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붓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가, 붓다

이광수 교수

2016-05-17     김성동

이광수 교수(부산외대 인도학부, 58)는 역사학자다. 인도 델리대학교 대학원에서 인도 고대사를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 논문을 쉽게 풀어쓰고, 한국 사회 문제를 함께 이야기해서 쓴 책이 2013년에 나온 『슬픈 붓다』다. 그에 따르면 별로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불교 신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타 종교인은 더욱 아니다. 종교인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닌, 역사학자의 눈으로 붓다를 본다. 때문에 그가 붓다를 바라보는 눈은 마치 사진을 찍듯 ‘고타마 붓다’를 ‘있는 그대로’ 본다. 그를 인터뷰하려는 이유다. 불교인의 시선이 아닌, 종교인의 눈이 아닌, 역사를 다루는 사람은 실존 인물로서의 붓다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2천 7백 년 전 불교를 세상에 보여준 인간, 역사인 붓다의 모습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그는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삶을 살았고, 무엇을 가르치고, 어떻게 행동했는가? 그는 인터뷰 전에 “스님들이 나의 불교에 대한 생각을 불편해한다.”고 말했지만, 인터뷰 내내 그는 불교계에 적지 않은 애정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역사학자가 본 붓다. 이번 인터뷰 주제의식이다.

 

- 싯다르타의 출가 이유를 사문유관四門遊觀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교수님은 이렇게 이해하는 것을 ‘역사에 무지하기 때문’으로 판단한다. 출가 이유가 사문유관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붓다는 인류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분이다. 어느 날 병들고 죽는 모습을 보고 출가했다는 것은 붓다에 대한 모독이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일 뿐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 경전에는 그렇게 기술되어 있다.

“(후대의 불교인들은) 붓다의 애민정신, 인간에 대한 존중, 사회 혁신, 사회적 고민 등의 모습을 굳이 경전에 옮길 필요가 없었다. 싯다르타가 어렸을 적부터 봤던 것은 사람들의 끔찍한 모습이다. 사람이 죽고, 병들고, 이를 누구도 돌보지 않는다. 또 위에서 군림하고, 때리고, 전쟁도 난다. 이런 모든 것들이 괴로운 것이다.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 사료를 볼 때 붓다는 제일 경계했던 것이 ‘제사’다. 제사는 블랙홀이다. 제사는 당시 최고의 의례 행위였다. 제사에 소를 바친다. 소는 제사장인 브라만에게 간다. 누가 바치는가? 평민인 바이샤다. 때문에 평민으로 생산을 담당하는 바이샤 계급들은 괴롭다. 또 바이샤가 내는 세금이 나오지 않으니까 끄샤뜨리야도 괴롭다. 붓다는 제사를 반대했고 브라만을 부정한다. 오죽했으면 평민들에게 ‘소를 뺏기지 말라’고 했겠는가. 소를 뺏기니까 가난해진다고 했다. 붓다는 모든 악의 근원은 가난, 제사, 전쟁 등에서 나오며, 사람이 재물에 대해 명민해야 한다고 했고, 재물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경전의 사문유관은 붓다가 당대 모든 사람들의 괴로움을 보면서, 그때의 마음 상태를 상징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 붓다는 왜 출가했는가?

“당대 사람들이 처해있던 사회, 경제적인 고통의 상황 속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했다. 세상을 버리고 출가한다는 것은 유일하게 인도에서 나온다. 당신 인도에서 제사 전통은 이미 1천 년 이상됐다. 이 제사 전통을 반대하는 이들이 주변인(marginal man)들이다. 그런데 이 제사 전통이 워낙 강고해서 깰 수 없었기 때문에 사회 밖에서 궁극을 찾고자 하는 이들이 나타난다. 바로 출가자들이다. 싯다르타는 사람들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사회 혁명을 하거나, 사회 경제 시스템을 바꾸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 출가자들이 대부분 그랬다. 오히려 궁극을 찾고자 했다. 세상의 악의 뿌리, 그것에 문제를 두었다. 궁극이다. 이를 향해 극단적으로 갔던 이들은 삶 자체를 부정해 자살을 택했을 것이다. 온건하면 세상 속에서 제사 전통을 이어가는 브라만으로 간다. 궁극, 고통의 뿌리를 찾는 것이 당시 인도사회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런 흐름이었다. 우리는 세상에 불만이 있으면 세상을 때려 엎으려고 한다. 그런데 인도 사람들은 세상 안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로 인해서 세상에 고통이 나타나는데, 그 드러난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 그 고통의 근원을 문제로 본 것이다.”

