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붓다] 가장 드높게 삶을 꽃피운 분. 가장 따라서 가고 싶은 분. 붓다

최한실 대표

2016-05-18     불광출판사

1.png
 


경북 상주에 있는 ‘푸른누리 마음닦는 마을’(이하 푸른누리) 최한실(68) 선생을 인터뷰해야겠다는 마음을 낸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선생은 한살림 괴산 모임방 ‘무위당학교’ 겨울공부에서 강의를 했는데 그 강의 제목이 ‘고타마 붓다의 삶과 가르침’이다. 불교계 밖에서 비불자를 대상으로 한 강의 주제가 역설적이게 불교의 핵심인 것이다. 강사가 궁금했다. 최한실. 푸른누리 마음닦는 마을 주인장. 1995년부터 생태공동체 운동을 시작해 지금은 이곳 상주에서 마음닦기 공동체를 꾸리고 있다. 정토회 문경수련원에서 초기 ‘깨달음의 장’을 이끌었던 이. 그 이전에는 한국불교환경교육원 운영과 교육에 참여했다. 더 멀리 그는 급진적 사회운동에 깊이 관계하기도 했다. 이런 이력의 귀결점이 ‘마음닦기’이며 ‘붓다’이다. ‘푸른누리 마음닦는 마을’이 생태공동체인가, 라고 질문하자 선생은 아니라고 했다. 생태공동체로 출발하였지만, 지금은 마음닦기 공동체라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위빠사나 수행공동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이 말을 쓰지 않는다. 마음닦기. 이렇게 말한다. 특이한 점은 선생은 한자어, 일본어 등의 말투를 의도적으로 쓰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에 겨레말을 채운다. 인터뷰 내내 불교식 한자어는 여지없이 겨레말로 ‘옮겨’ 나타난다. 불교식 한자어에 익숙한 우리 일행은 ‘겨레말’을 이해하지 못해 한자어로 다시 뜻을 묻기도 했다. 이 인터뷰에는 한자어에 익숙한 독자를 위해 겨레말과 한자어와 혼용해 썼다.    

- ‘푸른누리 마음닦는 마을’을 소개해달라. 

“스스로 부지런히 마음닦아 모든 마음더럼에서 벗어나서 고요하고 흐뭇하고 사이좋게 어울려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하늘 땅 사람, 모든 목숨붙이가 한데 어울려 함께 사는 삶터이다. 모든 목숨이 똑같이 주어진 목숨을 한껏 누리도록, 그래서 어떠한 고기도 먹지 않고, 술, 담배를 비롯하여 마음을 흐리게 하는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피우지도 않는다. 메와 들에 저절로 나는 멧나물, 들나물 뜯어 먹고, 똥과 오줌을 따로 모아두었다가 낟과 남새를 기를 때 푸나무거름과 함께 써서 좋은 먹거리를 길러 먹는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마음닦아 몸튼튼, 마음튼튼하다. 겨레말 살려 쓰기를 나날살이 말마디마다 힘써 알게 모르게 배워 익은 일본말, 중국말, 미국말 버릇에서 벗어나 배달말 살이를 한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어른들과 어울려 함께 살며 삶 속에서 온갖 슬기를 배우고 익힐 수 있게 삶을 꾸려간다.”

- 90년대 한국사회에 생태공동체 운동이 활발했지만, 지금은 주춤하다. 왜 지금도 생태공동체인가?

“‘푸른누리 마음닦는 마을’은 생태공동체 마을이 아니다. 처음에는 생태공동체를 지향하면서 자급자족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2001년 마음닦기(위빠사나)를 처음 접하고, 6년 동안 인도 미얀마 등에서 마음닦기 수행을 했다. 이후 이곳을 마음닦는 마을을 지향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이곳에 머물려면 열흘 동안은 반드시 마음닦기를 해야 한다. 또 메와 들에서 나는 나물을 뜯어서 한살림에 판매해 살아간다.”    
 
이곳이 생태공동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기자 일행이 300m 고지에 널따랗게 자리잡은 ‘푸른누리 마음닦는 마을’을 찾았을 때 십여 명의 사람들이 오전에 주변 산에서 뜯어온 나물을 한창 포장하고 있었다. 포장된 나물은 한살림에 판매한다. 봄철 판매한 수익금으로 한 해를 난다. 그 외 모든 일정은 ‘마음닦기’다. ‘푸른누리 마음닦는 마을’이 어떤 공동체를 지향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기본 프로그램은 ‘열흘닦기’다. 열흘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위빠사나 마음닦기를 하는 것이다. 참가비는 ‘무료’다. 조건이 있다. 마음닦는 내내 말없이 부지런히 마음닦을 수 있도록 서약해야 하며, ‘지킬 일 여섯 삼감’(산 목숨을 죽이지 않습니다. 주지 않은 것을 갖지 않습니다. 그릇된 어르기를 하지 않습니다. 거짓말 거친 말 헐뜯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술ㆍ담배ㆍ마약을 하지 않습니다. 한낮이 지나서는 먹지 않습니다.)을 따라야 한다. 

