좋아하는 연인을 만났을 때. 또 어떤 때 마음이 짜증스럽고 불안하고 초조하나요? 그 연인이 정해진 시간에 전화를 안 할 때, 날마다 전화하기로 했는데 하루 빼먹을 때 그렇죠. 한 순간에 담담한 마음이 다 사라져버립니다.  
불교수행을 하는 데 있어서 부처님의 좋은 말씀들이 우리의 세포단위에서부터 삶 속으로 드러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저는 이것에 대해 계속 연구하고 있습니다. 21세기 디지털 문명 시대에 부처님이 오신다면 어떤 가르침을 주실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봤습니다. 이 질문이야말로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붓다 빅 퀘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상 속에서 균형과 조화, 중도의 삶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네 가지 커다란 마음수행’이라고 봅니다.
‘네 가지 커다란 마음수행’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자애慈愛, 사랑입니다. 두 번째는 상대방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마음의 큰 역량과 폭을 갖춰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연민이라고 하죠. 세 번째는 상대방이 기뻐할 때 나도 진심으로 기뻐해줄 수 있는 마음, 네 번째는 언제 어디서나 흔들림 없이 담담한 마음으로 앞의 세 가지를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 전문용어로 하면 이 네 가지를 자비희사慈悲喜捨, 사무량심四無量心 수행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용량을 크고 넓게 늘리는 것이죠. 세상의 현상들을 예측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미국의 큰 컨퍼런스에서 최근 세계 흐름의 두 가지 키워드를 선정했는데요. 첫 번째는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이고, 놀랍게도 두 번째가 바로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입니다. 마인드풀니스는 불교의 사띠sati, 지금 여기에서 깨어 있는 마음챙김 명상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명상이 스님들의 전유물로 여겨져 있지만, 서구사회에서는 이미 명상이 일상생활 속에 깊이 침투해 들어가는 흐름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명상이 우리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가려면 디지털 시대에 맞는 명상법들이 많이 개발되어야 합니다. 
제가 만든 짧은 말이 있습니다. ‘수행은 쉽게(Easy), 수행은 재밌게(Fun), 수행은 의미있게(Meaningful)’ 약자로 하면, EFM입니다. 이렇게 했을 때, 젊은이들도 편하게 수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무량심에 대해서도 얘기했듯이 불교경전에는 금강석과도 같은 귀한 가르침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 금강석을 제가 뽑아서 ‘하트 스마일 명상’을 만들었습니다. 하트 스마일 명상은 아주 단순합니다. 허리를 세우고 같이 한번 해볼까요? 
 
어깨에 긴장을 풀고 손은 자연스럽게 무릎 위에 올려놓습니다. 눈은 감아도 좋고 떠도 좋습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 몸과 마음의 상태를 받아들이며 잠시 있어봅니다. 자, 입꼬리를 살짝 올려서 미소 짓습니다. 눈꼬리를 살짝 내려 눈꼬리와 입꼬리를 하나로 연결시켜 줍니다. 얼굴 전체가 환한 해님처럼 밝아지고 따스해집니다. 이마 세포가 따뜻해지고 훈훈함이 가득해집니다. 눈과 눈 사이에 따뜻함과 훈훈함이 깊이 스며듭니다. 볼에 따뜻함과 훈훈함이 가득히 스며들면서 볼이 방긋 해님처럼 웃습니다. 입가에 미소가 가득해지고, 턱과 목에도 따뜻함과 훈훈함이 가득합니다. 목을 통해서 다시 가슴으로, 가슴 한가운데서 따스하고 훈훈한 자애와 사랑이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가슴의 온 세포가 따스하고 훈훈한 자애의 미소로 가득합니다.   
 
(15분 명상 후) 자, 이제 눈을 뜨시고요. 좀 편안해지셨나요? 이것이 하트 스마일(자애 미소) 명상의 기본 방법입니다. 얼굴 전체를 해님처럼 밝고 따스하게 만들어 그 느낌을 가슴에서 일정 시간 동안 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대로 10분, 20분, 30분 이상이 되었을 때는 몸과 마음이 본래의 상태를 회복하게 됩니다. 디지털 문명 시대에 우리는 머리는 많이 쓰는데, 가슴은 잘 쓰지 않습니다. 가슴이 닫혀 있기 때문에 머리에서는 하고 싶은 게 많아도 몸이 말을 안 듣습니다.   
 
최근에 『임제록』을 보다가 정말 환희심이 났습니다. 부처님도, 부처님의 가르침도, 부처님의 도道를 따르는 이들도 모두 ‘형상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 다음 구절에 ‘부처님은 청정이다, 맑음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광명이다, 밝음이다. 부처님의 도道를 따르는 이들은 어디에도 걸림 없는 대자유다.’라고 불법승 삼보를 명쾌하게 정의해 놓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행복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생각과 감정, 오감 정보에 끄달려서 자기 중심을 잃어버렸을 때는 마음이 어둡고 깨끗하지 않고 자유롭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생각과 감정, 오감 정보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우리의 마음은 순간 맑고 밝아집니다. 자유로워집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편안하고 고요해집니다. 이게 우리 몸과 마음의 본래 상태입니다. 맑고 향기로워지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항상 따스하고 훈훈해집니다. 저는 이것을 온전함이라고 부릅니다. 나아가 이렇게 몸과 마음이 이완된 상태에서 여러분들이 간절한 마음이 된다면 그대로 성취와 실현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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