 

- 당시 출가 수행자들은 싯다르타가 느꼈던 문제의식을 동일하게 가졌다는 것인가?

“그렇다. 그래서 사성제 중에 고苦, 집集, 멸滅에 대해서는 당시 출가자들이 동일하게 인식했다. 세상이 고통이고, 그것은 욕망이 모여 생기는 것이며,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고자 한 것이다. 붓다가 다른 출가자들과 갈라진 것이 바로 도道다. 세상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가, 하는 문제의식은 같았지만, 그 해결의 방법을 달리한 것이다. 다른 출가자들이 극단적인 고행이나, 추론 등으로 네 번째 길을 찾으려고 했지만, 붓다는 중도中道, 팔정도의 길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의 진리의 핵심은 중도인 것이다.”

 

- 붓다의 중도는 무엇인가?

“수행적 의미에서 중도는 극좌적 고행, 카스트에 집착하는 극우적 모습을 버리고, 팔정도로 가는 것이다. 사회적 의미로 볼 때 붓다는 사회 바깥으로 나간 출가자들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사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챙긴다. 자비심인데, 결국 이것이 대승불교로 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의 색깔과 기본 지평이 나타나는 대목이다.”

 

- 붓다는 무엇을 깨달은 것인가?

“연기緣起다.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생성하고 소멸하기에 어떤 것이든 혼자 존재할 수 없고, 반드시 원인과 결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 깨달은 자로서 붓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역사적인 장면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붓다의 제자인 아난다가 여성을 승가 안으로 받아들이자고 제안한 장면이다. 여기서 붓다의 뛰어남은 권위의 카리스마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말이 맞네, 하고 아난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당시 인도사회는 강고한 카스트 가운데 출가할 때 종을 데리고 오는 경우도 많았고, 또 수드라 계급도 출가했다. 그런데 여성은 아니었다. 사람의 축에 속하지 않았다. 승가에 여성의 출가를 허락한 것은 혁명적인 것이다.”

 

- 붓다의 삶 중 후반기의 기록이 거의 없다고 했다. 왜 그런가?

“제자들이 붓다라는 한 개인의 삶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진리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붓다가 살아계실 때의 승가는 아주 느슨한 공동체다. 조직이 없다. 초기 승가는 각 개인이 수행을 할 뿐이다. 그래서 기록이 없다.”

 

- 붓다는 왜 신격화되었는가?

“인도의 6월, 7월, 8월은 우기다. 이때는 파종을 바쁘게 할 때이다. 그런데 붓다의 제자들은 늘 돌아다닌다. 그때 대중들 속에서 ‘파종 때 돌아다닌다.’고 불만이 나왔다. 그러자 걸식이 잘 안 된다. 제자들이 우기雨期 때는 돌아다니지 말자고 했고, 기원정사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역설적이게 이 정사를 유지하기 위해 ‘의례’를 하게 된다. 우기에 의례를 적극적으로 하면서 점차 정사가 커지게 되는 것이다. 의례를 한다는 것은 힌두교와 차이가 없다. 붓다 사후 400년 뒤에는 이런 의례가 더욱 발전하면서, 더 많은 신도를 모으게 된다. 점차 붓다를 신격화하는 흐름이 고착된 것이다.”

 

- 교수님은 불교에 근본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고 했다. 어떤 의미인가?

“붓다는 ‘나의 길만이 길이다.’라고 하지 않았다. 붓다에게 근본(fundamental)은 있을 수 없다. 기준이 없다. 그저 붓다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각자 알아서 가는 것이다. 붓다는 세상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없고, 늘 변한다는 것을 인식한 분이다. 세상 밖에 있는 출가자들은 이에 따라 각자 길을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세상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를 모른다. 때문에 붓다는 강력한 왕권, 전륜성왕이 형성되어야 브라만에 대항할 수 있다고 봤다. 붓다는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지 못하게 되어야 한다고 했다. 붓다는 사회의 안정과 유지를 위해 왕권을 도와줬다. 국가의 올바른 정립을 바란 것이다. 그래야 브라만으로부터 대중들이 (재물을) 빼앗기지 않기 때문이다.”

 

- 붓다가 정치 사회적으로 개입했다는 것인가?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다. 조언이었다.”