- 오랫동안 사회, 환경, 생태 활동을 꾸준하게 해왔다. 지금은 ‘마음닦기’를 하고 있다. 왜 ‘마음닦기’인가?

“마음닦는 일은 붓다께서 깨달음을 이룬 뒤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거저 나눠줬다. 그 뒤 2,500해 동안 스승에서 배움이로 고스란히 물려 내려왔다. 그래서  (마음닦기를) 가르치는 데 돈을 받지 않는다. 마음닦기를 배우고 나서 뒷사람이 똑같이 이 마음닦기를 거저 배울 수 있도록 돈을 내든 참섬김(가르치기, 밥하기, 일돕기 등)으로든 베풀고 싶은 사람들 스스로 베풀어서 이 가르침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 붓다는 어떤 존재인가?

“붓다는 누구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스스로 알아내서 그것을 닦아서 깨달음에 이른 분이다. 여태까지 계셨던 모든 붓다는 스스로 깨달음을 이룬 분이다. 붓다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어떻게 사람들이 참말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가.’이다. 이 점이 없어지지 않고 내려와 그 가르침의 알맹이를 지니고 살았던 사람들에게 흐믓하고 느긋하고 고요하게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그것을 닦은 사람들은 옛날에도 이로움을 얻었고, 오늘날에도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서 가면 이로움을 얻는다. 종교가 천주교든, 개신교든, 불교든 껍데기가 뭐든 아무 맺어짐 없이 괴로움에서 참말로 벗어나게 가르쳤다. 아주 쉽고 누구나 배워 익힐 수 있다.” 

- 고타마 싯다르타는 왜 출가했는가?

“그것은 너무 뚜렷하다. 괴로워서 출가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누구라도 괴로움이 있다면 이를 벗어나려고 한다. 그런데 이분은 잠깐 벗어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참말로 뿌리에서부터 오롯이 벗어나려고 하셨다. 삶이 통째로 괴롭다고 보셨기 때문에 통째로 벗어나려고 하셨고, 또 참(다르마, 法)을 찾아가셨고 참을 끝내 찾으셨다.”

- 붓다는 우리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가르쳐주었는가? 

“첫 걸음이 바른 삶(다섯 삼감 여덟 삼감을 꿋꿋이 지키기, 계)이고 둘째걸음은 나들숨 닦기로 마음을 한곳에 모으고(정), 셋째는 이 모아진 마음힘으로 오래 쌓인 온갖 마음 더럼을 뿌리째 깨끗이 뽑아 없애기(슬기,꿰뚫어보기, 혜)다. 한자로 계정혜戒定慧다. 이것을 함께 닦아야지 어느 하나만 닦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서로 이어져있기 때문이다. 계戒는 우리말로 ‘바른 삶’으로 옮길 수 있다. 왜 바르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모르고 모든 일에 짜증이 나고, 성이 나고, 싫거나, 밉거나, 뭘 바라거나, 탐내거나 한다. 저 깊은 마음, 일본 사람들이 어렵게 ‘무의식’으로 옮겼다. 이것이 우리를 움직인다. 붓다께서 저 깊은 마음을 살펴보고, 그 흐름을 알아내셨다. 한자로 업장業障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하면 ‘마음 더러움’이다. 우리 모르게 온갖 것이 깊은 마음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좋으면 달라붙고 싫으면 밀어내서 쌓아놓은 것이 한자말로 업장이라고 한다. 이게 우리를 내내 끌고 간다. 그래서 우리가 숨을 알아차리려고 하지만, 마음이 집에 가고 또 어디로 가고 한다. 이 힘이 나를 밀고 가기 때문에 숨을 1분도 못 알아차리고 끌려 다닌다. 이것을 뿌리에서부터 뽑아내려면 새로 마음을 더럽히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다섯 가지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살아있는 목숨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갖지 않고, 그릇되게 어르지 않고, 거짓말, 거친 말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술이나 마약, 담배같이 마음을 흐리게 하는 것은 먹지 않는다. 이것을 지켜야 한다. 붓다를 따르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반드시.” 

- 붓다께서 깨달은 것과 다섯 제자에게 전한 깨달음은 같은 것인가?  

