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만나다]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채워도 차지 않는 욕망에 대하여

2016-05-12     김사업

‘나’라고 불리는 것의 진실

김사업
세상에 똑같은 나뭇잎은 없다. ‘목련 잎’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수많은 나뭇잎. 하지만 그중에 모양과 색깔과 결이 똑같은 잎은 없다. 한 장의 목련 잎도 시간의 간격을 두고 보면 다 다르다. ‘목련 잎’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졌지만 똑같은 나뭇잎은 어느 경우에도 없다. 이름은 그야말로 이름일 뿐이다. 
 
우리 몸은 100조 개의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포들은 약 3개월이 지나면 모두 새로운 세포들로 대체된다고 한다. 매 순간 어마어마한 수의 오래된 세포들이 죽고 그 자리에 새로운 세포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몸은 한 순간도 정지함이 없이 시시각각으로 태어나고 죽는 생멸의 과정에 있다. 내 정신이라는 것도 몸과 다를 바 없다. 매 순간 새로운 느낌과 생각, 감정들이 일어났다가 소멸한다. 
 
어제도 ‘나’이고 오늘도 ‘나’라고 확신하며 이 확신에 근거해서 온갖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위에서 살펴본 대로 내 몸과 내 정신이 동일한 두 상태를 갖는 경우는 결코 없다. 어제도 ‘나’고 오늘도 ‘나’이기 위해선 어제부터 오늘까지 변치 않는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다. 나에게는 ‘나’라는 이름이 예상케 하는 ‘변치 않는 무엇’, 즉 ‘자성’ 또는 ‘아뜨만’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름만 ‘나’이다.
 
한편, 이 순간의 내 몸과 정신은 그 스스로의 힘만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아득한 과거로부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연의 도움으로 있다. 이에 관해서는 2015년 10월호에 게재한 ‘시방삼세 제망찰해, 나 아닌 것 없다.’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어느 순간이나 내 몸과 정신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시간의 층을 관통하며 수많은 인연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이전 순간들의 내 몸과 정신이 없었다면 지금 이 순간의 그것도 있을 수 없다. 양자는 동일하지는 않지만 둘 사이에는 원인과 결과라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밀접한 인과관계에 있기 때문에 둘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만약 둘이 완전히 다른 것이라면 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야 하므로, 오늘의 내 몸과 정신은 어제의 그것 없이도 있을 수 있다는 오류를 범하고 만다. 결론적으로 이전의 내 몸ㆍ정신과 현재의 그것은 ‘같다고도 할 수 없고 다르다고도 할 수 없는’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에 있다.
 
인과관계에 의해 순간순간 생멸하면서 이어져 가는 육체와 정신. 그것은 하나의 흐름 내지 궤적을 그린다. 찰나적으로 생겨났다가 소멸하는 점들의 연쇄에 의해 그려지는 궤적, 이 궤적 위의 점들이 바로 육체와 정신이며 그것을 우리는 ‘나’라는 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을 뿐이다. 이 점들 가운데 동일한 두 점은 없지만, 궤적 위의 모든 개개의 점들은 자신을 있게 한 원인이 되는 점들을 그 궤적 위에 갖는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는 나라는 고정된 뭔가의 움직임이 이 궤적을 그린다고 착각한다. 그런 나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아뜨만이요, 자성이다.
 
부파(=소승)불교가 이상으로 하는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은 지혜에 의해 모든 번뇌를 끊은 결과, 육체와 정신이 완전히 소멸하여 이 세계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반면 대승불교는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을 이상으로 한다. 그것은 지혜에 의해 모든 번뇌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윤회의 세계에 있더라도 물들지 않고, 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이 세계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열반의 경지에도 집착하지 않는 그러한 열반이다. 단적으로 말해, 윤회와 열반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열반이다. 
 
