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인터뷰] 전국비구니회 회장 육문 스님

“오늘 그대의 발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니라”

2016-05-13     유윤정
 
 

 

 
“일하는 전국비구니회가 되겠습니다.”
2016년 4월 12일, 전국비구니회관 법룡사에서 제11대 전국비구니회장 육문 스님을 만났다. 약속장소로 가는 길, 법룡사 1층 로비의 카페에는 보살님 서너 명이 향긋한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3월 중순 새로 단장해 열은 카페 메따metta다. 불교용품점이 있던 자리다. 비구니회관을 누구나 자유롭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며, 이로 얻은 수익은 비구니 복지에 사용하겠다는 공약 실현의 초석이다.
 
- 전국비구니회장이 되고 시간이 조금 흘렀습니다. 많이 바쁘시지요?
 
“평소와 다를 것 없습니다. 군위 법주사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새벽 1시 조금 넘어 일어나 일과를 시작하는 것. 그 생활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별다를 것 없어요. 전국비구니회의 많은 일들을 우리 스님들이 함께 다 하십니다. 저는 생색만 내게 되네요.”
 
인터뷰를 하는 이날도 오전에 경주를 다녀오는 길이다. 인터뷰를 마치면 다음 약속 장소로 바삐 이동해야 했다. 겸양의 표현이 무색하다. 육문 스님이 전국비구니회장이 되고 난 후 불교계 신문에서는 전국비구니회 관련 기사가 꾸준하게 올라왔다. 전국비구니회장 직함을 달고 전국을 다녔다. 서울, 강원, 경남, 전남, 전북, 충남 등등. 방방곡곡에서 지회가 꾸려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기존 13개였던 전국비구니회의 지회를 17개 지회로 확대 구성했다. 지난 3월 24일에는 제9차 정기총회와 운영위원회 회의를 개최했다. 비구니 대중 스님들의 목소리를 수렴해 회칙을 제·개정하고 총회와 운영위원회, 지회를 정비했다. 회칙의 절차에 맞추어 비구니 명예원로의원 11명과 원로의원 18명을 추대했고, 원로회의를 구성했다. ‘비구니 위상과 권익 향상을 위해 일하는 전국비구니회가 되겠다.’며 내건 공약들을 하나씩 이행해 나아가는 중이다. 
 
그 일련의 과정들에 있어 수많은 안건의 최종 처리는 회장을 거친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할 수 없다. 안건 하나하나 면밀히 검토하는데 온 시간과 힘을 다한다. 그럼에도 별다를 것이 없다고 한다.
 
평생을 일하며 살았기 때문일 터이다. 스님은 과거 1994년 종단개혁 당시에도 개혁종회의원으로 참여해 종헌종법을 제·개정하는 일에 힘썼다. 또 10년간 전국비구니선원 선문회 회장을 맡으며 비구니 스님들의 위상을 강화할 방안들을 고민해왔다. 그런 스님께 전국비구니회의 개혁을 요구했던 열린비구니모임의 스님들이 찾아왔다. 육문 스님을 제 11대 전국비구니회장 선거의 후보로 추대하고자 함이었다. 상좌스님들은 눈물을 흘리며 절대 안 된다고 열린비구니모임을 막아섰다.
 
“상좌스님들한테 약속을 했어요. 세납 70이 되면 모든 일 내려놓고 수행에 매진하겠다고 했지요. 상좌스님들하고 한 약속이니 후보로 나설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설득하려고 내려온 열댓 명 스님들이 아주 강력하게 말합디다. ‘스님이 허락 안 하시면 열린비구니모임도, 개혁도 여기서 다 접어버리겠습니다.’ 하고요.”
 
아주 간곡하고 눈물겨운 청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도반 선원장스님이 한마디 건넸다. “스님, 안 되겠습니다. 하셔야겠네요. 저렇게 힘들어합니다. 전국비구니회를 키우려는 뜻이 있어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어떻게 스님이 안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상좌들과의 약속도 약속이지만, 대중이 요구하는 것은 부처님의 명이라고 생각했다. 오랜 고민 끝에 열린비구니모임 스님들의 간곡한 청을 승낙했다. 
 
