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늙은이 조주의 하루살이

2016-06-08     불광출판사

         우리 마을 사람들은 건망증이 심하다는 말을 잊음이 많다고 한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잊음이 많기로 이름이 났다. 잊어서는 안 될 일도 깜빡깜빡해서 야단맞은 일도 많고 못 믿을 녀석이라는 핀잔도 여러 차례 들었다. 안 잊으려고 손바닥에 철필로 거의 피가 맺히도록 긁어서 적어 놓아도 손 씻고 나면 거기에 무얼 적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할 때가 많았다. 이쯤 되면 ‘치매’라고 불려도 좋겠다. 엎친 데 덮친다고 이 선천성 치매에 알코올성 치매와 노인성 치매가 덧붙었다. 자꾸자꾸 잊는다. 머릿속에 남아나는 게 없다. 그러니 이제부터 하는 말도 책에 적힌 글과는 생판 다를 수도 있다. 

「선문염송」이나 「벽암록」 따위를 들추어보면 조주라는 이름이 자주 나온다. 내가 알기로 조주는 열일곱 살에 남전을 찾아간다. 그리고 남전을 마흔 해쯤 모신다. (스승과 제자 사이였으니, 겉으로는 모셨겠지만 어느 때부터는 흉허물 없는 언니 아우나 길벗으로 지냈겠지.) 남전이 저승길 떠난 뒤에 조주는 그 무덤자리를 세 해 지켰다고 한다. 조주가 홀가분하게 떠돌이로 나섰을 때는 나이 예순이 넘었다. 그 뒤로 스무 해 동안 길에서 산다. 그야말로 길손이고 나그네다. ‘조금 멋진 양말(西歐言語)로 하면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라고나 할까.’ 나이 여든이 되어서야 다 쓰러져가는 조그마한 절집에 들어 주지살이를 한다. 조주 꼴이 이렇다. 머리가 가려워서 긁으면 비듬이 우수수 떨어지는데 거짓말 좀 보태서 서 말쯤 앞에 쌓인다. 옷은 더 말할 나위 없이 거지 가운데 상거지 꼴이고, 다 낡아 모서리가 모지라지고 군데군데 흙바닥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돗자리가 깔린 방에는 변변한 이부자리도 없다. 어쩌다 코빼기를 내미는 마을 어중이떠중이는 모처럼 절집 찾아왔는데 차 한 잔도 내놓지 않는다고 투덜거린다. 탁발을 나서면 좁쌀 한 움큼 내놓으면서 생색이 여간 아니다. ‘아까운 양식인데, 길 닦음(수도)이나 부지런히 하슈.’ 풀이 무성한 절집 마당에는 마을 사람들이 소를 풀어놓아 소똥이 한가득인데, 정작 밭갈이 하겠다고 소를 빌려달라면 두 손을 홰홰 젓는다. 가끔 머리 깎은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중들이 지나는 길에 들렀다가 시건방만 잔뜩 떨고 휑하고 떠나버린다… ….


         조주가 「하루 열두 때 노래(十二時歌)」에 풀어 놓은 넋두리가 이렇다. 이 소리를 보고(觀音) 처음 들었던 생각은 ‘그래, 그래. 중도 다 늙어빠져 뒷바라지해 줄 사람이 없으면 그냥 이 꼴이지. 그러게 따까리 노릇할 상좌 한 놈 제대로 골라야 하겠다고 눈에 불을 켤 수밖에.’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삐딱한 곁눈질은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다. 나 보기에 이것은 선불교 역사에서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없을 ‘깨달음 노래(悟道頌)’다. 여든이 넘어서야 조주는 저를 제대로 보고 이웃을 있는 그대로 본 것이다. 그 뒤로 조주는 마흔 해를 더 산다. 나는 선禪의 역사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조주의 말모음(어록)은 거의 모두가 여든 넘은 늙은이의 입에서 나왔다고 본다.

