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론에 길을 묻다] 존재는 한 찰나도 머물러 있지 않다

「관삼상품觀三相品」

2016-06-08     법인 스님

「관삼상품觀三相品」

         경전을 읽다보면 얼핏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구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초기경전에서는 “자성自性이 없다.”고 말하는데 선종의 어록에서는 “일심으로 참구하여 자성자리를 찾자.”고 말합니다. 같은 언어를 달리 쓰기 때문에 모순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초기경전의 무자성無自性은 고정불변하는 어떤 존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종에서 말하는 자성은 잘못된 생각과 행위가 개입하지 않은, 당당한 주체성의 참마음을 의미합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과거는 흘러갔다. 미래는 오지 않았다. 오직 현재에 마음을 다하라.” 『법구경』의 말씀입니다. “과거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다.” 『금강경』의 구절입니다.  ‘지금 여기’와 ‘지금 여기와 결부된 마음’의 존재성을 인정하는 『법구경』과 인정하지 않는 『금강경』은 표면상으로는 상호모순입니다. 말씀의 의도와 맥락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분명 모순으로 보입니다. 
 
두 경전의 말씀은 오직 현재에서 집착 없이 청정하고 활발하게 마음 쓰며 살아갈 것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다만 반야부 계통의 『금강경』은 시간과 마음까지도 철저하게 비실재非實在라는 입장에 있습니다. 즉 현재라는 시간과 그 시간에 결부된 현재의 마음도, 분할되고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서로가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부득이 시간이라든가 마음이라든가 하는 이름을 짓고 개념을 부여합니다. 시간과 마음이라는 존재가 아예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고정된 명사로 미리 존재하고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과 조건이 결합하여 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누가’ 움직이는 것인가를 묻지 말고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초기경전에서 무상無常과 무아無我, 대승경전에서 공空과 무작無作, 선종어록에서 무일물無一物이 지시하는 지점은 ‘그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본래 존재하지 않으니 붙들고 집착할 것이 없다는 명징한 자유정신입니다. 『중론』을 읽어가면서 이러한 지향점을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7품은 「관삼상품」입니다. 어떤 존재에 대한 발생(生), 유지(住,) 소멸(滅)에 대한 고찰입니다. 만들어진 모든 사물과 현상이 연기이고 공이라는 점을 분석하고 있는 장입니다. 부처님은  모든 존재는 ‘있어온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 것’이라는, 즉 연기緣起의 산물임을 발견했습니다. 만들어진 것을 유위有爲라는 용어로 표현합니다. 유위에 대해 무위無爲라는 용어가 등장합니다. 이 품은 만들어진 것들이 발생하고, 유지하고, 소멸하는 유위를 고찰하고 있습니다. 무위의 개념을 짚어보기로 하겠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무위를 노장老莊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작위적 의도가 개입하지 않는 허무자연의 행위가 무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경전에서 무위는 이와 다릅니다. 
 
무위는 그 실체(自性)가 없다. 그 유위가 멸함으로 인해 무위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그러니 불생불멸不生不滅을 무위의 모습이라고 부른다. 
 
「관삼상품」에서 이렇게 무위를 정의합니다. 유위라는 영역을 떠나 별도의 영역에 무위가 일정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어둠의 영역과 밝음의 영역이 별도의 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님과 같습니다. 어둠을 만드는 조건이 소멸하면 그 자리가 곧바로 밝음이 되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어떤 조건들이 해체되면 그 자리가 바로 무위가 되는 것입니다. 유위와 무위를 현실의 모습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여기 미움과 사랑이 있습니다. 이 애증은 서로 다른 견해와 취향과 행위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미움과 사랑은 바로 발생하고, 일정한 시간 동안 유지되고, 소멸하는 유위의 산물이고 모습입니다. 애증은 사람에게 고통을 불러옵니다. 이 고통을 소멸하기 위하여, 혹은 고통이 발생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무위의 세계를 지향합니다. 
 
그런데 그 무위의 세계는 지금 여기에서 미워하고 사랑하는 삶의 행위를 떠나 별도의 어느 시공간에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애증이 만들어지고 진행되는 원인과 조건을 해체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원인과 조건을 해체하는 순간 바로 애증이 사라집니다. 그 애증이 사라진 자리가 바로 무위입니다. 그래서 무위법은 실체(自性)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둠이 광명이고 번뇌가 깨달음이며 사바가 극락이고 중생이 부처라는 논리가 바로 이런 맥락 위에 있습니다. 『중론』은 명제들을 집요하게 낱낱이 분석하고 해체하며 모든 사물과 현상이 연기이고 공성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궁극적 지향점을 자유와 창발성의 실현에 있음을 거듭 잊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이 품 서두에서 대론자는 이와 같이 묻습니다.
경전에서는 유위법有爲法이 생生, 주住, 멸滅의 삼상三相을 갖는다고 설한다. 만물은 생법 生法으로 생生하고 주법住法으로 주住하며 멸법滅法으로 멸滅한다. 그래서 모든 사물이 존재하는 것이다. 
 
 
 
         대론자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과 운동하는 현상은 분명 가시적으로 발생과 유지와 소멸을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떤 법칙이 미리 존재하고 있어 발생과 소멸의 모습을 산출한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이 말하고 있는 이데아 이론이나 칸트의 절대정신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존재가 어떤 불변의 고정적 실체가 아니라는 나가르주나의 선언은 사물과 현상을 존재하게 하는 법칙의 실체성도 부정합니다. 고정적이고 불변적인 법칙, 그것이 드러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야부 경전은, 가시적이고 감각적인 표면의 현상은 유한하지만 배후의 불변적인 어떤 것을 인정하려는 사람들의 견해를 해체하고 있습니다. 공空이라는 것을 불변의 실체로 생각하려는 견해에 대해 공도 공하다는 공공空空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또 사물과 현상의 시초를 인정하려는 견해에 대해서는 필경공畢竟空이라고 명명합니다.       
 
대론자의 문제 제기에 대해 나가르주나는 단호하게 부정합니다. 왜냐하면 삼상이 확고한 실체(自性)가 없기 때문에 사물과 현상이 어떤 일정한 모습과 내용을 가진 생법과 내지 멸법에서 산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생生이 유위라면 응당 삼상三相을 가지리라. 만일 생이 유위라면 어떻게 유위의 상相을 부르겠는가?  - 「관삼상품」 제1게 -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어떤 존재의 발생은 여러 조건들이 말미암기 때문에 유위인 것입니다. 여기서는 발생을 고정불변적 법칙의 실체성으로 생각하는 인식의 오류를 시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 발생이 실체성을 가진 유위라면 발생하는 순간, 그 발생은 유지와 소멸의 모습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발생하는 찰나에 일정한 모습과 소멸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미움이 발생하는 ‘찰나’에 미움의 고정태와 소멸태가 동시에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일체 존재는 시간과 모습을 분할하여 한 찰나도 자기동일성을 가지고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삼법인의 제행무상諸行無常을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법인 스님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과 「불교신문」 주필을 지냈다. 2000년 해남 대흥사 수련원장으로 오늘날 템플스테이에 해당하는 ‘새벽숲길’이라는 프로그램을 불교계 최초로 열었다. 2009년부터 4년간 조계종 교육부장을 맡아 ‘100년 만의 변화’라는 승가교육개혁을 이끌었다. 현재 일지암에 머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