그리고 2015년 10월 12일, 전국비구니회관에서는 임시총회를 열고 제11대 회장 선출을 위한 안건을 다뤘다. 임시총회는 회칙에 따라 동참 대중의 동의를 얻어 정기총회로 진행됐다. 전국비구니회장 선거는 전국 각지에서 온 비구니 스님 1,184명이 투표했다. 923명의 대중스님들이 육문 스님에게 힘을 보탰다. 전폭적인 지지였다. 
 
| 부처님 법 있기에 두려울 것 없는 팔공산 호랑이
“스님의 별호가 ‘팔공산 호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을 건네는 기자의 목소리가 건조해지자 찻잔을 앞으로 가만히 밀어준다. “여기, 차 한 잔 드세요. 향이 아주 좋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 호랑이라면 필경 어미 호랑이이리라. “스님 별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라고 전하자, 대체 그런 이야기는 어디에서 듣는 것이냐며 웃는다. 단숨에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흥암은 울도 담도 없는 절이었으니 야영객들이 누각 밑에다가 텐트를 치고 자요. 새벽에 도량석 하러 가면 깜짝 놀랍니다. 그러면 가서 야단치죠. ‘잘 곳이 없으면 와서 인사를 하고 사정을 설명하면 방을 내줄 터인데, 남의 누각에 누가 텐트를 치느냐!’ 하고요. 그렇게 혼쭐난 사람들이 그런 소문들을 냈나 봅니다.”
 
예부터 대문 지키는 스님으로 유명했다. 스님이 백흥암에 들어와 대문을 걸어 잠근 후부터, 백흥암은 일 년에 두 번, 부처님오신날과 우란분절만 개방하는 선원이 되었다. 치열한 선원으로 키웠다. 그런데도 하루는 군인들이 신분을 앞세워 산문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참배객도 받지 않는 절이다. 스님은 군인을 불러 세워 다그쳤다. “당신들이 군인이면 다냐. 당신들도 법이 있다지만, 여기도 이곳의 법이 있다.” 그날, 무리를 이끈 별 3개가 달린 군인은 깍듯이 참회를 하고서 내려갔다. 1980년대의 일이다. 
 
바르다고 판단하는 것은 세상사 걸림 없이 목소리를 냈다. 스님의 대쪽 같은 성정은 서른다섯 백흥암에 온 첫해, 1980년 10·27 법난 당시 일화에서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군인 70여 명이 총구에 착검을 하고선 절 마당으로 들어와 소리쳤다. “여기 중들 싹 모여!” 육문 스님은 군인 앞에 서서 호통쳤다. “지키라는 나라는 안 지키기고 왜 절집 대문 지키고 서있냐! 대통령이 시켰냐?” 사자후 한 번에 3개월 동안 감시가 붙었지만, 부처님 말씀을 지키고 따르기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은 불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백흥암, 군위 법주사 등, 산골짜기 스러져가던 절들이 스님의 손을 거쳐 비구니 스님들의 용맹정진 도량이 되었다. 봉녕사 일주문 재목材木도 스님이 희사했다. 모두 부처님 원력이다.
 
 
 
 
- 비구니 선원 불사를 하신 이유가 있는가요?
“다른 이유 없습니다. 인연 따라 그렇게 되었습니다. 백흥암도 도반들과 산행하다 우연히 들르게 됐어요. 법당에 가서 절을 하는데, 부처님이 눈물을 흘리고 계세요. 법당에 비가 줄줄 새서 빗물이 말라붙은 모습이 꼭 눈물자국 같았습니다. 부처님 눈물을 닦아드려야겠더라고요. 불사를 하겠다고 발심했습니다. 찻길이 없어서 등짐 지어 나르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아주 가난한 절이었어요. 양식이 없어 본사(보은 법주사)로 동냥을 나갔습니다. 법주사 월남 스님께서 30만 원을 주셔서 받아오기도 하고. 그다음에는 갓바위서 쌀을 얻어다 먹기도 했지요. 그래도 열심히 정진하고 기도했습니다. 부처님 은덕으로 재건할 수 있었죠. 백흥암 불사에 17년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나랏돈 하나 받지 않았습니다. 불사해놓고 나니 스님 되려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 장소 가지고는 아무래도 부족하겠다 싶었던 차였습니다. 마침 본사(은해사)에서 저 보고 군위 법주사에 가면 어떻겠냐고 하셨습니다. 그곳도 허허벌판이에요. 불사를 시작했지요. 그렇게 또 18년 세월이 지났어요. 이제 편안하게 살려고 하니 이곳에 오게 됐네요.(웃음) 봉녕사 일주문도 마찬가집니다. 백흥암 대문 만들려던 재목이 있었는데, 봉녕사 묘엄 스님께서 일주문을 짓고 싶어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차피 이곳은 대문 걸어 잠그고 사는데….’ 싶어 얼른 연락했지요. 우리 부처님 법이 대단합니다. 모두 인연법 따라 살게 된 것이에요.”
 