따라서 부파불교가 생각한 이상적 경지는 궤적을 그리는 점의 완전한 소멸이었던 반면, 대승불교의 그것은 궤적 위에 있으나 궤적을 초월한 점들의 연속이었다. 중생의 눈에는 그의 궤적이 있으나 본인에게는 궤적이 없는, 만물과의 경계가 허물어진 찰나적 점들이 생멸하는 연속이 대승불교의 보살이 살아가는 삶이다.
 
| 갈애, 채워지는 족족 더 크게 부풀어 오르는 욕망
‘나’라고 불리는 찰나적 육체와 정신이 형성하는 궤적은 고苦와 락樂 어떤 방향으로도 향할 수 있다. 중생인 우리들에게 익숙한 말로 표현하자면, 나의 삶은 괴로울 수도 있고 평안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방향을 결정짓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행하는 신체적 행동ㆍ말ㆍ생각, 즉 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의 3업이다. 내가 하는 몸짓 하나, 말 한마디, 생각 한 자락에 의해 내 삶의 고락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매 순간 자신의 행동과 말과 생각에 깨어 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불교에 의하면, 과거의 삶이 어떠했든 나는 어느 시점에서도 고苦로 가는 행위도 할 수 있고 락樂으로 가는 행위도 할 수 있다. 때문에 과거를 탓하거나 운명에 핑계를 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를 괴로움으로 이끄는 행동과 말과 생각은 어떤 것일까? 괴로움이 영원히 소멸된 상태가 곧 열반이다. 어떤 행동과 말과 생각을 할 때 나는 열반으로 향할까? 
 
불교는 모든 괴로움의 근본 원인은 갈애渴愛와 무명無明에 있다고 본다. 갈애란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말하고, 무명은 진리에 대한 어리석음을 뜻한다. 갈애와 무명을 달리 표현한 것이 탐(貪 탐욕)ㆍ진(瞋 화)ㆍ치(癡 어리석음) 3독이다. 탐과 진은 갈애의 다른 표현이고, 치는 무명의 다른 표현이다. 탐이 갈애에 속하고 치가 곧 무명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문제는 진인데, 화는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난다. 화는 이와 같이 욕망 때문에 일어나므로 갈애에 속하게 된다.
 
갈애와 무명에 물든 행동과 말과 생각에는 괴로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갈애와 무명이 없는 행동과 말과 생각을 할 때 우리는 열반을 향하게 된다. 이 내용이 『천수경』의 다음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지금까지 제가 지은 모든 악업은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瞋癡, 시작도 없는 탐ㆍ진ㆍ치로 말미암아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행동과 말과 생각에서 생겨났으니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 그 모든 잘못 남김없이 참회합니다.
 
탐진치, 즉 갈애와 무명을 바탕으로 한 행동과 말과 생각이 괴로움을 초래하는 악업이다.
 
괴로움의 근본 원인 가운데 먼저 갈애에 대해 알아보자. 갈증이 날 때 이를 해소하고자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은 더해 간다. 우리의 욕망도 이와 같아서 채운 뒤에 만족하고 멈추기보다는 끝없이 더 커지는 성질이 있다. 이러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이 갈애다. 인도 민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소 99마리를 가진 부자가 살고 있었다. 이 부자는 1마리를 더 채워 100마리를 만들려고 안달이었다. 자신이 소유한 99마리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모자라는 1마리만 크게 보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1마리를 더 채우려고 그는 애간장을 태우며 궁리하고 궁리한 끝에 한 가지 묘책을 생각해 내었다. 
 
다음 날 그는 누더기를 걸치고 멀리 살고 있는 옛 친구를 찾아갔다. 친구는 소 1마리만 가지고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친구에게 부자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너무 궁핍해서 살기 힘들다네. 내일 아침 끼니도 없네. 제발 좀 도와줄 수 없겠나?” 
물론 거짓말이었다. 친구는 근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가 그렇게 힘든 줄 몰랐네. 옛날에는 이웃에 살아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네만, 멀리 떨어져 살고부터는 자네 일을 잊고 있었네. 친구로서 면목이 없네. 나에게 소 1마리가 있네. 나는 소가 없어도 집사람과 힘을 합해서 열심히 일하면 어떻게든 살 수 있을 테니 소를 가져가게. 너무 의기소침해 하지 말고 부디 힘내게나.”
 
