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없는 곳으로

2016-06-08     불광출판사

1.png
 


종로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내게, 부처님 오신 날이면 마음을 환히 밝혀주는 연등들은 아주 아름답고 특별한 풍경이었다. 붓다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낡지도 늙지도 않으신다. 아니 매일 더욱 젊어지시는 기분이 든다. 붓다의 생애와 가르침이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새로움으로 거듭 태어나기 때문이리라. 스무 살 시절엔 참 시간이 느리게 갔다. 그러다가는 늙지도 않을 것만 같았던 지루한 젊음이 어느새 눈뜨니 곁에 없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건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진 탓이라던 글귀가 생각난다. 아는 길을 빨리 가듯이. 문득 오래전에 본 어느 영화  속의 대사가 생각난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젊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상이었다는 생각은 늙어보지 않고는 들지 않는다. 아니 그게 좋은지도 몰라본 가시면류관이었을 뿐, 오늘도 늙음이 상이 되는 그런 삶의 시작이길 바란다. 괴로울 때나 외로울 때나 지나고 보니 나의 참선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늙음이 온다 한들 그런대로 좋으리라. 뭇 세상의 슬픔들을 목격하면서 왕의 길을 버리고 길 위의 삶을 시작하신 붓다의 삶이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건 그가 신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슬픔이 없는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걸 깨달은 젊은 붓다가 세상의 모든 슬픔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은 아름답다. 몇 년 전 아프리카 오지의 어린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던 시간들이 생각난다.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삶은 콩이 그들 식사의 전부였다. 넘치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 아이들의 식사가 눈에 어른거린다. 다 같이 사진을 찍을 때, 등 뒤에서 내 손을 지긋이 잡던 조그맣고 따뜻한 손의 기억도 어제처럼 생생하다.                                                                                                                      

                                         
황주리
작가는 평단과 미술시장에서 인정받는 몇 안 되는 화가이며, 유려한 문체로 『날씨가 너무 좋아요』, 『세월』,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나 흙이 묻었다』 등의 산문집과 그림 소설 『그리고 사랑은』 등을 펴냈습니다. 기발한 상상력과 눈부신 색채로 가득 찬 그의 그림은 관람자에게 강렬한 기억을 남깁니다. 그것은 한 번 뿐인,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우리들의 삶의 순간들에 관한 고독한 일기인 동시에 다정한 편지입니다. 




ⓒ월간 불광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