| 수행자의 본분 그리고 수처작주 입처개진
- 그 덕에 많은 비구니 스님들이 화두 성성한 안거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 전국비구니회 회장이 되기 전부터 선원수좌복지회 이사를 역임하는 등, 비구니 스님들의 복지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쓰셨습니다.
 
“신경은 많이 썼는데 복지는 아직 못 이뤘습니다. 비구니 복지를 이뤄보겠다고 한 세월이 불사만 30년입니다. 이제는 제가 복지관에 갈 나이지요. 사람마다 모두 늙는데, 늙을 때 책임을 져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아주 슬픈 일입니다. 법룡사 1층 카페 메따는 비구니 복지를 위해 내딛은 아주 작은 첫걸음입니다. 여기서 생기는 수익은 비구니 스님들 노후 복지와 병원비 보조 등을 위해 사용될 것이에요. 이런 일들을 점점 더 확장시켜서 나갈 계획입니다.”
 
- 전국비구니회장 소임을 맡으면서, 가장 집중했던 일은 무엇인가요?
 
“우리 비구니 스님들의 환경이 지금보다 더 좋아지는 것입니다. 비구니 스님들 중에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출중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 정말 많아요. 그런데 그 능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따라주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있어요. 그중 하나가 재정이지요. 솔직히 비구니 스님들 다 가난합니다. 본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돈 나오는 곳이 뚜렷이 없습니다. 가난은 흉이 아니에요. 수행자의 본분이지요. 그렇지만 재정이 부족하면 큰일을 도모하기 힘듭니다. 순리대로 잘 이루어져야 하는데 쉽지 않은 거예요. 어떻게 하면 비구니 스님들이 어떤 일을 하거나 정진하더라도 차별받지 않고 제대로 위상을 찾아갈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 현재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81석 중 10석이 비구니 스님입니다. 의석수를 늘리고, 비구니 스님의 역할을 확장하는 것도 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1994년 종단개혁 때도 정예도량에서 어른스님들과 함께 중앙종회의원 비구니 스님 20석 배정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논의를 거쳐 10석이 배정되었지요. 비구니 스님들이 종회에서 제대로 된 역할만 한다면 10석도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총무원뿐만 아니라 교육원, 포교원, 호계원 등에 비구니 스님의 소임과 역할이 더 확대되길 바랍니다. 호계원에는 초심위원, 재심위원 중 비구니 스님이 1명도 없습니다. 호법부에도 국장급 비구니 스님은 없어요. 비구니 스님들이 비구 스님들을 갈마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비구니의 문제는 적어도 비구니가 갈마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를 하려고 합니다. 좀 더 들어간다면 교구 본사부터 시작해서 비구니 스님들이 잘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한 자리가 주어져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 권익을 찾는 것이 종회의원들이 할 일인 것이지요.”
 
- 전국비구니회가 새롭게 출범하면서 교계 안팎에서 기대가 많습니다. 스님께서 보시기에 비구니 스님들이 한국불교에서 어떤 장점을 갖고 활동할 수 있을까요?
 