부자는 고맙다는 말을 건성으로 남기고는 얼른 소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속였든 어쨌든 이제 100마리를 채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친구를 속여 100마리를 채운 부자와 유일하게 가진 소 1마리마저 주어 버린 친구. 이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행복한 사람일까요? 인도 민화는 이 물음으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누가 더 행복한 사람일 것 같은가? 시험 문제로 출제되었다면 우리는 대부분 가난한 친구가 더 행복한 사람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래야 점수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내가 소 99마리를 소유하고 있는 장본인이라면 어떨까? 99마리 중 자투리 9마리가 거추장스러우니까 이것을 살기 힘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할까, 아니면 이야기 속의 부자처럼 1마리를 더 채우려고 애를 태울까? 1마리를 더 채우고자 하는 충동이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인도 민화에 나오는 부자의 행복이 얼마나 오래 갈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는 가난한 친구를 속여 가며 100마리를 채울 정도의 욕심을 가졌다. 그런 욕망의 소유자이기에 그는 100마리에 만족하지 않고 곧 150마리를 채우려 할 것이다. 150마리 다음엔 200마리, 200마리를 가지면 다시 250마리, 사는 도중 어떤 큰 계기가 없다면 죽을 때까지 이렇게 더 채우려 할 것이 분명하다. 그는 항상 부족하고 더 소유하려고 허덕이므로 행복할 틈이 없다. 그치지 않는 긴장과 짜증으로 심각한 병까지 초래할지 모른다.
 
많이 가질수록 행복이 커질 것 같지만, “좀 더, 좀 더” 하다 보면 부지불식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물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남의 떡만 크게 보여서 겪지 않아도 될 괴로움을 불러들이게 된다. 많이 소유할수록 행복도 반드시 커진다고 말한 성인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불필요한 것에서 자유로울수록 행복은 커진다는 것은 자명하다.
 
인도 민화 속의 부자의 욕망은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이다. 채워지는 족족 더 크게 부풀어 오르는 이것을 갈애라고 한다. 경전에서는 “설산 전체를 황금으로 바꾸고 또 그것을 두 배로 늘인다고 해도 한 사람의 갈애를 만족시킬 수 없다.”고 한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맥베스의 부인은 “희망을 이루어도 만족은 없다.”고 말한다. 갈애의 성격을 잘 보여 주는 말들이다.
 
불교의 사성제四聖諦 가르침에서는 이 갈애 때문에 모든 괴로움이 비롯된다고 한다. 나에게는 이런 갈애가 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이야기 속의 부자의 입장이 되면 과연 1마리를 더 채우려고 허덕이지 않을까? 
 
필요한 것은 충족되어야 한다. 필요와 갈애는 다르다. 목이 마를 때는 물이 필요하다. 갈증을 해소할 정도로 물을 마시고 나면 만족하고 더 이상 물을 마시려고 하지 않는다. 용변의 필요를 느꼈을 땐 화장실에 가야 한다. 그래서 볼일을 마쳤으면 더 이상 화장실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필요는 충족되면 곧 소멸한다. 하지만 갈애는 이루어져도 만족이 없고 끝 간 데를 모른다.
 
문제는 얼마나 필요하며 얼마나 가져야 만족하는가이다. 필요가 갈애로 변질되는 순간, 우리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졌으면” 하고 바라는 ‘조금만 더 병’에 걸리게 된다. 이 병은 정신을 못 차리게 해서 불필요한 것도 필요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거기에 무작정 매달리게 한다. 
 