 

- 조언이라면 붓다는 정치 사회에 늘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뜻인가?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면 그것은 붓다에 대한 모독이다. 역사 공부를 하면 사료 분석을 해야 한다. 『니까야』 경전은 목적 자체가 수행을 위해 기록한 것이다. 물론 『담마빠다』와 『숫따니빠따』는 좀 다르지만. 『니까야』에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 극히 적다. 그런데 역사가가 현미경을 들이대고 봤더니, 요소요소에 나온다. 붓다는 사회 속에서 카스트를 인정했다. 다만, 승가에서는 없었지만.”

 

- 붓다가 이루고자 했던 새로운 사회와 전륜성왕이 이루고자 했던 새로운 사회는 같은가?

“같다고 봐야 한다. 붓다 스스로가 전륜성왕으로서의 인식을 갖고 있었다. 전륜성왕은 세상을 정복한 이다. 붓다는 세상을 포기함으로써 세상을 얻는 이다. 각자의 역할과 영역이 있는 것이다. 붓다는 당시 전륜성왕을 대단히 유의미하게 봤다.”

 

- 불교가 오늘날에 어떤 정치 사회적 의미를 줄 수 있는가?

“불교는 기독교를 따라가지 않아야 한다. 불교는 불교가 갖고 있는 무정체성의 정체성이 있다. 어머니 같은 마음이다. 자식이 공부를 못하면 못하는 대로 내 자식이고, 잘하면 잘하는 대로 내 자식이다. 불교가 민족주의와 만나면 안 된다. 민족주의는 이분법이다. 우리와 남. 불교는 공격적 포교를 하면 안 된다. 생활 속에서 사람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기독교는 옳고 그름의 종교이다. 이단이나 박해와 같은 개념이 있는 종교이다. 정체성의 종교이다. 불교는 다르다. 이단, 박해, 전쟁의 종교가 아니다. 현대사회에 가장 어울리고 융합될 수 있는 종교이다.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고 품어줄 수 있는 종교다.”

 

- 불교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뜻인가?

“불교는 어떤 것을 정해놓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정하면 옳다, 그르다고 하는 것이다.”

 

- 그럼 교단도 필요없다는 것인가?

“교단이 우선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각자 알아서 수행하고, 각자 길을 가는 것이다. 서로 품어주고. 그것이 중요하다. 교단이 우선되면 기득권이다.”

 

- 교수님은 붓다를 새로운 사회를 꿈꾸며 시대의 소명을 지닌 역사인이라고 했는데, 붓다의 시대적 소명은 무엇인가?

“두 가지다. 붓다는 이 사회에서 무의미한 것을 얻어내려고 싸우고 아등바등하지 않았다. 근본은 인간에게 달려있다고 봤다. 사회의 개혁을 고집하지 않았다. 사회 밖에 유토피아를 만들려고 했다. 두 번째는 대자대비다. 뱀에 물려 죽어가는 이에게 붓다는 말한다. 주문을 외워서 위로를 하라고. 그런데 붓다는 본래 주문을 부정했다. 그런데, 죽어가는 이에게 주문을 외워서 위로하라고 말한다. 모순이지만, 자비가 우선이었다. 사람을 위하는 이 마음이 붓다의 자비다. 나중에 이 방편이 제자들에 의해 중심이 되긴 했지만.”

 

- 붓다를 비관주의라고 했는데, 왜 비관주의라고 생각하는가?

“고통의 근원은 사회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서 비관주의자다. 싯다르타는 왕자로서 수많은 고민과 생각을 했다. 결국 왕자로서는 (사회 개혁의) 길이 없다고 봤다. 당신의 선배 스승들이 했던 고민들이었다. 인도인들은 사회를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국가, 민족, 제도 등의 기록들이 거의 없다. 불교 경전에서 기록이 있지만, 힌두교 쪽은 거의 없다. 근대적 의미의 역사인식이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수행자들은 궁극을 위해 사회 밖으로 갔을 뿐, 다시 사회를 돌아보지 않았다. 붓다는 달랐다. 사회 밖에서도 사회의 관심을 계속 이어나갔다. 붓다는 사람에 대한 존중을 잊지 않았다.”

 

- 붓다가 상가를 조직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힌두교는 포교에 대한 개념이 없다. 불교는 포교에 대한 개념이 아주 강하다. 남부 인도로 내려간 수행자는 불교 수행자가 유일했다.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개종이 아니라,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 안에서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인민을 교화하기 위해서 아주 느슨한 형태의 상가를 만든 것이다.”