“우리 비구니 스님들은 다 잘합니다.(웃음) 처하는 곳에서 주어지는 일을 다 잘합니다. 비구니이니까 이런 일을 해야 한다는 구별이 없습니다. 이런 일 저런 일 분별없이, 사는 곳에서 맡은 바 소임에 자신의 역량껏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요. 수처작주입니다. 비구니 스님들은 부처님 법을 아주 잘 지킵니다. 법납 30~50년 된 노스님들도 많고, 수행도 아주 열심히 하고 계십니다. 공부하는 스님들도 마찬가집니다. 굉장히 많은 공부를 하고 계세요. 자리가 없어서 공부하던 것들이 사장되고 있을 뿐이지요. 비구니 스님들 사찰에 가보셨습니까? 연등도 정성스럽게 잘 만들어서 해놓습니다. 어느 본사에 가도 그런 연등 보기 어렵지요. 비구니 스님들은 매사 처처마다 주인의식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이야기는 이제 불자들을 향했다. 25안거를 성만하며, 어떤 화두를 들고 수행했느냐는 질문에 스님은 허리를 곧추세웠다. 
“시심마是甚麽 화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화두 소리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해가 갑니까?”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알려드릴게요. 지금 ‘이’ 하고 소리내보세요.”
“이-”
“더 크게!”
“이-!”
“이! 한 그 놈이 무엇입니까.”
무릎을 마주하고 앉아 ‘이!’ 한 그놈이 무엇인지 찾는다. 아주 쉬운 것이 화두인데 또 아주 어려운 것이 화두라 한다. 
“예, 스님. ‘이!’ 한 놈이 무엇인지 열심히 찾아보겠습니다.”
“옳지, 옳지. 그래요. 열심히 참선해요. 선의 면목은 뼈가 사무치게 추운 날 맡는 진한 매화 향기 같습니다. 얼마나 좋아요. 부처님 공부 열심히 하세요.” 
바르게 세운 등줄기로도 참된 법을 드러내는 수좌스님이다.
 
- 최근 출가자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성 출가자의 감소가 두드러지는데요. 스님께서 여성 불자들에게 출가를 발심하도록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출가라는 것은 참 아름답고 숭고한 것입니다. 우리가 스님이 될 때 잘 먹고, 잘 살고, 호강하려고 되는 것 아니에요. 부처님의 그 깊고 깊은 진리를 깨닫고 부처님의 행적을 따라가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지요. 세상 사람들은 그런 깊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살다 죽습니다.”
 
- 여성 불자들이 출가를 발심할 수 있는 매력적인 승가공동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글귀를 일러드릴게요. 서산 대사의 말씀입니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눈 온 들길 걷는 사람이여, 갈팡질팡 걷지 마라, 오늘 그대의 발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니라.’ 라는 뜻입니다. 우리 선대가 잘하고 있으면 뒤에서 따라오지 말라고 해도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격입니다. 잘하고 있으면 출가하지 말라고 만류한다고 해도 애들 말 안 들어요. 제가 출가할 때도 그랬지요.”
 
- 스님, 소임을 맡으신 지 이제 6개월이 지나갑니다. 스님께서는 비구니 승가공동체를 이끄는 분으로서,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실 생각인지요?
 
“전국비구니회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지금까지도 잘 걸어왔습니다. 앞으로도 잘 걸어가는 일이 전국비구니회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일이겠지요.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 따르는 전국비구니회가 되고자 합니다. 삼계도사 사생자부가 부처님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부처님을 본받아 부처님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이지요. 부처님처럼 사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평상심이 도입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살고 있기에 질서를 찾을 것입니다.”
 
- 요즘 발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들려주시고, 불자들에게도 어떤 원을 가져야 하는지 들려주시죠.
 
“요즘 발원이라니요. 발원은 평생합니다. 출가 후부터 지금까지 같은 발원이에요. 부처님 앞에 합장하고 참회부터 한 후에 발원을 하지요. ‘세세생생 불퇴전. 세세생생 태어나고 또 태어나도 부처님 법을 여의지 않겠다. 바른 정법을 만나겠다.’고 발원합니다. 원이 바뀌나요. 그건 바꾸어질 수 없는 것이에요. 좋고 바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처님 법보다 더 좋은 것 없지요. 불자님들도 불교 공부 많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짧다면 짧은, 길다면 긴 1시간 10분의 인터뷰를 마치고, 육문 스님은 급하게 다음 일정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오늘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가 바빠서 시간을 넉넉히 못 내드려 미안해요. 먼저 바삐 가게 되었습니다. 저녁공양 꼭 하고 가세요.” 육문 스님과 함께 걸어 나온 길, 전국비구니회관 법룡사 앞 뜰에는 망울진 철쭉꽃이 소담히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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