갈애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평화로움이 찾아든다. 눈에 들어오지 않던 아름다운 저녁놀이 보이고, 사람들이 왠지 친숙하게 느껴진다. 얼굴과 말도 부드러워진다. 사람들이 참으로 필요로 하는 건 값비싼 물건보다 언제나 봐도 속이 인자하고 따뜻한 이런 이웃과 친구가 아닐까. 그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해지는 그런 사람이 그리운 건 아닐까.
 
| 갈애에서 자유롭게 되는 길
우리는 무엇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반응만 한다. 우리의 반응은 대부분 둘 중의 하나다. 그것을 긍정하든지 아니면 부정한다. 누가 자신에게 바보라고 욕한다면, 바보가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대들거나 바보가 맞다고 체념해 버린다. 그 말에 대해 무시하는 것도 일종의 부정이다. 긍정하든 부정하든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당나라 때의 덕산(德山宣鑑, 780~865) 선사는 학인들을 지도할 때 곧잘 주장자를 휘둘러 그들을 때렸다. 질문에 대해 학인이 뭐라고 한마디 해도 30방, 침묵해도 30방이었다. 유명한 ‘덕산의 방棒’이란 말이 나오게 된 까닭이다. 
 
덕산 선사는 주장자를 치켜들고 물을 것이다 “누가 너에게 바보라고 한다. 어떻게 할 거냐?” 당신이 “예, 저는 바보입니다.” 하고 바보를 긍정한다면 덕산 선사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주장자로 호되게 칠 것이다. 부정을 하거나 침묵을 지켜도 다짜고짜 주장자를 맞기는 마찬가지다. 책에서 읽거나 남에게서 들은 내용을 짜 맞추어 뭐라고 보인다면 더 맞는다.
 
이렇게 매번 눈에 불이 번쩍 나도록 맞았다. 덕산 선사는 여전히 묻는다. “누가 너에게 바보라고 한다. 어떻게 할 거냐?” 당신은 이제 바보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어떤 반응도 할 수 없게 된다. 그저 두 눈 똑바로 뜨고 질문 속의 바보를 만나고 있을 뿐. 얼마나 자비로운 주장자인가. 바보에서 자유롭게 될 때까지 노구의 덕산 선사는 있는 힘을 다해 자비의 주장자를 후려친다. 
 
갈애에 대해서도 우리는 위와 같은 방식으로 반응만 한다. 갈애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것을 부정하여 억누른다고 해서 갈애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얼마간은 잠잠할지 모르나 갈애는 또다시 고개를 내민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경험상으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갈애를 긍정하여 갈애의 충동대로 행동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떻게 하면 갈애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긍정도 부정도 하지 말고 자신 속의 갈애와 만나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갈애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에 대해 비난을 하거나 칭찬을 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그것과 만날 수 없다. 자신의 마음을 고요히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한시라도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뭔가를 재잘거리고 있음을 발견한다. 온갖 것에 대해 ‘좋다 싫다.’, ‘밉다 곱다.’, ‘옳다 그르다.’ 이러쿵저러쿵 쉴 새 없이 재잘거린다. 이러한 재잘거림과 그 재잘거림에 따른 행동ㆍ말ㆍ생각이 바로 반응이다. 
 
이런 반응들이 부질없다는 것을 통절히 자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하여 반응들이 멈출 때 있는 그대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있는 그대로가 보이면 내면에 강압에 의한 인위적인 질서가 아니라 자연스런 순리가 생긴다. 긍정도 떠나고 부정도 떠난, 칭찬도 떠나고 비난도 떠난 중도中道의 순리.
 
갈애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만날 때, 갈애에서 자유롭게 되는 길이 열리기 시작한다. 갈애에 대한 내 생각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갈애를 만나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억누르거나 조작하려 들지 않고 이름도 모르는 뭔가를 만난 듯 가만히 대면하고 있으면(자세한 것은 2015년 1월호 신비로운 바람 부분 참조), 마음은 재잘거림을 멈추고 고요해진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얼마만큼일까? 나는 ‘조그만 더 병’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덕산 선사가 옆에 계시면 좋으련만.  
  
장휘옥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하여 석사 과정 졸업. 이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 화엄 사상으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불교학개론 강의실 1, 2』, 『무문관 참구』(공저),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 등 1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중국불교사』 등을 번역했다. 
 
김사업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유식설에서의 연기 해석」, 「선과 위빠사나의 수행법 비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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