손발놀림과 몸놀림은 젊은이들 몫이다. 부지런히 손발 놀리고 몸 놀려서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밭머리에서 땡볕에 김을 매면서 입을 놀리는 일은 없다. 콩삯에게 잘 자라라고 부추긴다고 해서 콩잎이 힘을 얻는 것도 아니고, 같이 자라는 풀들에게 싫은 소리를 한다고 해서 움츠러들지도 않는다.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다. 부지런히 손발 놀리고 몸 놀린다는 말은 딴 말이  아니다. 열심히 일한다는 말이다. 보짱(百丈)이 ‘하루 짓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고 한 말 거저 한 말이 아니다. ‘참선과 농사가 한 몸이다.(禪農一体)’라는 말도 거저 나온 게 아니다. 나 알기로 보짱은 ‘입 닥치고 몸 놀려라.’고 다그쳤다. 이것이 묵언수행黙言修行의 지름길이라고 가르쳤다. 

일과 놀이는 둘이 아니다. 손발 놀리고 몸 놀린다는 말은 손발과 몸을 놀게 한다는 말이다. 또아리 틀고 마냥 쉬게 한다는 뜻이 아니다. 학교 교실에서 학생들이 하고 있는 짓을 봐라. 업 닦음(修業)인지 업 받음(受業)인지를 한답시고 여섯 해, 아홉 해, 열두 해, 때로는 스무 해가 넘도록 움쩍달싹 않고 손발 놓고 몸 놓고 넋 놓고 앉아 있다. 입 다물고(묵언) 몸 닦고(수행) 있다. 마침내 어떻게 되는가. 사람 꼴을 한 강시나 좀비가 된다. 마냥 쉬어서 쉬어버린다. 몸에서도 넋에서도 쉰내가 물씬 난다. 그야말로 몸에도 손발에도 얼에도 쉬가 쓴다. 


         그런데 이 짓을 죽을 때까지 놓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배운 사람(학자, 지식인)들이 그렇고 ‘스님’들 가운데도 그런 이들이 없지 않다. 머리 굴리다 보면 알음알이(知知)들이 생겨난다. 나중에는 고의적삼에 쉬슬듯이 머릿속에 그 알음알이들이 득시글거린다. 그걸 뱉어 놓은 것이 경전經典 행세를 한다. 몸 놀리고 손발 놀리는 이들은 이 거룩한 말씀들은 읽을 겨를도 귀담아들을 틈도 없다. ‘한마디로 뭉뚱그려 줘유. 살아서는 이 개 같은 세상 벗어날 수 없으니까 죽어서라도 좋은 데 갈 길 일러줘유.’ 그래서 일러주는 말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 아니던가.

선문답이 무언가. 입놀림으로 대거리하는 짓이다. 조주는 여든 늙은이가 될 때까지 몸 놀리고 손발 놀렸다. 그 뒤로도 그렇게 살려고 애썼다. 보짱도 마찬가지다. 늙은이가 밭머리에 엎드리는 게 딱해서 곁에 있던 제자라는 것들이 호미를 감추어버리자 ‘먹지 말라는 말이지?’ 하면서 굶음으로써 꾸짖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지금 시골에서 밭머리에 엎드려 있는 이들은 늙은이들밖에 없다. 거게가 여든 가깝거나 넘은 늙은이들이다. 따지고 보면 이이들은 몸 놀리는 일은 쉬고 입 놀려야 할 나이다. 그러나 이 살아 있는 보짱들을 찾는 이들이 없다. 젊은 것들은 죄다 도시에 몰려 입만 놀리고 살 길을 찾는다. 뭇산이(衆生)들의 노는 꼴이 이렇다.