 

- 당시 상가에서 붓다와 제자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붓다에게 제자는 말씀을 청하는 제자이다. 한국불교 전통에서 이어진 도제식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다. 도제식이라면 모든 것에 대해 스승을 따라가는 것인데, 붓다와 제자는 그렇지 않다. 각자 길을 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서산 대사가 눈 덮인 길을 갈 때 조심하라, 뒷사람 따라온다고 했지만, 붓다에게 물어보면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다. 각자 길 가라고 했을 것이다.”

 

- 붓다가 브라만의 권력 독점에 반발했지만, 사회변혁은 안중에도 없었다고 했다.

“그렇다. 무의미하게 봤다. 붓다는 정치인이 아니다. 세상에 무관심하고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 그런 붓다의 판단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의미를 줄 수 없는 것인가?

“아니다. 나는 지금도 사회운동을 하고 있는데, 제일 큰 문제와 해결을 붓다의 말씀 속에서 찾는다. 사회운동으로는 (본질적으로) 해결이 안 된다. 궁극적으로 사람과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소통하는 것이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와 정치가 바뀐다. 내가 옳다, 네가 그르다는 것으로는 바뀔 수 없고, 결국 극단적으로 간다. 오늘날에는 붓다의 사람들이 이 문제를 선도해 가야 한다.”

 

- 교수님은 붓다를 단순한 사상가가 아니라 중요한 실천가였다고 했다. 어떤 의미고, 무엇을 실천했다는 것인가?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직접 행동에 옮겼기 때문이다. 세상을 버리고 나왔다. 버리고 온 세상에 대해 왕과 만나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승가를 만들었다. 또 여성을 승가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세상에 교화하려고 제자와 함께 나갔다. 혼자 깨닫고 혼자 궁극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역사인으로서 붓다의 의미가 있다. 그런데 오늘날 붓다를 깨달은 사람, 신 등으로만 언급한다. 안타깝다.”

 

- 붓다는 역사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가?

“사회가 잘못되었으면 거침없이 싸우라는 것이 붓다의 뜻이다. 다만, 그 해결책을 사회 바깥에 제시했을 뿐이다. 대단히 급진적이며 진보적이다. 사회 안에 있는 시스템을 완전히 깨버렸으니까. 당시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힌두교의) 제사나 윤회를 깨버렸으니까. 보수적인 면이 있다면 사람에 대한 것이다. 붓다는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 때론 말을 바꾸기도 한다.”

 

- 교수님은 붓다의 제자들이 보시에 탐닉하면서 경제 행위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또 붓다는 세상 안으로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표현은 어떤 뜻인가?

“어려운 문제다. 저는 붓다에 대해 무미건조하지만, 종교로서의 불교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기복적이며 비합리적이다. 생각하는 수준이 너무 떨어진다. 그 이유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다시 세상 안으로 들어와서 길을 제시함으로써 기복적이며 비합리적인 여지를 만들어준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내 스스로 모순이 있다. 세상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면 붓다의 관용성, 자비 등은 없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붓다 당신이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한 존중 등이 당신의 제자들에 의해 악용되었다고 생각한다.”

 

- 부처님은 부모와 가족을 모두 버리고 출가했다. 세속의 불자들에게 부처님의 삶이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가?

“붓다는 두 가지 이야기를 한다. 당시 인도 사회에서 삶의 궁극을 추구하려면 출가하고, 세속에 남으려면 윤회의 삶에서 사는 것이다. 세속에서는 한계가 있다. 카스트 속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오늘날과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다. 간단하게 보면 오늘날 재가자들이 붓다를 따르고자 한다면 돈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내가 옳다고 하지 말고, 남녀 차별하지 말고….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 붓다는 재가자들에게 어떤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는가?

“붓다는 재가자들에게 실질적이며, 실용적인 것을 가르쳤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다. 속지 말고, 빼앗기지 말라고 했다. 전륜성왕이 추구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에 보면 복지사회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 부처님의 삶에서 가장 갈등을 일으켰던 사건이 있는가? 부처님은 그 갈등을 어떻게 풀어가려고 했는가?

“붓다 이후로 붓다 같은 혁명가는 나오지 않았다. 안타깝지만 붓다는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물론 작은 사건 속에 갈등을 풀지만, 거시적인 갈등은 풀지 못한다. 예를 들면 카스트가 그렇다. 당시 붓다의 승가에는 다양한 카스트 계급들이 들어오지만, 붓다는 사회적으로 카스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붓다의 현실적 한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