“같다. 붓다께서는 가운데 길(중도)을 닦아서 깨달음에 이르렀다. 다섯 제자에게 가르친 것이 네 가지 거룩한 참(사성제)이다. 같은 것이다. 붓다는 여덟 개의 거룩한 길을 닦는다. 바른 말, 바른 짓, 바른 벌이, 바른 힘씀, 바른 알아차림, 바른 마음모음, 바른 생각, 바른 봄. 이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을 아는 것이 슬기다. 슬기(慧)는 들은 슬기(聞慧), 헤아린 슬기(思慧), 닦은 슬기(修慧)가 있다. 그런데 깨달음으로 가는 것은 오직 닦은 슬기다. 스스로 겪는 것이다.” 

- 우리가 붓다를 우러러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붓다의 가르침은 종교가 아니고 철학도 아니다. 그것만큼 붓다의 가르침을 부수는 것이 없다. 붓다의 가르침은 붓다께서 직접 겪고 맛본 것을 말씀으로 한 것이다. 누구라도 괴로운 사람이 이를 듣고 붓다처럼 스스로 마음을 닦은 것이다. 붓다께서는 오직 슬기를 닦고 이를 끊임없이 애써서 부지런히 힘써서 온갖 것을 다 해보았다. 누구를 따라간 것이 아니라, 직접 하나하나 해보고, 직접 맛본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따라간다는 것은 바로 우리도 그분처럼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의 더러움을 닦는 것이다. 붓다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라도 부지런히 하면 (붓다가) 된다. 이보다 더 기쁜 말이 어디 있는가? 붓다께서도 우리와 같이 똑같이 사람으로 나서 붓다가 되신 것이다.” 

- 붓다의 가르침의 틀에서 볼 때 종교의 틀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담마dhamma를 닮는 사람, 담마를 사는 사람, 담마를 따라가는 사람이다. 부디즘Buddhism이나 부디스트Buddhist가 아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과학이지 종교가 아니다. 오직 마음과 물질이 어떻게 서로 주고받는지를 겪어서 참을 찾아가는 길이다.” 

- 붓다의 가르침이 쉽고 누구나 따라 배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 적지 않은 불자들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

“붓다께서는 사람들 마음 높이(근기)에 따라 누구나 그 길로 올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다. 그래서 아주 쉽게 이야기를 해주셨다. 많이 배우고 적게 배우고 이런 것이 아니다. 바깥 세상살이란 것이 더 많이 갖고, 더 누려야 하고, 더 큰 것, 이런 쪽으로 간다. 잘 안 되면 바깥을 탓한다. 내가 괴로운 것은 너 때문이다, 이렇게 길들어있다. 붓다께서 알아내신 것은 온누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누리 흐름을 꿰뚫고 지나가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을 알아내신 것이다. 이 길이 담마다. 붓다께서 알아내신 길과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이 서로 다르고 거꾸로다. 붓다께서는 버려서 괴로움에서 벗어나셨는데, 세상 사람들은 가지려고 하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 위빠사나는 바라밀행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이타행利他行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다른 사람을 보살피느라 스스로 보살피기를 게으르지 말라고 했다. 스스로 돌보라는 것은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의 알맹이는 괴로움 참이다. 삶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통째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겪어 맛봐야 한다. 그 말은 아픔을 맛봐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시간 내내 손가락 하나 꿈쩍하지 말고 앉아보는 것이다. 굉장히 아프다. 배고픈 것도 굶어봐야 한다. 왜 붓다께서 괴로움 참을 가장 먼저 말씀했는지 알아야 한다. 괴로움을 비껴가려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을 지켜보는 슬기가 길러진다. 사람들이 바깥에서 괴로움을 찾는 것이 아주 뿌리 깊다.”

- 대승불교의 지향과는 다른 것 같다. 

“수행은 기른 마음 버릇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기왓장이 짱, 하고 깨지듯이 될 수 없다. 그렇게 될 수 없다. 끈질기게 내 마음 버릇을 바꾸는 것이다. 계속 아픔을 맛보고, 또 맛보고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이 안에서 치밀어 오는 마음을 죽이고, 이기는 것이 마음닦기다. 남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 안에 있는 제멋대로 하고 싶은 마음을 이기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알맹이가 빠졌다. 붓다를 따르고자 한다면 붓다가 갔던 길을 그대로 해봐야 한다. 마음은 따로 공부할 것이 없다. 붓다가 아주 자세하게 밝혔다. 그럼 그것을 배워 익혀서 닦아야 한다. 그래야 붓다의 가르침이 살아난다. 1,700년 한국불교 전통이 있는데 우리는 붓다가 어떻게 가르치고, 수행했는지 내놔야 한다.”