입놀림이라는 게 뭔가. 입으로 놀고 입으로 놀린다는 말이다. 일 배움은 놀이터에서 생겨난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마음껏 손발 놀리고 몸 놀리면서 저절로 일할 힘을 기르고 일을 배운다. (본디 놀이터는 도시 구석구석에 쑤셔 박혀 있는 좁디좁은 빈터가 아니다. 산과 들, 바다와 시냇가가 모두 놀이터이자 일터다.) 내 생각에 조주는 절집을 놀이터로 바꾼 사람이다. 조주는 찾아오는 사람들을 놀리고 함께 놀았다. 그러지 않았으면 아무도 그 쓰러져가는 절집을 거들떠보지 않았을 게다. 누가 와서 묻는다. ‘부처가 뭐에요?’, ‘똥 치우는 막대기여.’, ‘저 뜰 앞에 잣나무 보이지? 그게 부처여.’ 일껏 먼 길 찾아와서 묻는데, 엉뚱한 말을 내뱉는다. 우스갯소리다. 속으로는 이렇게 웅얼거렸을 수도 있겠다. ‘니 스스로 니 힘으로 찾아야 니 부처지, 내가 덥석 안겨준다고 니 부처냐. 그건 남의 부처여, 똥친 막대기만도 못해.’ 그래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해서 단박에 알아챌 됨됨이라면 산 넘고 물 건너 오지도 않았겠지. 입에서 입으로 귀에서 귀로 말이 옮는다. ‘어느 집에 갔더니 늙어 꼬부라진 중이 있는데 입놀림이 재미있어. 입씨름도 여간이 아녀.’


         입씨름은 놀이다. 씨름판이 벌어지면 사람들이 모인다. 입씨름도 씨름이니까. 힘겨루기가 끼어든다. 그냥 우스갯소리로 들려도 주고받는 말에 가시가 돋쳐 있기도 하고, 코웃음이 섞여 있기도 하고, 혀끝으로 치고받기도 한다. 사람 사는 데라면 언제 어디서라도 입씨름이 벌어지고 말다툼이 일어난다. 놀이판이 벌어지면 판돈이 오간다. 판돈은 목숨일 수도 있으나 섬김과 우러름일 수도 있다. 조주는 100년이 넘게 이 놀이터, 노름판에서 굴러먹은 사람이다. ‘내 생각이다.’ 여우도 100년 묵으면 사람 간을 뺀다. 꾸역꾸역 몰려드는 사람들은 넋 놓고 있다가 얼간이가 된다. 그렇게 조주는 뭇사람 놀리면서, 같이 놀면서 오래오래 살았다. 그리고 잘 놀다 갔다.

이것이 조주의 ‘하루살이 노래’에 담겨 있다고 하면? 내가 조주를 놀리는 말이다. 얼굴 붉힐 까닭이 없다. 우스개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그만이다. 

해마다 부처님 온 날이 되면 놀이꽃이 핀다. 종이 연꽃만 피어나는 게 아니다. 춤판도 벌이고 노래판도 곁들인다. 야단법석이다. 절집에서도 벌어지고, 저잣거리에서도 일어난다. 좋은 날, 좋은 일이다. 내가 앞서 이미 말했던가. 좋다는 말은 정淨, 청淸, 결潔을 옮긴 우리말이라고. 깨끗하다는 말과 같은 말이라고. 놀이의 마무리는 웃음판이 되어야 한다. 여기저기서 환한 웃음꽃이 피어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해서 마음이 맑아지지 않으면 아무리 종이 연꽃이 하늘을 덮어도 그 판은 깽판이다.

올해는 봄비가 잦아서 양파와 마늘이 땅 속에서 문드러지고 있다. 하늘이 시키는 일이니 누구를 탓할 일이 못된다. 그러나 절집에서나 교실에서 제대로 입 놀리지 못하고 몸 놀리지 못해 속이 문드러지고 손발이 썩어 가는 꼴은 안 보았으면 좋겠다.  

                                                                                                                               
윤구병
서울대학교 철학과와 대학원을 나오고 월간 「뿌리깊은나무」 편집장을 거쳐 충북대학교에서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 1995년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전북 부안으로 낙향, 농사를 지으면서 대안교육을 하는 ‘변산교육공동체’를 설립해 20여 가구가 함께 생활하고 있으며, 어린이 전문 출판사인 보리출판사를 설립해 많은 어린이 책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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