- 괴로움이란 것은 다양한데, 사회적 괴로움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그것은 사람이 무엇이고 목숨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나오는 물음이다. 내가 사는 것 같지만, 숨이 콧구멍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우리는 살지 못한다. 내가 숨을 들고 나가게 하는 것 같지만, 온누리가 나를 살리는 것이다. 처음부처 다 이어져있다. 사람이 더 종요롭고 풀이나 나무는 덜 종요롭고 그렇지 않다. 닫힌 것이 아니라 열려서 처음부터 살려지는 것이다. 이를 잘못 알아서 마음에 내내 더러움을 일으키고 마음을 스스로 더럽혀서 괴로움 속에 허덕인다. 옷이 더러우면 빨래하고, 몸이 더러우면 씻는다. 그런데 마음이 더러우면 닦지도 않고, 닦는 길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들 속에 붓다가 한 분 나왔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지 모른다. 어떻게 마음 안에서 사랑이 샘솟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커지고, 고요하고 고른 마음이 커지고, 남 잘 되는 것을 기뻐하고, 이런 커지는 마음이 다 차야 붓다가 된다. 모든 목숨에 사랑이 제 몸처럼 펼쳐나가는 것이 붓다이고, 아라한이다. (불자들이) 붓다와 아라한을 너무 잘못 알고 있다. 그 물음은 잘못된 잣대를 갖고 와서 붓다를 가두어놓는 것이다.” 

- 세속의 불자들에게는 출가의 삶이 선망이기도 하지만, 세속에서 생활하면서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가?

“붓다 때도 머리를 깎고 출가한 이들이 10만 명이 조금 넘었다. 북인도에 살던 1,700만 명이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 집살이(재가자)를 하면서 부지런히 마음을 닦아 많은 이로움을 얻었다. 세속에 있으면서 부지런히 마음을 닦아야 한다. 집살이를 하면서도 버리는 마음을 닦아야 한다. 우리들은 아침에 한 시간, 저녁에 한 시간 반드시 마음닦이를 한다. 그것도 모자란다. 그것이 붓다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 가는 길이다. 집살이도 대충 가면 안 된다. 제가 여기서 꾸려보고자 하는 것도 한 해에 반은 마음을 닦는 것이다.” 

- 여기에는 불자도 아닌 분들이 많다. 불자가 아닌 분들이 붓다는 누구인가, 하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변하는가?

“가장 삶을 잘 산 분, 가장 드높게 삶을 꽃피운 분,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분, 사람으로서 가장 높은 곳에 이른 분, 누구라도 그분 따라서 가고 싶은 분이다. 통째로 자유로운 분이다. 이분은 종교 지도자가 아니다. 언제나 참이 무엇인지 파고들어가는 분, 참을 사는 분이다.”

- 사람들은 세속에서 늘 갈등 속에서 살아간다.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갈등을 어떻게 풀어가도록 말씀해주셨을까?

“마음닦이를 하라고 하셨다. 엄마가 죽은 아들을 데리고 와서 ‘아이가 잠시 잠든 것 같은데 깨어나지 않는다, 살려달라’고 부처님 앞에 간절하게 부탁한다. 부처님은 그 엄마에게 ‘겨자씨를 구해오너라. 근데 사람이 죽지 않는 집에 가서 구해오너라.’ 한다. 그 엄마는 ‘예, 그러겠습니다.’ 하고 집집마다 해가 질 때까지 돌아다녔지만, 결국 겨자씨를 구하지 못했다.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없기 때문이다. 그 엄마는 ‘아, 사람이 나면 다 죽는구나.’ 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붓다께 돌아와 부지런히 마음닦이를 해서 아라한이 된다.”     

- 갈등을 풀어가는 것도 결국 마음닦는 것으로 돌아온다는 뜻인가?

“붓다께서 깨달음을 이루시고 마흔 다섯 해 동안 걸어 다니시면서 오롯이 참을 찾아가셨다. 세상에서 뭘 이루고자 하는 것을 잣대로 부처님을 보고, 이것저것을 알고자 하면 안 된다. 버리고 알아낸 길이 담마다. 마음과 몸이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 알아낸 것이 붓다이다. 그래서 ‘아, 내가 보니 온누리가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하고 알아내고, 그에 따라 살아내니 깨달음을 이루어지더라, 그대도 온누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스스로 알아서 가라.’고 하셨다. 담마를 자기 안에서 길러야 한다. 밖에서가 아니다. 붓다의 길을 따라간다면서 마음을 닦지 않으면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자기 마음 더러움을 스스로 닦아서 더러움을 다 없앤 뒤가 붓다이다. 마음닦이를 안 하면서 붓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붓다 책을 다 읽고 알고 외워도 마음닦이에는 한 발짝도 내딛은 것이 아니다.”

- 불자들은 붓다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우리가 붓다를 따라가려면 그분의 삶을 알아야 한다. 참말로 어떻게 살아가셨는지, 그분이 깨달았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음을 사람에게 어떻게 나누었는지, 그 뒤에 그것을 이어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길을 따라왔는지, 이것을 빨리 제대로 알아서 나누고 함께 가야 한다. 그래 이 어지러운 세상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2.png
 



ⓒ월간 불광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